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하나님?--노아와 그의 믿음'(2)
1.
지난 주간에 우리 교회 교우에게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물건을 주문할 때 PayPal이라는 계좌를 사용하지요. 며칠 전에 PayPal 본부에서 메일이 왔습니다. "당신의 계좌에 수상한 활동이 감지되었으니 패스워드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 즉시로 패스워드를 바꾸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그분의 계좌에서 누군가가 5천 달러를 인출해 갔습니다. PayPal의 로고를 정교하게 복사하여 보낸 메일에 속은 것입니다. 위험을 막으려고 한 일이 오히려 위험을 자초한 것입니다.
저는 어이가 없어서 그 이야기를 전해 주신 분에게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이 세상이 어쩌다가 이렇게 악하게 되었을까요? 이 악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중에는 세상을 밝게 보는 낙관론자들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는 비관론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며 그 악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할 것입니다.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악은 더 심해집니다. 의학이 발전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질병이 늘어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인간의 심성은 점점 악해지는 것 같고, 미국같은 개화된 나라에서도 사회적인 악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국제적인 분쟁에서 드러나는 악은 때로 몸서리칠 정도로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자연재해도 점점 심해집니다.
무신론자들은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이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세례 준비를 하는 분들을 면담하는 중에 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세례 받기 전에 꼭 풀고 싶은 궁금증이 있습니까?" 그러면 둘 중 한 분꼴로 이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세상에 널려 있는 고난과 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질문이 나올 때마다 저는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저의 능력을 다 동원하여 이해 가능하도록 설명합니다. 하지만 "아, 그랬군요. 이제 다 해결되었습니다"라고 응답한 분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의 표현력이 그만큼 탁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토록 탁월한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이해력과 표현력이 악의 현실을 다 파악하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5장은 악의 기원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하루가 끝날 때마다 하나님은 "좋다"고 하셨고, 인간을 창조한 마지막 날에는 "참 좋다"고 하셨습니다. "좋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토브'(tov)는 '제 위치에 있어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훌륭한 교향악단처럼 모두가 제 위치를 지키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 내고 서로 어울려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이 에덴이었습니다. 태초에 에덴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른 생명과는 다른 지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인간의 얼굴 모양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에게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인간에게 자유의지(free will)를 주셨습니다. 인간이 DNA에 주어진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 자유 의지를 오용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가졌던 원초적인 관계를 잃어버렸고, 온갖 분열과 갈등과 소외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에덴을 잃은 것입니다. 죄로 인해 인간성도 망가졌고 세상도 제 기능을 잃었습니다.
지난 주에 보여드린 영화 <노아>의 '창조 장면'(creation scene)을 보여 드렸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5장까지를 요약한 장면입니다. 오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의 과정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에서 작가와 감독은 악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자유 의지를 허락하실 때 이미 악의 출현을 예상했어야 했기에 궁극적으로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영화 속의 노아처럼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라고. 세상을 망가뜨린 것은 우리라고. 우리가 그렇게 했다고. 우리, 우리, 우리라고.
2.
영화 <노아>에서 작가와 감독은 가인의 십대손인 두발가인을 악의 화신으로 등장시킵니다. 두발가인은 에덴의 동쪽에 세워진 '가인의 성'의 통치자로 등장합니다. 그는 거침없는 폭력을 사용하여 온 세상의 왕으로 군림합니다.
노아의 소문을 들은 그는 방주를 찾아갑니다. 가는 길에서 노아의 둘째 아들 햄을 만나지요. 햄은 두발가인을 안내하여 노아에게 데려 옵니다. 이 만남에서 노아와 나누는 두발가인의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두발가인은 하나님이 이 세상 일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말합니다. 침묵하는 창조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고아와 같으며, 눈꺼풀에 땀이 흐르도록 고생해야 살아남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낙오당하고 도태당하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믿을 것은 오직 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두발가인의 믿음이었습니다.
홍수가 시작되자 두발가인은 방주를 점령하려 합니다. 하지만 노아를 돕는 수호자들(the Watchers) 즉 돌무더기에 갇힌 천사들의 방해로 인해 좌절되지요. 수호자에게 심하게 부상 당한 두발가인은 방주의 측면을 타고 올라가 벽에 구멍을 뚫습니다. 방주 안에 있던 햄이 그것을 보았고 방주 안으로 들어오도록 그를 돕습니다. 이것도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 즈음에 햄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마음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햄은 홍수가 나기 전에 아버지에게 자신에게도 신부감을 구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성경에서는 세 아들이 모두 결혼하여 방주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나오지요. 노아는 햄의 청을 거절합니다. 그는 홍수로부터 동물을 지켜 낸 후 자기 가족도 다 죽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화가 난 햄은 신부감을 데려 오기 위해 '가인의 땅'으로 진입합니다. 그는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어느 소녀를 만납니다. 그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햄은 소녀를 데리고 방주 방향으로 뛰어갑니다. 하지만 숲 속에서 소녀는 덫에 발목을 잡힙니다. 햄은 있는 힘을 다해 덫을 벗겨 보려 지만 힘이 딸립니다.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는데, 노아가 찾아 옵니다. 소녀는 살려달라고 부르짖고 햄도 소녀를 도와주기를 청했지만, 노아는 햄만 데리고 방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햄은 두발가인을 돕습니다. 두발가인은 햄을 구슬러가면서 자기 편으로 만들려 합니다. 방주 안에서 두발가인이 햄에게 하는 말을 주목해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두발가인은 인간의 위대성을 온 세상을 점령하고 지배하는 능력에서 찾습니다. 인간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 의지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발가인이 뜯어먹던 고기 한 점을 햄에게 내어 주면서 한 말이 기억에서 울립니다. "이건 너의 세상이야. 붙잡아." 그로부터 얼마 후, 두발가인은 햄에게 아버지 노아를 유인해 오라고 사주합니다. 햄이 주저하는 눈치를 보이자 두발가인이 설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4.
피조물이 창조자를 떠나면 두발가인의 말과 같이 '고아'처럼 되어 버립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누가 자신을 지었는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도 없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생명을 오래 보존하고, 살아 있는 동안에 욕구를 최대한 만족시키는 것이 전부입니다. 저주 받은 줄은 알지만 그 상태로부터 벗어날 길을 알지 못하고 벗어나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창조자를 잃고 고아로 사는 사람은 자기 보호 본능의 욕구에 사로잡힙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 필요하다면 살인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보여 드리지는 않았지만, 노아와 두발가인이 마지막 결투를 벌이는 중에 노아가 위기에 처하자 햄이 달려 들어 두발가인을 가슴에 칼을 꽂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볼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 때 두발가인은 죽어가면서 햄에게 말합니다. "이젠 네가 사람이로구나!"
두발가인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악한 사람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악의 현실을 선명하게 드러내려는 작가와 감독의 의도가 여기에 있습니다. 잘못된 선택이 인간을 얼마나 악하게 만들며, 악해진 인간들이 세상을 얼마나 심하게 훼손시키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원죄에 물든 우리 인간 안에는 누구에게나 두발가인이 숨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진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악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을 탓합니다. 선악과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따져 묻습니다. "하나님은 왜 애당초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지 몰랐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 아니잖습니까? 만일 선악과를 따먹을 줄 알면서도 그랬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가지고 장난친 것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저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유 의지를 반납할 의사가 있습니까?" 물론, 영적으로 깊은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매일 "제 자유 의지를 반납합니다. 오늘도 저를 온전히 다스리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질문 앞에서 뒷걸음질 칩니다. 자기의 자유 의지는 반납하기를 싫어하면서 다른 사람의 자유 의지는 박탈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썩은 사과 상자를 비유로 들었지요. 상자 안에 담아 놓은 사과가 온통 썩어 버렸으면 상자 전체를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 것처럼, 노아 시대의 타락상이 그 정도로 심했다고 비유했습니다. 그 비유를 듣고 어떤 교우께서 물으십니다. "다 썩기 전에 미리 손을 쓰면 되지 않습니까?"
문제는 사과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만일 사과에게 자유 의지가 있어서 끝내 사과 상자 안에서 서로 엉켜 살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도 억지로 뜯어 놓아야 한다고 대답하시겠지요? 하지만 그 사과가 여러분 자신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잘못된 선택을 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여러분의 손을 잡아채고, 잘못된 길을 향할 때마다 길을 막아서고, 더러운 말이 입에서 나오려 할 때마다 혀가 꼬이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려 할 때마다 눈꺼풀이 내려 앉는다면, "오,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것 같습니까? "하나님, 왜 이러세요. 제발 저 좀 그냥 내버려 두세요. 때가 되면 돌아갈게요. 그 때까지는 제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 두세요"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5.
결국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원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도록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 두십시오. 그렇게 살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만 도와주십시오. 어려움이 지나고 나면 다시 내버려 두십시오. 하고 싶은대로 하며 살고 싶은대로 살도록 보호만 해 주십시오. 하지만 무엇을 하든 참견하지는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심판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하나님은 딱 이만큼만 해 주는 하나님입니다. 그 이상 간섭하려는 하나님은 사절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압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고 운행할만한 존재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진정한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읽은 로마서의 서두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사도에 의하면,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을 알게 되어 있는데, 자신의 부패한 마음을 따라 살고 싶어서 모르는 척, 못 본 척 합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며 살아야 할 인간은 짐승의 차원으로 전락했고 세상은 야수의 정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점에 대해 인간은 "핑계를 댈 수가 없다"고, 사도는 잘라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내버려 두셨다"는 표현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24절)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26절)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타락한 마음 자리에 내버려 두셔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도록 놓아 두셨습니다. (28절)
자유 의지를 주신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완전히 손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영화 <노아>가 잘 못 그리고 있는 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영화를 보면 창조자에 대해 말하고는 있지만 창조자의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해 놓고 저 멀리 퇴각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신론자 감독의 한계일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 체험도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일 뿐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기도 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지금 우리 중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다만, 인간의 자유 의지를 손상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비유하자면, 부드러운 손길로 혹은 미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사람을 강압적인 힘으로 돌아서게 만들지 않습니다. 스스로 깨닫고 돌아서기를 호소하시고, 알게 모르게 돌보시고 인도하시며, 돌아설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내 자기 욕망대로 살려는 사람을 내버려 두십니다. 자유 의지를 손상시키지 않으려면 쾌락의 끝 자락 혹은 죄악의 바닦에까지 내려 가서 깨닫고 돌아서는 방법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이 어떤 것인지 저는 몇몇 교우들이 겪는 아픔을 옆에서 지켜 보면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자녀가 심리적인 문제로 인해 부모에게 저항하며 방황할 때, 전문가들이 최후에 권하는 방책이 있습니다. 바닥을 치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홈리스가 되거나 변사를 당할 각오를 하고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자식을 다시 회복시킬 희미한 가능성이 그것 밖에는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뼈아픈 결정을 해야 하는 교우들을 몇 분 뵈었습니다. 그분들을 뵈면서 "아, 우리를 욕심에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저런 것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버려 두는 것은 완전한 포기가 아니라 눈물을 머금고 이를 악물고 행하는 최후의 사랑의 모험입니다.
6.
그러므로 악과 관계하여 우리는 세 가지 진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악한 세상에 살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진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 종류의 악들을 그대로 방치하면 더 심해지고 흉해지고 강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인간 본성의 성향이고 죄악의 속성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기에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의 수명을 다 채우기를 원한다면 고난이라는 값을 치룰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싫어서 일찍 죽으면, 나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고난을 줍니다. 이렇든 저렇든, 고난은 필수입니다.
둘째, 악이 전부가 아니라는 진실을 기억하십시오.
인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하나님의 정원에 악이 번성하게 되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죄를 범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깨어진 세상을 돌보고 계시며 죄악의 유혹 앞에 무력한 인간을 도우십니다. 애당초 하나님은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고, 마침내 깨어진 창조를 완전하게 회복하실 것입니다. 지금 당장 아무리 악이 강해 보이고 전부처럼 보여도 결국은 소멸될 것입니다.
셋째, 악을 해결할 길이 있다는 진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까지 이를 악물고 악을 참아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악의 '배후'인 사탄의 진영을 허물어 뜨리셨고 인간의 죄성이 치유되는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거룩한 동행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사탄의 유혹과 속임수에서 벗어나고 성령의 능력으로 죄성을 치유 받습니다. 그러면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군림하여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던 '내 안의 두발가인'은 길들여질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성령과 함께 동거하는 사람은 인생길에서 만나는 악을 선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 능력을 얻습니다.
악에 대한 믿음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이웃에게 복음 전하기를 힘씁니다. 악이 전부요 고난이 마지막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두발가인의 말대로 자신을 '저주받은 고아'처럼 생각합니다. 자기가 아니면 자신을 지켜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오직 자기만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 생각과 그 태도는 오직 복음만으로 고쳐질 수 있습니다. 악이 전부가 아니라는 복음, 고난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복음, 악과 고난보다 더 영원한 것이 있다는 복음,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안의 악을 해결할 수 있고, 또한 이 세상의 악을 해결할 수 있다는 복음만이 그것을 고칩니다.
과거에 자주 고백하던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적 선언'의 마지막 항목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악의 최후 승리를 믿지 않습니다. 의의 최후 승리를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이며, 그 승리를 이미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 안에서 내 안에 있는 죄악을 치유하며 또한 세상의 죄악을 치유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지속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고난의 왕이신 주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악의 본영을 깨뜨리신 주님,
악이 저희를 흔들고
고난이 저희를 엄습할 때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며,
주님으로 인해
의의 최후 승리를 믿고
또한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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