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들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54-60)
어떻게 살 것인가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와 관련된다. 남길 것에 대한 관심은 곧 삶의 의미요 방향이다. 달란트 비유에 소개된 착하고 충성된 종들처럼, 우리들도 이 땅에 살면서 최선을 다하여 인생 결산서를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갖고 계신 기대이면서 또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드릴 마지막 예물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무엇인가 남길 것이 있는 삶을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스데반은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크고 위대한 것을 남긴 인물이다.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크게 부흥하였던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과부들의 구제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빠졌고, 그것 때문에 헬라파 사람들이 히브리파 사람들과 심히 다툰 것이다(행 6:1). 헬라파 유대인은 해외 출신 유대인이고, 히브리파 유대인은 본토 이스라엘 출신 유대인을 가리킨다. '구제'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니아'는 '구제' '봉사'라는 넓은 의미이기도 하지만, '음식을 차려 접대함'이라는 구체적인 것을 지칭한다. 더구나 '매일'이라는 수식어가 있어 그 점이 분명하다. 같은 단어를 그 다음 절에서는 '접대'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행 6:2). 히브리어 번역 신약성경에서도 '디아코니아'를 '식사' '음식'을 의미하는 '아루하'로 번역하고 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오갈 데가 없는 과부들에게 매일 식사를 제공하였던 것 같다. 그러던 중 행정 실수로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식사공궤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열두 사도는 이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앞으로는 구제와 같은 행정업무와 기도 및 말씀 사역을 구분하려는 뜻에서 일곱 집사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에게는 행정 업무를 전담케 하고 자신들은 목회사역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예루살렘 교회는 갈등을 극복하고 새롭게 부흥하게 되었다.
일곱 집사 중 하나로 선정된 스데반은 사도들을 도와 새로운 교회 부흥을 일으킨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교회 행정을 위임받은 평신도 지도자였지만,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할 만큼 카리스마적 능력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 스데반이 분노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여러 가지 개인적인 역량으로 볼 때 그는 얼마든지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아깝게도 박해로 인하여 요절한 것이다. 어느 면에서 그의 죽음은 너무 허망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죽음 뒤에 위대한 것 세 가지를 남겨놓았다.
첫째로, 그는 영감 있는 한 편의 위대한 명 설교를 남겼다. 그의 설교는 사도행전 7장에서 53절이나 차지하는 긴 내용이다. 사도행전 안에는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들이 남긴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예루살렘에서 베드로가 전한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장, 17장, 20장에는 바울의 전도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인물은 사도행전 전반부와 후반부를 이끌어가는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주역들이다. 그런데 이 두 인물 사이에 스데반의 설교가 들어 있다.
스데반은 베드로나 바울처럼 정규 신학교육을 받은 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설교는 더욱 돋보인다. 아브라함에서 시작되어 솔로몬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신앙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는 그의 설교는 논리적이며 설득력이 있다. 이스라엘의 신앙 역사를 꿰뚫고 있는 그의 성경 지식은 가히 놀랍다. 더구나 스데반이 설교하였던 장소는 돌로 그를 치려고 운집한 분노한 유대인들 앞에서였다. 살벌한 주변 분위기와 정반대로 그의 설교는 너무도 차분하게 느껴진다. 이는 그의 설교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설교가 아니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전한 영감 있는 설교였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찌르는 결과를 가져왔다(7:54). 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이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한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스데반처럼 위대한 설교를 남길 수 있다. 비록 설교자로 부름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설교를 남길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스데반 역시 말씀 사역자들을 행정적으로 돕는 평신도 지도자였다. 설교는 우리들의 삶 속에 자리하고 있다. 매일의 말씀 묵상도 자신을 향한 일종의 설교이다. 가정예배에서 가족들과 함께 나누는 말씀 역시 설교의 한 유형이다. 구역예배의 리더라면 좀 더 공식적인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설교를 남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말씀 중심의 유언을 가족들에게 남기는 것이다.
위대를 설교를 남기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성경을 정확하게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이 아는 것이다. 그래야 성경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그런 성경의 해박한 지식 위에 성령의 충만함이 있어야 영감 있는 설교를 남길 수 있다. 성경의 원저자가 성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일이다. 몸으로 보여주는 설교가 살아 있는 진짜 설교이기 때문이다. <서울신대 권혁승 교수>
[출처] 무엇을 남길 것인가(1)|작성자 viva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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