기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보통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필요에 따라 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순간마다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기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은 기적이고 이면에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기도였고 기도가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깊은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 보면, 기도와 삶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삶이란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삶에는 경건이 있고 거룩함이 있으며 진지함이 있습니다. 삶과 유리된 기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념적이고 습관적이며 허공에 뜬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삶은 기도, 기도는 삶
또 하나는 우리가 마음에 작정하고 시작하는 특별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생명을 걸고 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우리는 ‘생명 기도’라고 말합니다. 특별 기도는 자주하는 것은 아니라,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에 마음을 다잡고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나 위기 상황 그리고 근본적으로 어떤 변화를 시도할 때 하는 특별 기도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후 특별 기도를 세 번 정도 한 것 같습니다. 목회지를 옮겨야 했을 때, 병마와 싸우며 목회를 포기한 채 새 길을 열어달라며 영국으로 떠났을 때,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입니다. 며칠씩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특별 기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시점을 앞두고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특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특별했던 이유는 온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통과 저주의 십자가를 져야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귀신을 내어 쫓는 것과 차원이 다른 예수님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마지막 역사 앞에서 특별 기도하신 것입니다. 3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우리는 예수님께서 평소에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느낌으로 기도하지 말고 원칙과 기준에 맞는 기도를 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른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성도님들에게 다시 한 번 도전합니다. 고난 주간을 맞아 새벽 기도회에 나오셔서 주님 앞에 엎드려 보십시오. 일 년은 못해도 한 달, 한 주간만이라도 작정하고 새벽에 기도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 기도하셨는데, 우리는 금식 기도는 아니더라도 40일 동안 새벽 기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자 사람들은 환호하고 갈채를 보냈지만, 이를 물리시고 예수님께서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중보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가 삶이며 사역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직접 보여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겉으로 겸손함과 진실함이 묻어납니다. 말을 많이 하고 가십을 만들어 내며 남을 비판하고 다니는 사람은 기도를 하지 않는 경향을 보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인간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께선 말씀과 성령을 통해 응답하십니다. 기도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생각을 하면 인간이 보이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생각을 하면 인간이 움직이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십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남을 비판하고 열등감이 쌓이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비교 의식과 열등감의 나락에 빠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기도의 비밀입니다.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지만, 이제 특별 기도를 하십니다. 특별 기도란 갑자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도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9절 말씀에서 우리가 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신 점입니다. 이것은 기도에 동역자가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주로 혼자서 하는 것이지만, 생명을 건 특별 기도엔 동역자를 필요로 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중노동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기도하지 않다가 어려운 일을 닥치게 되면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기도가 어려운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때를 따라 적당히 고난을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매를 맞기 전에 먼저 기도해야겠습니다.
기도에 동역자가 필요하다
기도하지 않는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만드는 방법을 갖고 계십니다. 곧 우리가 가장 아끼는 것을 쳐버리시는 방법입니다. 일상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곧 기도할 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에는 동역자가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 동역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잤습니다. 40절 말씀을 봅니다.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감람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많지만, 핵심적인 것은 주님께 무엇인가 얻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함입니다. 주기도문에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매일의 삶이 시험에 노출돼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전제이고 현실입니다.
옛날엔 문둥병에 대해, 모르고 3년 알고 3년 터져서 3년이라고 했습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감각이 없어지기 때문에 눈, 코, 귀, 손발 등이 떨어져 나가도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우리 중에 영적 문둥병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혼이 죽어 가고 있는데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고뇌하는 것은 하나의 축복인지도 모릅니다. 고뇌한다는 것은 감각이 있고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감각마저 없이 갈등도 하지 않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감람나무들이 있고 제자들은 자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마귀들이 맴돌고 있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이기는 기도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함입니다. 마귀는 인간을 유혹해서 조종하려고 합니다. 밀 까부르듯 인간들을 마음대로 갖고 놉니다. 그러나 마귀의 조종을 받고 있는 인간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마냥 죽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41, 42절 말씀을 읽습니다.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의 특별기도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자신에게서 옮겨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시는 십자가는 죄인들이 지는 일반 십자가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양 옆에 두 강도도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 달려서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정도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시는 십자가는 육체적 고통 외에 온 인류의 죄를 감당해야 하는 무서운 저주의 형벌이었습니다. 모든 인간들의 죄의 무게와 압박감이 무섭게 압박해 왔던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슬퍼하시고 놀라셨으며 심히 고민해 죽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결정적인 순간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손님이 있습니다. 바로 마귀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것이 마귀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의 영혼을 빼앗으려고 난리를 칩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탄생 자체부터 방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하신 후에도 나타났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시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특별 기도하실 때에도 나타났습니다.
보통 일이라면 예수님께서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도록 세 번씩이나 기도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온 인류의 죄 값을 치르시는 엄청난 역사를 앞두고 심혈을 기울여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때 마귀가 나타나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어떻게 유혹을 했을까요? 앞뒤 상황을 살펴보면 두 가지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야, 꼭 십자가를 져야 할 이유가 없지 않냐.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을 계획하셨다면 네가 죽는 것으로 계획할 게 뭐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데 네가 죽지 않아도 인간을 구원하실 것 아니냐’며 유혹했을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야,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 줄 아니? 십자가는 혹독하고 잔인하며 처절한 것이야’라며 계속 공포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라
예수님께서 고민하고 슬퍼하면서도 기도하신 것을 보면, 아마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승리하신 비결은 기도였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기도를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는 기도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방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이기고 육체의 본능을 꺾고 기도해야 합니다. 일상에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유혹이 계속 되고, 엄청난 고통이 밀려드는 가운데서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육체의 본능을 극복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도 터치’입니다.
이미 우리는 침묵 터치, 고독 터치를 했습니다. 성공한 후에 밀려드는 환호를 포기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는 일이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현재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침묵과 고독 터치로 이겨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을 포기하도록 유혹하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마귀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무기는 바로 기도 터치인 것입니다. 43절 말씀입니다.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격정적이었던지 하늘의 천사가 와서 예수님을 도울 정도입니다.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 기도할 때 천군 천사가 와서 격려하고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깊을 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홀로 있는 게 아니라, 천군 천사가 와서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실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로마서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무슨 말로 기도해야 할지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성령님과 천군 천사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 터치에 천군 천사가 있었습니다. 44절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