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여유가 생기고 환경이 좋아지면 겸손은 교만으로 변하고 감사는 불평으로 바뀌게 됩니다.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목은 점차 굳어집니다. 어려울 때 다정했던 부부는 자주 다투게 되고 이혼이란 말을 쉽게 내뱉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위기는 성공했을 때 찾아오는 것
사람에게 위기는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성공했을 때 찾아옵니다. 가난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부요하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해 위기를 겪게 됩니다. 무명이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유명인이 되면서 위기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위기는 군중들 앞에서 많은 기적을 베푸셨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놀라워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많은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서 두 가지 터치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는 성령 터치를 통해 기적의 사역이 시작되었고, 다른 하나는 말씀 터치를 통해 마귀의 세력을 꺾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곧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고 마귀의 세력을 꺾은 후부터 기적을 일으키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2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후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 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당시 예수님의 대중적인 인기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흔히 우리는 마태복음 5, 6, 7장 말씀을 산상수훈이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산에서 설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 터치와 말씀 터치를 이루신 후에 설교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령 터치와 말씀 터치를 이룬다면 사역, 설교, 가르침 등에서 능력을 덧입고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8~29절 말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또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시자마자,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치시며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십니다. 또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귀신 들려 소리를 지르고 다니는 사람을 고치십니다.
계속해 죽은 야이로의 딸을 다시 일으키시고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을 낫게 하시며, 소경 나사로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십니다. 이 모든 기적들이 예수님의 성령 터치와 말씀 터치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좁은 영역을 감안하면, 오늘날과 같은 매스미디어의 발달이 없어도 예수님의 기적들에 관한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한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신속하게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호기심 반, 놀라움 반으로 마구 몰려들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하나의 신드롬이 생겼고 주님의 기적으로 충격을 받아 사회는 패닉 현상에 빠져들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예수님께 집중되었고 큰 무리를 이루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 위기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마귀의 시험보다 더 위험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마귀라면, 그 존재를 알고 들어가기 때문에 어쩌면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성공에 대한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가 어렵고 위험한 것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좇았던 제자들은 성공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있었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관리 시스템을 갖추신 예수님
그러면 자기 안에 찾아오는 이 위기를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관리하셨을까요? 4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사역의 성공과 사람들의 환호에서 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눈에 보이지 않게 자기 관리 시스템을 갖고 계셨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마가복음 1장 35절 말씀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입니다.
예수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들이 잠든 밤에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새벽을 깨우는 사람은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떠나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고독의 자리를 만드시고 침묵하시기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침묵 터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공적으로 기적을 베푸실 때 사람들의 인기와 환호와 박수갈채에서 오는 위기를 침묵 터치로 이기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잠든 새벽에 일어나 자기 안에 칭찬받고 싶어 하는 유혹을 물리치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 앞에서 홀로 터치, 고독 터치, 침묵 터치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3년을 이끌 수 있었던 엄청난 비밀이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5절에서 44절까지 말씀에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남자만 5천 명이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최소한 1만 5천 명 이상 되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저녁 늦게까지 예수님을 좇다가 굶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의 배고픔을 아시고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들판 어디에 가서 먹을 것을 구하며 엄청난 양의 음식을 살 돈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제자 안드레가 어린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축사하신 후 나눠주셔서 남자만 5천명을 먹이고 남은 것으로 열두 광주리를 채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을 때 제자들과 군중들은 얼마나 흥분했겠습니까? 그들은 ‘역시 예수님이 최고다! 우리의 왕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함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일종의 사회적 패닉 현상이 발생하려 하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본문 45절과 4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의 현장도 끝나고, 사람들의 환호성도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여유를 두지 않으신 것입니다. 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아마 군중들보다 제자들이 더 흥분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대한 대로 만약 예수님께서 왕이 된다면 서로 우의정, 좌의정을 차지하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회 집단적 환호에 침묵하신 예수님
그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먼저 건너편 벳새다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후에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십니다. 무리들을 흩어지게 만드신 것입니다. 즉 자기 손으로 성공을 흩으시고 스스로 박수갈채를 막으시며 환호성을 흩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모두 돌려보내신 후에 홀로 남으셨습니다. 47, 48절 말씀입니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인해 흥분한 제자들과 충격을 받은 군중들을 모두 흩으시고 홀로 남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단독으로 침묵 속에 고독을 택하십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홀로 설 때입니다. 혼자서 어떠한 결정을 내리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처음에 여론도 참고할 수 있고 주위의 친한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단독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선택한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침묵 터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침묵 터치를 이루셨기 때문에 기적의 능력을 행사하신 후에 오는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극복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항상 제 자리로 돌아와 어떤 시험이나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령 터치가 사역의 비결이요, 말씀 터치가 사탄의 세력을 꺾는 비결이요, 침묵 터치가 성공에 따른 유혹이나 시험을 물리친 비결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보호받고 싶어 합니다. 아무리 권력이 있고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누군가 자신을 인정해 주길 바라고 보호해 주길 바라며 사랑해 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고독하고 외로우며 투쟁하는 삶의 연속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자꾸 주위로부터 동의를 구하려 합니다. 사람에게 보호받고 인정받으며 사랑받으려는 본능이 지배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사람 앞에 서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오랜 침묵과 기다림 속에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기회를 가져라
현대인의 특징은 항상 바쁘고 분주하며 피상적이고 결과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지하철을 타고 끊임없이 어디론가 갑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왜 자신이 일을 하고 결혼을 했으며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력을 잃고 살게 됩니다. 눈에 보기 좋은 것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사버립니다.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며 쾌락으로 시간을 흘러 보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껍데기 인생이 되어갑니다. 48절 말씀을 한 번 더 읽습니다.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예수님께서 저녁 식사 시간쯤에 시작해 밤 사경까지 기도하셨습니다. 밤 사경이라 하면,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를 말하며 가장 잠이 많이 오는 시각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의 광경을 보시다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벽을 맞도록 기도하시던 중에 아마 춥고 배고팠으며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홀로 있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단독으로 서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은 후 첫 시련으로 폐결핵에 걸려 1년 동안 휴학한 적이 있습니다. 연수원 독방에 격리 수용돼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성경과 파스칼의 ‘팡세’를 밑줄 그어 가면서 정독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영적 생활에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하나님을 독점했습니다.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신 예수님
누가복음 22장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예수님께서 자주 감람산을 찾았기 때문에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틈만 나면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또 한 번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독이요, 침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