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오직의 복음" (에베소서 2:1-10)

새벽지기1 2017. 4. 25. 08:31


1.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Reformation Sunday)입니다. 말하자면, 개신교회 즉 Protestant Church의 생일인 셈입니다. 세계 기독교는 크게 세 종류 즉 로마 가톨릭 교회,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회로 나뉩니다. 개신교회는 성공회, 감리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순복음교회, 성결교회 등의 여러 교파로 구성되어 있고, 각자의 전통과 특성에 따라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종교 개혁의 시발점을 1517년 10월 31일로 잡습니다. 그러니 3년 후 즉 2017년이 되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됩니다. 그 해가 되면 종교 개혁을 기념하는 여러 가지 행사들이 열릴 것입니다.

1517년 10월 31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가톨릭 수사(Catholic monk)였고 신학교수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All Saints Day를 기념하는 예배를 위해 모여든 교인들이 읽도록 베텐베르그(Wittenberg) 성당 정문에 '아흔 다섯 개의 주장'(95 Theses)을 써 붙입니다. 그 주장에서 그는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 판매하고 있던 '면죄부'(indulgences, 죄를 면제해 준다는 교황의 증서)와 교황 제도를 비판합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가톨릭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 자주 언급하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지금의 가톨릭을 향한 비판이 아니므로 가톨릭 형제 자매들의 이해를 구합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말할 수 없이 부패해 있었습니다. 6세기 경부터 로마 제국이 서서히 와해되고 정치 권력이 로마 황제에게서 각 지역의 군주들로 분산되면서 교황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강해졌습니다. 성직자들이 권력이나 금력을 가지면 필연코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루터 시대에 교황은 그 어떤 세속 군주도 넘볼 수 없을만한 거대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권력과 금력에 맛들인 사제들은 평신도들의 눈을 가려 놓고 성경에도 없는 교리와 관행을 끊임없이 만들어냈습니다.
 

면죄부는 당시 가톨릭 교회의 타락상에 대한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루터 시대에 로마 교황청은 세계 최대 규모의 성 베드로 성당(St. Peter Basilica)을 보수하는 프로젝트를 세웠습니다. 공사 규모가 워낙 방대하다 보니 헌금만으로는 공사비를 충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면죄부를 대량으로 찍어냈습니다. 교황이 발행한 이 증서를 구입하면 그 액수만큼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 면죄부를 사면 연옥에 있던 사람이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도 가르쳤습니다. 앞장 서서 이 캠페인을 주도했던 요한 테젤(Johann Tetzel) 신부는 "동전이 헌금함에 딸랑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 있는 영혼은 천국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갑니다!"(Once the coin into the coffer clings, a soul from purgatory heavenward springs!)라고 설교하고 다녔습니다.
 

2.
 

마틴 루터는 원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률가가 되려 했습니다. 그는 매우 명석하고 부지런하여 법학사와 법학석사 학위를 대학이 허락하는 최단 기간에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습니다. 유능하고 훌륭한 법조인이 될 뻔 했던 루터는 21세가 되던 어느 날 생의 진로를 바꿉니다. 심한 폭풍이 불던 날, 비바람을 뚫고 길을 가는데 번개가 그의 발 옆에 떨어집니다. 루터는 두려움에 질려 땅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성 안나여, 저를 도우소서! 살려주시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Help me, St. Anne! I will become a monk)
 

위기 앞에서 이렇게 기도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와 비슷한 기도를 드려 본 적이 있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사업에 위기가 왔을 때, "이번 위기만 지나게 해 주시면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심각한 질병에 걸렸을 때, "이 병을 치료해 주십시오. 이번에 살려 주시면 주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혹은 자녀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십시오. 제 모든 죄를 끊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는 즉흥적으로 나온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마음의 빚에서 나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더 많이 헌신하고 더 많이 드려야 옳다는 것을 알지만, 모르는 척 혹은 안 들은 척 외면하고 자기 욕심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위기를 만나면 자신이 외면하고 무시했던 하나님의 부름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므로 다급하여 나온 기도이기는 하지만, 진심이 담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법률가의 길을 가면서도 성직으로 부르시는 하난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아버지의 기대 때문이었는지 혹은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는지, 루터는 그 음성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생의 위기를 만나게 되었고, 그것을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입니다. 그 순간, 모든 욕망과 염려를 내려 놓고 하나님의 부름을 따르기로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킵니다.

 

위기 앞에서 이렇게 약속해 놓고는 위기가 지나가면 금새 약속을 잊는 것이 보통인데 루터는 그 약속을 그대로 지킵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함으로써 루터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순종이 인류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급할 때 했던 약속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한 것임을 기억하고 그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잠시 우리 자신을 돌아 보십시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행하지 않은 약속이 있습니까? 제대로 살겠다고, 모든 죄를 청산하겠다고, 주님을 온전히 섬기겠다고, 거룩하게 살겠다고,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겠다고, 더 많이 사랑하겠다고, 혹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겸손히 섬기겠다고 약속하고서, 위기가 지나가자 까맣게 잊고 혹은 잊은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고 과거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마틴 루터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그 기억을 되살리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 약속을 이행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 한 약속은 큰 것입니다. 그 약속을 이행했을 때, 우리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놀라운 열매가 맺힙니다.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간 루터는 명석한 두뇌와 부지런한 성품으로 인해 빠른 시간 안에 수도사로서 명성을 날립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대로 기도에 깊이 몰두했고 자주 금식했으며 여러 가지의 고행을 실천했습니다. 때로는 침구도 없이 뼈를 에는 추위 속에서 잠을 자지 않고 견디기도 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회고하며 말합니다. "만일 수도사의 행위로 천국을 얻을 사람이 있다면, 내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If anyone could have earned heaven by the life of a monk, it was I).
 

루터는 신학 박사가 되고 또한 비텐베르그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치고 행하는 것들 중 많은 것들이 성경에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모른 척 하기에는 너무도 많았고 또 너무도 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양심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서 조작한 교리에 대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며칠 밤을 새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합니다. 그 글에서 그는 교황 제도와 연옥의 교리 그리고 면죄부 판매가 왜 문제인지를 조목조목 따졌습니다.


3.


사실, 종교개혁의 시발점을 1517년 10월 31일로 잡은 것은 상당히 인위적인(arbitrary)인 일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개혁하려는 사람들은 그 이전에도 있었고, 독일뿐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있었습니다. 다만, 1517년의 사건이 가장 강력했기에 그 날을 시발점으로 잡은 것입니다. 마치, 강둑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생겨 이곳 저곳에서 물이 새고 있는 상황에서 둑 한 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루터와 개혁자들의 주장은 다섯 개의 '오직'이라는 문구로 요약됩니다. 이것을 'Five Solae'라고 부르는데, 라틴어의 sola는 '오직'(only) 혹은 '으로만'(alone)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교리와 전통을 내려놓고 오직 다섯 가지의 기둥만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Sola Scriptura 즉 '오직 성경으로'(By Scripture Alone)입니다. 성경만을 믿음과 실천의 유일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방대한 교리와 복잡한 전통을 성경의 권위에 맞먹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성경을 풀고 맬 권한이 교황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에 교황 혹은 주교 회의에서 어떤 결정을 하면 성경과 같은 권위를 인정 받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전통들이 생겨났고, 그것들을 다시 성경 말씀으로 정당화시켜려 하다 보니 성경을 왜곡하게 되었습니다.
 

뉴스를 읽는 분들은 지난 주 가톨릭 교회 주교 회의에서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논의하다가 부결되었다는 소식을 읽었을 것입니다. 교리 문제에 대해 개신교보다 훨씬 보수적인 가톨릭 교회이기에 먼 훗날에나 그런 논의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진보적인 경향의 프랜시스 교황의 영향력으로 인해 훨씬 일찍 논의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만일 주교회의에서 "동성애는 죄가 아니다"라고 결정하면 성경에서 뭐라 말하든 죄가 아닌 것으로 인정됩니다. 그것이 가톨릭의 방식입니다.
 

루터와 개혁자들은 이러한 방식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정직하게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교리와 전통이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대부분의 사제들은 그냥 묵인하고 받아들였지만, 양심이 깨어있던 개혁자들은 묵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 오백 년 동안 쌓아 온 거대한 교리와 전통의 성을 허물고 오직 성경 말씀으로만 살아가자고 부르짖었습니다.

 

둘째, Sola Fide 즉 '오직 믿음으로'(By Faith Alone)의 원리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믿음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선행과 고행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루터와 개혁자들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참된 믿음은 선행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로마에 있는 라테란 성당 근처에 가면 Scala Sancta라는 26 층의 돌계단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대리석으로 된 이 돌계단은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실 때 예수님이 걸으셨던 계단의 돌을 옮겨다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계단에는 특별한 영적 능력이 서려 있다는 미신이 생겼습니다. 그 미신이 나중에 교리가 됩니다. 이 대리석 계단을 무릎으로 걸어서 올라가면서 회개를 하면 몇 년 동안 지은 죄를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미신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서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역시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랐던 적이 있습니다. 중간 즈음에 이르렀을 때, 마치 하늘에서 자신의 머리로 내리 꽂히는 것 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The just shall live by faith). 로마서 1장 17절 말씀입니다. 루터는 오래 전부터 이 구절에 사로잡혀 고뇌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도 두 번이나 이 말씀을 귀로 듣는 듯이 들었습니다. Scala Sancta에서 그는 세 번째로 과거보다 더 또렷이 그 음성을 듣습니다. 루터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 내려옵니다. 그 계단을 돌아 내려오는 루터의 마음에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찼습니다.
 

4.


셋째, Sola Christus 즉 '오직 그리스도로'(By Christ Alone)의 원리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활짝 열렸습니다. 그 길은 다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다른 무엇도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제가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서서 중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히 4:14-16)
 

16절에서 저자는 "담대하게"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기 전에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중재자 없이는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은혜를 힘 입어 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습관이 그들을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담대하게" 나아가라고 격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굳게 믿으라는 뜻입니다.
 

넷째, Sola Gratia 즉 '오직 은혜로'(By Grace Alone)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받는 쪽의 공로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받는 것이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값없이, 조건없이 주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저는 종교개혁주일에 맞추어 렉셔너리를 벗어나 에베소서 2장 1-10절을 읽었습니다. 이 짧은 구절 안에 복음의 내용을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먼저, 사도는 1절부터 3절까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의 우리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과거에 우리는 허물과 죄 가운데 빠져서 이미 죽은 상태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인생의 종착역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것을 3절은 '진노의 자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4절 이하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4-6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이 열리는 과정에서 인간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자비가 넘치고 사랑이 크신" 하나님이 죄 가운데 죽어 있던 우리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그분을 통해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사도는 마지막에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믿는 사람의 육신은 이 땅에 머물러 있지만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 살고 있고, 목숨으로 살지만 영생을 이미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듯 그 은혜를 얻기 위해 무슨 공로를 쌓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째, Soli Deo Gloria, 즉 '오직 하나님께 영광'(To God Alone Be the Glory)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며 따라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중간에서 가로챌 수 없습니다. 루터와 개혁자들의 눈에는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교황이 가로채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제들의 권력에 짓눌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더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루터와 개혁자들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고개 숙이고 오직 하나님만 높여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5.
 

오늘 읽은 에베소서 말씀의 마지막 세 절은 마음에 새겨 두고 깊이 묵상할만한 말씀입니다. 여기에 루터와 개혁자들이 생명을 걸고 싸웠던 복음의 진수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8-10절)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오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리고 감사와 감격으로 그 선물을 받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우리가 더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해 자랑할 것도 하나 없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입니다.
 

은혜로써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들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에게는 그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사양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어떻게 나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느냐고 따지는 것도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이 마련해 두신 구원의 선물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면, 그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죄를 탐하고 사탄의 유혹에 끌려 어둠의 일을 추구하며 죽음에 이르렀던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는 변화시킵니다. 그 변화는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필경 그런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면 우리는 선한 일을 소망하고 도모하는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선행을 쌓음으로써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음으로써 선행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두 가지의 복음의 왜곡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 편에는 우리가 선행과 고행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왜곡이 있습니다. 루터 시대에 가톨릭 교회가 이러한 왜곡을 하고 있었기에 종교 개혁 운동이 산불처럼 유럽 대륙에서 번져갔습니다. 다른 한 편에는 믿기만 하면 다 된다는 복음의 왜곡이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진 '구원파'가 복음을 그렇게 왜곡합니다.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것이며 한 번 얻은 구원은 상실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을 잃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전해 받은 복음은 두 극단을 모두 배격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실 때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이 변화되어 선하게 살아가는 것도 계획 속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10절에 그 진실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구원은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져내고 영생의 약속을 얻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어 이 땅에서 선하게 살아가도록 변화시키는 것까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이것이 루터와 개혁자들이 생명을 걸고 지키려 했던 복음입니다. "오직"(Only ... Alone)이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외치며 복음의 순수함을 지키려고 인생을 걸었습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루터와 많은 종교개혁자들의 후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0월 마지막 주일에 지키는 종교개혁주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는 우리가 받은 복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합니다. 혹시나 여러분이 믿는 복음은 왜곡되지 않았는지요? 혼합되지 않았는지요? 이것 저것 덧붙여지지는 않았는지요? 과연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만을 붙드는 복음인지요?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는 복음인지요?

 

이 시간, 진정한 복음, 단순한 복음, 순수한 복음, 온전한 복음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과 심판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 복음,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옮겨 줄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맛보게 해 주는 복음, 우리를 변화시켜 선한 일을 행하며 살 수 있게 하는 복음, 그 복음을 품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아직도 그리스도 예수를 알지 못해 허물과 죄 안에서 죽음의 삶을 살고 있는 이웃에게 이 복음을 전하십시다. 복음이 나에게 진정한 구원의 길이라면 내 이웃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길을 나만 알고 모른체 하는 것은 책망받을 일입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을 모른체 하고 지나가는 일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전도부에서 내건 표어처럼 내가 복음을 알아 행복을 알았다면, 그 행복을 나누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마땅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죄와 악이 편만한 이 세상에 선과 의가 자리잡게 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오직의 복음'을 참되게 살고 또한 그 복음을 전하는 진정한 개신교인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 주님,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은혜로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존재와 삶으로써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