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그곳에 가고 싶다" (창세기 3:23-24)

새벽지기1 2017. 5. 4. 13:12


'잔인한 하나님?--노아와 그의 믿음'(1)

 

1.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오늘부터 대런 아로노브스키(Darren Aronofsky) 감독의 영화 <노아>를 소재로 하여 여섯 주간 동안 말씀을 나눌 것입니다. 이 영화는 2014년 3월 28일에 미국에서 개봉되었는데, 감독과 주연급 배우들의 명성에 비해 흥행 성적은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기독교계로부터 비판과 외면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가 기독교인들로부터 외면을 당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화의 스토리 라인이 창세기의 기록과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 이야기를 재현했다기보다는 그것에서 착상을 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할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쓴 아리 헨델(Ari Handel)은 유대교인인데,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유대교 문헌을 뒤졌다고 합니다. 유대교 랍비들은 성경의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확대시키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자료들을 가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킨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작품도 아닌데 왜 그것을 가지고 설교를 하려고 하느냐?"라고 물으실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도 그렇고 영화도 그런데요, 기독교적인 색채가 너무 강하면 이야기할 여지가 남지 않습니다. 메시지가 너무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너무 쉽게 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질문에 대해서든, 자기 스스로 고민하여 대답을 찾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과 씨름하게 하는 것이 좋은 작품의 조건입니다. 영화 <노아>는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좋은 작품의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여섯 번의 연속 설교를 통해 이 영화를 다루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작가와 감독은 자신들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합니다. 한 번 보아서는 그 질문들을 모두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 번 영화를 보았고, 시나리오도 구해 읽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작가와 감독이 독자에게 던지려는 질문들이 보였습니다.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가?
 의롭게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그 뜻을 찾는가?
 정의란 무엇인가?
 악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저는 앞으로 이 질문들을 하나씩 붙들고 성경 말씀에 비추어 여러분과 함께 고민해 보려 합니다.

 

2.


영화가 시작되면,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가인의 살인, 셋의 탄생 그리고 노아로 이어지는 사건들이 신속하게 그려집니다. 영화는,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이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났지만 그곳에서 거대한 도시를 세우고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창세기 4장의 기록을 확대시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문명과 함께 죄악도 퍼뜨렸습니다. 영화는 가인의 칠대손인 두발가인을 악의 화신으로 등장시킵니다. 창세기 4장 22절에 보면, 두발가인이 "구리나 쇠를 가지고, 온갖 기구를 만드는 사람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죄악의 화신인 두발가인의 반대편에는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6:9)이었던 노아가 등장합니다. 그는 셋의 십대손입니다. 영화의 시작은 두발가인에게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살해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여러 가지 암시를 던집니다. 가인의 후손은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여 문명을 발전시키고 그 문명의 힘으로 스스로 하나님을 자처하며 죄악에 빠져 살고 있었습니다. 반면, 희생당한 아벨의 뒤를 이어 태어난 셋의 후손은 하나님과 동행하지만 겨우 명맥만을 유지합니다. 영화에 의하면, 하마터면 노아에게서 대가 끊길 뻔 했습니다. 가인의 후손이 셋의 후손의 씨를 말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상징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라고 하는 역사의 진실을 암시합니다. 죄악을 일삼는 사람들이 언제나 번영하는 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자주 악한 자들에 의해서 밀려나고 억압받고 쫓겨 다니고 때로는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거룩하고 선하게 살려는 노력이 가망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소수의 거룩한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것이 성경의 메시지요 또한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감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과 질적으로 다른 배경을 설정합니다. '수호자들'(the Watchers)의 등장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멀고 먼 옛날로 옮겨 놓습니다. 수호자들은 인간을 도우러 왔다가 하나님께 반역하여 돌무더기 안에 갇힌 천사들입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뒤로 가면, 노아의 할아버지인 므두셀라가 등장하는데, 그도 역시 배경의 신화적 분위기를 진하게 만들어 줍니다. 므두셀라는 육신을 가진 인간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969년을 살다가 홍수가 나던 해에 세상을 떠납니다. 영화에서 그는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중간쯤에 사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는 창조의 신비를 마음에 품고 있으며, 여러 가지의 신통술을 부립니다.


이렇듯, 감독은 여러 가지의 인물 설정과 장치를 통해 노아의 홍수가 역사 이전 시대, 즉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시대 환경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전해 줍니다. 창세기가 모두 50장인데,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오는 12장부터는 역사의 흐름 안에서 시대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 즉 1장부터 11장에 기록된 사건들-- 창조, 타락,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노아의 홍수, 그리고 바벨탑에 이르는 사건들--은 역사 이전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시대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 노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노아 이야기 직전에 아주 이상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창 6:2)
그 무렵에, 그 후에도 얼마 동안,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거인족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6:4)

이것은 성경학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본문 중 하나입니다.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를 말하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제안이 있지만, 학자들은 아직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이 본문에 관한 한, 그냥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고 또한 정직한 대답입니다. 다만, 이 본문이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기 기록된 사건들은 당신들이 사는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 일어난 일임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그것이 아로노브스키 의 <노아>와 다른 노아 영화와의 차이점입니다.

 

3.


이 영화에서 주목할만한 또 한 장면이 있습니다. 홍수가 시작된 후, 노아의 일가족이 안전하게 방주 안으로 대피합니다. 바깥에서는 폭우 소리와 파도 소리 그리고 물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집니다.

그 와중에 노아는 온 가족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맨 처음 들려준 이야기, 그리고 노아가 자녀들에게 가장 먼저 들려준 그 이야기, 즉 창조 이야기입니다. 노아가 창조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에 우주가 형성되고 생명이 창조되는 과정이 빠른 속도로 그려집니다.

 

물론, 이것이 천지 창조 과정에 대해 정확하게 그려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있어 창조 과정을 정확히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본 사람도 없고, 보았다고 해도 이해할 수도 없고, 따라서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이런 저런 상상을 할 뿐입니다. 이 영상은 그동안 창조 과정을 상상하여 표현한 것 중에서 꽤 잘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을 보고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창조'(creation)와 '진화'(evolution)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 시작되어 미국 교회뿐 아니라 한국 교회에까지 널리 퍼진 '창조 과학'(Creation Science)의 영향 때문에 '진화론은 곧 무신론'이라는 등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 분들은 이 영상을 보고 기분이 상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위 '창조론'(Creationism)이라 불리는 믿음은 창조 과학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하여 만든 하나의 이론입니다. 성경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의 해석이고 이론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화 과학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진화론을 거부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화론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진화의 과정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영상은 그런 점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독은 이 영상에서 아담과 하와를 빛으로 처리했습니다. 참 좋은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이 지금의 우리와 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창세기에 의하면 죄를 짓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불멸의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자유롭게 소통했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영을 가진 육적 존재'라면, 그들은 '육을 가진 영적 존재'였습니다. 육신이 지배하고 영이 흐려진 상태가 아니라, 영이 지배하고 육신은 그 영에 순종하는 상태였습니다. 그와 같은 질적인 차이가 태초의 인간과 원죄를 물려받은 우리 사이에 존재합니다.

 

4.


두 장면만 살펴 보았지만, 영화 <노아>는 배경 설정과 인물 설정 그리고 여러 가지의 장치를 통해서 우리의 원초적인 상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본래 어떤 존재로 지어졌고, 그 상태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실낙원'(Paradise Lost)의 존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창 3:23-24)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에덴 동산이 어디쯤에 있었는지를 연구합니다. 가망 없는 일입니다. 불필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잘 못 읽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창세기의 첫 열 한장에 기록된 사건들은 고고학적으로 탐사하고 연구하여 알아낼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에덴 동산의 위치를 찾아다니는 일이나 노아의 방주의 파편을 찾아다니는 일은 모두 성경을 잘 못 읽어서 생긴 일입니다.


'에덴'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원초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늘 동행하고 막힘없이 소통하며 영과 육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고 모든 생명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에덴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그 원초적인 상태를 잃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에덴의 입구를 불칼로 지키셨다는 말은 죄에 물든 인간은 낙원을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빙빙 도는 불칼'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죄로 인해서 인간이 겪게 된 분열과 갈등과 소외를 상징합니다. 죄로 인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사랑의 교제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영혼과 육신 사이에 간격이 벌어졌고, 마침내 육신이 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욕망이 인간을 지배하자 인간과 인간은 서로 등을 지게 되었고, 다른 생명들과의 조화와 평화도 깨어졌습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총체적인 분열과 갈등과 소외를 격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죄악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여 인류 최초의 범죄자가 되지요. 그의 범죄는 대를 이어 내려 오면서 점점 심해지고 증폭되고 또한 편만해졌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죄로 물들자 문명의 이기는 죄악의 도구가 변해 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노아 시대에 인류의 죄악은 홍수로 씻어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니, 세상이 썩었고,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땅을 보시니, 썩어 있었다. 살과 피를 지니고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 (창 6:11-12)

인간 세상이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속속들이 썩어 버렸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저자가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습니까? 상자 속에 담아 두었던 사과 중에 하나가 썩으면 삽시간에 다른 사과들까지 썩어 버립니다. 때가 늦어 버리면 사과 상자 전체를 쓰레기통에 버려야 합니다. 그것처럼, 노아 시대에 인류의 죄악이 전부를 쓸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해졌다는 뜻입니다.

 

5.


창세기의 첫 열 한 장을 제대로 읽는다면, 두 가지 사실에 충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잃어버린 낙원이 있다는 사실이 그 하나이며, 지금의 우리의 상태가 원래의 상태로부터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다른 하나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것이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은 원래 얼마나 빛나는 존재로 지어졌는지를 확인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동시에, 그토록 빛나는 존재로 지어진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신속하게 그리고 심하게 타락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낙원에 어떻게 그렇게 급속하게 지옥이 퍼지게 되었는지를 깨닫고 충격을 받습니다.


영화 <노아>는 이 점에서 도움이 됩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해 눈 뜨게 만들어 줍니다. 문자를 읽는 것보다 그림을 보는 것이 훨씬 더 강력한 법입니다. 영화 안에 설치된 여러 가지의 영상들은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낙원 그리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낙원은 영영 회복할 수 없는가?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악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지옥을 확장시키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가? 우리의 존재 안에서 깜빡거리는 빛을 다시 환하게 밝힐 방법은 없는가?"


기독교 복음은 이 질문에 대해 "있다!"고 대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잃어버린 낙원과 현실의 지옥 사이에서 "길은 없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라고 대답하십니다.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할 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처럼 회복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인간 회복'과 '새창조'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되었으며,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에덴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빙빙 도는 불칼"을 끌어 안고 죽으셨다 할 수 있습니다. 그로써 에덴의 문이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의 옛 사람은 물 속에서 죽임을 당하고 새로운 존재로 살아납니다. 거듭 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성령의 능력으로 죄악의 전염병을 치료 받고 거룩한 존재로 자라갑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꺼져가던 빛이 되살아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노아 시대처럼 오늘도 악한 사람들이 번성하고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합니다. 인간의 타락상은 때로 쓸어 버릴 방법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얼마 전, ISIS 테러 집단이 2백여 명의 이라크의 청년들을 엎드리게 해 놓고 총으로 난사하여 살해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슨 영상인가 싶어 클릭했다가 5초도 견디지 못하고 꺼 버렸습니다. 토할 것 같이 속이 뒤집혔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인간에 대한 환멸감을 느끼게 됩니다. 철두철미 악으로 물든 그들을 어떻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그럴 때면 우리는 도무지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경의 처음과 끝을 읽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첫 세 장 즉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에는 하나님의 황홀한 창조 이야기와 인간의 타락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이 원래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성경의 마지막 세 장 즉 요한계시록 20장부터 22장까지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고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이 회복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그 중간에 살고 있습니다.
중간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성경의 처음을 묵상하며 우리의 원래 모습을 기억하고 성경의 마지막을 묵상하며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이 온전하게 회복될 날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오늘 믿음과 소망 중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의 삶의 방식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우리가 원래 어떻게 지어진 존재인지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하신 낙원이 얼마나 황홀한 것이었는지를! 지금의 우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매일 뉴스에서 읽는 이야기가 전부가 아닙니다. 창조주를 망각한 이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려 합니다. 인간이 별 것 아니라고! 세상은 원래 이런 것이었다고! 인생, 별 것 없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선전에 속아 자신의 인생을 죄악의 진창 속에 내버려 두는지요!

창세기의 첫 세 장과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세 장을 기억하십시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어진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게 함부로 굴릴 인생이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살아갈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살다가 사라질 존재가 아닙니다.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 거룩하게 회복될 존재입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죄의 유혹이 아무리 강하고 죄의 맛이 아무리 달콤해도 그 어둠과 죽음의 늪에 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백조가 오리 새끼들과 함께 살다가 스스로 오리인 줄로 착각하고 땅만 파고 사는 것처럼, 우리도 본성을 망각하고 육신과 물질에만 파묻혀 살 수는 없습니다. 동물원에 갇힌 사자가 던져주는 고기맛에 야성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맛보는 죄의 달콤한 맛에 팔려 하나님 나라와 영혼을 망각하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매일 우리 자신을 깨워 죄악의 늪 속으로 자꾸만 빠져드는 발을 빼내어 거룩함으로 도약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잃어버린 빛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그 은혜를 믿고 의지하며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거룩함에 이르도록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예수님,
인도자 성령님,
저희의 삶을 드립니다.
주님의 강한 손으로 잡아 주시어
저희의 거룩한 본성을 기억하고
모든 것이 회복될 그 날을 소망하며
오늘 여기서
주님과 동행하며
거룩한 길을 가도록 도우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