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하나님?--노아와 그의 믿음'(3)
1.
Happy Thanksgiving! 감사절을 맞는 여러분 모두의 마음 안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절로 인해 모이는 모든 모임 마다에 하늘의 은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함으로 행복해집니다. 마음 깊이에서 솟아나는 감사로써 여러분 모두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 모든 감사가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때로 이 땅의 것을 즐기느라 하늘을 잊고 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진실한 감사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영화 <노아>가 제기한 질문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보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영화 <노아>의 스토리 라인이 성경의 노아 이야기와 많이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영화는 거대한 성을 짓고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온 세상을 죄악으로 오염시켰던 가인의 후손과는 달리 셋의 후손은 겨우 명맥만 이어가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셋의 9대 손인 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우리가 수고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다. (창 5:29)
그래서 '노아'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히브리어로 '위로'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6장으로 가면, 노아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성인이 된 노아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 이렇게 세 아들을 두었다. (창 6:9-10)
“This is the account of Noah. He was a righteous man, blameless among the people of his time, and he walked with God. Noah had three sons: Shem, Ham, and Japheth.” (Gen, 6:9-10)
성경에 의하면, 방주가 지어질 때 세 아들들은 장성하여 결혼을 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가 나면 "너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을 모두 데리고 방주로 들어가거라"(6:1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셈은 청년으로, 둘째 아들 햄은 청소년으로 그리고 막내 야벳은 어린이로 나옵니다. 이렇게 설정한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어느 날, 노아는 세상 모든 생명이 물 속에 잠겨 죽는 꿈을 꿉니다. 하도 꿈이 이상하여 할아버지 므두셀라를 찾아갑니다. 므두셀라는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산에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신비를 마음에 간직하고 사는 듯한 므두셀라는 노아에게 차를 한 잔 줍니다. 그 차를 마시고 노아는 깜박 잠에 빠져 다시 환상을 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노아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계획을 알아차립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방주를 지으라는 사명도 깨닫습니다.
2.
노아의 가족이 므두셀라를 만나러 가던 길에 폐허가 된 동네를 지납니다. 가인의 자손에게 습격 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시체 더미 가운데서 살아있는 소녀를 발견합니다. 그 소녀는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입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가족은 소녀를 데리고 가서 치료해 줍니다. 그의 이름은 일라(Ila)입니다. 일라는 노아의 가족과 함께 살면서 큰 아들 셈과 연정을 쌓아 가지요. 방주가 완성되어 갈 즈음에 일라가 홀로 있는 노아에게 찾아와 셈을 위해 온전한 여자를 구해 오라고 간청을 합니다. 자신은 옆구리에 얻은 상처로 인해 여자 구실을 할 수가 없고 아기도 낳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햄과 야벳을 위해서도 아내감을 찾아 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홍수로 인해 다 죽고 나면 자손을 이을 수가 없겠기 때문입니다.
일라의 말에 노아는 마치 망치로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정신을 수습한 후에 얼굴을 가리고 가인의 땅에 잠입해 들어갑니다. 일라의 말대로 소녀들을 데리고 오려 한 것입니다.
듣던 대로, 가인의 땅에서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인한 살륙과 범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짐승만이 아니라 여자와 어린 아이를 먹잇감으로 사고 팝니다. 그 모습을 보고 노아는 치를 떱니다.
그 때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서 자세히 그 사람을 주목해 봅니다. 아뿔사! 또 다른 노아가 그곳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겁니다. 그 장면을 잠시 보시지요.
여기서 노아는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죄악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자신도 언제든 그들과 같아질 수 있음을 깨닫고 몸서리쳐 놀랍니다. 그는 발걸음을 돌이켜 방주로 돌아 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결론을 짓습니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렇기 위해서는 세아들이 인류의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고!
그로부터 얼마 후에 둘째 아들 햄이 자신의 아내감을 구해 달라고 노아에게 청합니다. 노아는 단호하게 거절하지요. 화가 난 햄은 스스로 아내감을 찾기 위해 가인의 성으로 들어갑니다. 햄은 깊은 구덩이 속에서 죽어가던 소녀를 발견하고 방주로 데리고 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소녀는 오는 길에 덫에 걸립니다. 소녀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햄은 덫을 벗겨보려 힘쓰지만 역부족입니다. 홍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노아가 햄을 발견합니다. 햄은 소녀를 구해달라고 청하지만, 노아는 햄만을 데리고 방주로 돌아옵니다. 이 일로 인해 햄은 아버지를 향해 불같은 분노를 품습니다.
3.
노아와 그의 가족은 무사히 방주 안으로 대피합니다. 노아는 자신의 과업을 완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일라가 임신을 했다는 겁니다. 그 소식에 노아는 기겁을 합니다. 알고 보니, 노아가 모르는 사이에 그의 아내 나아마가 므두셀라에게 가서 부탁합니다. 므두셀라는 손주 며느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홍수가 나기 직전에 일라를 만나 옆구리의 상처를 치료해 줍니다. 여성의 역할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임신을 할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사실을 노아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내들이란 다 이렇습니다. 중요한 순간의 남편의 일을 망쳐 놓습니다. 그래서 남편들은 불같이 화를 냅니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그것이 남편을 살립니다. 남자를 죄에 빠뜨린 것도 여자이지만, 남자를 구원하는 것도 여자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 앞에서 노아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대답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침묵을 자기방식대로 해석합니다.
그리고는 아내에게 돌아와 말합니다. 만일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그대로 살게 하겠지만,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태어나는 순간 자신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때가차서 일라가 해산을 합니다. 아이를 받은 나아마는 그 자리에서 통곡합니다. 딸이 나온 것입니다.닥쳐올 비극을 생각하며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데, 아이가 또 나옵니다. 이번에도 딸입니다. 딸쌍둥이를 얻은 것입니다.
일라가 해산한 것을 알고 노아는 칼을들고 찾아갑니다. 하지만 며느리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때 방주 위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노아는 미친듯이 달려 올라갑니다. 일라는 딸을 양팔에 안고 방주 끝에 서있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잃은 노아는 그들을 향해 걸어갑니다.
노아가 다가오자 일라는아이들이 울면서 죽게하고 싶지는 않다고, 아이들을 달랠 여유를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자장가를 불러주지요. 일라가 아플 때 노아가 불러주었던 그 자장가입니다. 아이들이 다시 잠에 듭니다. 그때 노아는 칼을 높이듭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성할 마지막 단계에 노아는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단계에서 그는 포기합니다. "더 이상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칼을 버립니다. 그 사건 후에 그는 스스로를 패배자로 낙인찍고 살아갑니다. 홍수가 그친 후에도그는 가족과 떨어져 삽니다. 하나님의 뜻도 이루지 못했고, 가족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기에 홀로 살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가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것으로 나오는데, 작가와 감독은 노아가 죄책감을 잊기 위해 포도주에 취해 산 것으로 그립니다.
노아가 술에서 깨어났을 때, 며느리 일라를 만납니다.이 장면에서 일라가 노아에게 묻습니다. 왜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그러자 노아가 대답합니다.
아이들을 살해하려고 칼을 들기 전까지 노아는 자신 안에있는 악에 대해서만 생각했습니다. 그 악을 없애기위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두 손녀의 자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 안에는 오직 사랑밖에 없었습니다. 일라가 딸들을 위해 불렀던 자장가는 실은 노아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노래였습니다. 일라는 마치 예언자처럼 노아에게 말합니다. 이제는 선함을, 사랑을, 자비를 선택하며 살아가라고. 그것이 다시 시작하는 길이라고.
4.
이 영화를 통해 작가와 감독이 제시하려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에 선과 악이 혼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누구나 두발가인과 같은 악인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노아와 같은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둘 사이에서의 선택할 수 있는 결정권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인간의 희망 그리고 인류의 희망은 선과 악 사이에서 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교의 한계 그리고 무신론자의 한계입니다. 시나리오를 쓴 아리 헨델은 유대교인이고, 감독인 아로노브스키는 무신론자입니다.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의 바른 선택이 죄악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믿습니다. 바른 선택을 도와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시인 중 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시 119:105)라고 노래했습니다. 유대교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 종교들이 바른 선택을 가르치고 또한 그것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양심적 무신론자'들도 인간의 바른 선택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의 입장은 달라집니다. 인간 안에 선과 악이 혼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기독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선과 악 사이에서 바른 선택을 할 능력이 인간을 혹은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바른 선택을 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기는 하지만 그 능력은 너무도 깨어지기 쉬워서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조건이 갇추어 졌을 때에만 선한 존재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그만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건강도 있고,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든든하고, 주변 환경도 받쳐 주기 때문에 선을 선택하며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환경에서도 악을 선택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더 많은 사람들은 선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 조건 중 일부가 심하게 결여되면 그 능력은 순식간에 증발되어 버립니다. 여러분이 선하게 살고 있는 것은 여러분이 정말 선해서가 아닙니다. 제 말이 아니라 성경의 증언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 지면 우리는 악을 선택하고 또한 즐기게 되어 있습니다. 1961년 6월 7일, 독일의 뉴렘버그 (Nuremberg)에서 있었던 아이히만 재판 (Eichmann Trial)의 일화를 기억하십니까? 아돌프 아이히만 (Adolf Eichmann)은 히틀러의 심복으로 나치 정권이 행한 그 엄청난 악행을 계획하고 추진한 사람입니다.
2차 대전 후에 아이히만을 재판하는 자리에 예히엘 디누어 (Yehiel DeNur)라는 유대인이 증언자로 나섭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2년 동안 감금되어 있으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임 당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참상을 증언하는 자리에서 디누어는 피고석에 앉은 아이히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격하게 통곡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집니다. 그로 인해 재판은 중단되었습니다.
.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83년, CBS 방송의 유명한 대담 프로인 60 Minutes의 진행자인 마이크 월러스(Mike Wallace)가 디누어를 만나 인터뷰를 합니다. 월러스가 묻습니다. 아이히만을 보고 실신한 이유가 무엇이었느냐고. 그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아니면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디누어는 그 어느 것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수백만의 인명을 살해한 아이히만이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 때문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이히만이 괴물과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옆집 아저씨의 모습을 하고 피고석에 초라하게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디누어는 월러스에게 말합니다. "저는 내 자신에 대해 두려워졌습니다. 나도 그 사람처럼 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사람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I was afraid about myself. I saw that I am capable to do this. I am ... exactly like he.)
5.
만일 아이히만이 저나 여러분과 같은 조건에 살았다면 아주 교양있고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이 말은 뒤집어도 진실이 됩니다. 저나 여러분이 만일 아이히만과 같은 조건에 있었다면 그가 행했던 것과 같은 혹은 그보다 더한 악을 행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의 현실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선한 의지의 한계입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선한 의지에 희망을 걸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회복을 말합니다.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대해 말합니다. 인간의 망가진 의지의 온전한 회복을 말합니다. 인간 내면의 악의 소멸을 말합니다. 그것이 미래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완성될 것이지만, 지금 이곳에서 우리 각자의 내면에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거듭 난다'(born again)라고 말합니다. 다시 지어진다고 말합니다. 새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것 아니고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이미 죽었기에 원죄는 더 이상 죽은 몸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게 됩니다. 6장의 말씀을 더 읽어가다 보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13절)
때로 우리는 영화 속의 노아와 같은 심정에 빠지곤 합니다. "온 우주의 문제는 인간에게 있고,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 해법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ISIS같은 테러 단체가 행하는 악행을 볼 때도 그렇고,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일어나는 엄청난 환경 파괴를 생각해도 그렇고, 모순 투성이의 자신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또 때로 우리는 정반대로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때로 우리 자신이 꽤 괜찮아 보이고, 세상은 매우 아름다워 보이고,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선해 보입니다. 그럴 때면 "이대로의 세상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집니다. 이렇게 선한 뜻을 가진 사람들과 잘 해 보면 우리 손으로 낙원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둘 다 해법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악의 현실에 압도 당하지도 말고, 우리에게 있는 선의 가능성을 과신하지도 말라 하십니다. 자신을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해결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본성이 새로 지어지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을 청산하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진정한 희망입니다.
6.
우리는 지금 추수 감사절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부디, 감사절 식탁에서 태초의 에덴을 생각하고 또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기 바랍니다. 감사절 식탁에서 누리는 평화와 안식과 기쁨은 인간의 원래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그 에덴이 죄로 인해서 깨어졌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에덴을 회복할 길을 활짝 여셨습니다. 다시 지어지는 길, 거듭 나는 길, 새 사람으로 지어지는 길을 여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거듭 나셨습니까? 그렇습니까? 잘 모르겠습니까? 제가 해답을 알려 드리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셨다면 그리고 진실로 그분을 믿고 의지하신다면, 담대하게 그러나 겸손히 "예!"라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11)
"알아야 합니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로기조마이'(logizomai)는 '간주하다'(consider), '계산하다'(calculate)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이미 거듭 났다고 '간주하라'는 말입니다. 왜 '간주하라'고 말합니까? 거듭났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고 실감도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건이기에 육적인 감각으로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이 이미 일어났다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인정하고 그렇게 살라는 말입니다.
다시 여쭙겠습니다. 여러분은 거듭 나셨습니까? 그렇게 간주하십시오. 그렇게 인정하십시오. 그렇게 사십시오. 그럴 때 자신도 거듭남의 증거가 드러날 것입니다. 질기도록 들러붙던 죄가 힘 없이 떨어져 나가고, 거룩한 생각이 마음을 채우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감사할 일은 바로 이 거듭남의 은혜입니다. 진실로 축하할 일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희망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믿음, 이 은혜, 이 소망을 감사하고 축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의 주님,
세상의 죄악에 짓눌리지 않게 하시고
내면의 악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의 아름다움에 취하지 않게 하시고
내면의 선을 과신하지 않게 하소서.
오직 주님 안에 거하여
온전히 거듭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저희를 도우소서.
오직 그것만이 희망이 되게 하시며
오직 그것만이 감사의 조건이 되게 하소서.
아멘.
'좋은 말씀 > 김영봉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침묵은 말한다" (베드로후서 3:8-15) (0) | 2017.05.12 |
|---|---|
| "나는 아직 사람이 아니다" (에베소서 15-23) (0) | 2017.05.11 |
| "그래도 우리는 희망한다" (로마서 1:20-25) (0) | 2017.05.07 |
| "그곳에 가고 싶다" (창세기 3:23-24) (0) | 2017.05.04 |
| "영혼의 갈증" (시편 43:1-5) (0) | 2017.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