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들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54-60)
스데반이 남긴 두 번째 것은 위대한 기도였다.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기 전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모습을 바라보았다(행 7:55). 그때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행 6:15). 그렇게 성령이 충만하였던 스데반은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두 마디의 기도를 남겼다. 하나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이고, 다른 하나는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이다. 모두가 거룩한 순교의 죽음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거룩한 내용이다.
첫 번째 기도인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는 믿음으로 생애를 산 사람만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길 수 있는 마지막 정리이다. 영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며 삶의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살았던 자만이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 믿음으로 한 평생을 살았던 스데반은 이 땅을 떠나면서 마지막 기도로 자신의 영혼을 주인 되시는 예수께 위탁한 것이다.
믿음 안에서의 죽음은 마지막 종결이 아니다. 나그네로 지냈던 이 땅에서 본향인 하늘나라로 주소를 옮길 뿐이다. 천상병 시인이 ‘귀천’에서 노래했듯이,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본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 그래서 우리는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골 3:1-2).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면,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주실 의의 면류관을 하늘나라에서 받게 된다(딤후 4:7-8)
스데반의 두 번째 기도인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는 자신의 유익을 우선하지 않고 남의 배려를 앞세우면서 산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마지막 고백이다. 자신의 유익보다 남의 유익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기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이해하려는 자세이다. 그것은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함이기도 하다(빌 2:3).
자신을 향해 돌로 치고 있는 유대인들의 영혼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 스데반에게는 있었다. 그것은 스데반이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애쓴 결과이기도 하다. 곧 그들이 돌로 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유대교 교리에 얽매여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한 영적 우매함 때문이었다. 스데반은 이미 마음속으로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그들의 용서를 하나님께 구할 수 있었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남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곧 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물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곧 남의 입장에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아량과 배려이다. 그런 자세로 산다면, 스데반처럼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위대한 기도를 남길 수 있다.
스데반이 남긴 두 기도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긴 마지막 말씀이기도 하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34, 46)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용서와 위탁의 마지막 기도는 스데반의 순교에서 그대로 이어졌다. 이제 그 기도는 우리에게 이어지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특별한 기도가 아니라 신앙으로 산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드릴 수 있는 보편적인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주인이시며 남을 배려하며 사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다.
마지막 결과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평생을 살아온 삶의 결실로 주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의 연장이다. 스데반처럼 위대한 기도를 남기려면, 지금의 삶이 그 기도를 닮아있어야 한다. 영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 우리의 본향이 하나님나라에 있다는 것,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라는 것, 이 두 가지는 꿈속에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서울신대 권혁승 교수>
[출처] 무엇을 남길 것인가(2)|작성자 viva2011
'좋은 말씀 > 권혁승교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는 우리를 새롭게 하는 영적 성장의 거룩한 통로 (렘 33:3) (0) | 2017.01.06 |
---|---|
무엇을 남길 것인가(3) (0) | 2017.01.05 |
무엇을 남길 것인가(1) (0) | 2017.01.02 |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성 (0) | 2017.01.01 |
생명 예찬 / 권혁승 칼럼 (0) | 2016.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