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그가 보고 믿었다" (요한복음 20:1-10)

새벽지기1 2017. 1. 2. 13:23


1.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믿기 어려운 교리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가장 많은 대답이 ‘부활’(resurrection)로 나옵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저는 그분들의 정직성을 높이 삽니다. 믿지 못하는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한다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은 견실한 믿음에 이르기 위한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는 척하거나, 혹은 무조건 믿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 그냥 믿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합니다.

 

다만,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라거나 "그런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이성을 절대화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며, 지금 아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오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정직하게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중 이제는 ‘그럴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인정하게 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과거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지금에 와서 다반사가 되어 버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경험들을 되돌아본다면, 지금 내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 싶습니다.

 

자신이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도 좋은 태도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진리를 다 알고 있지 않으며 또한 다 알 수도 없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도 좋은 태도입니다. 진실한 믿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데 있어서 이 같은 두 종류의 정직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게 정직하게 진리를 탐구해 나아갈 때,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고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지금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의 진보는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성을 믿는 결과에 빠져 버릴지 모릅니다. 자신의 이성을 절대화하는 바람에 하나님을 자신의 이성의 한계 안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그런 사람이 믿는 신은 이성에 위배되지도 않고 과학의 원리에도 마찰이 없는, 아주 ‘합리적인’(reasonable) 존재일 것입니다. 그런 신을 믿는 것이 편안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런 신은 자신이 만든 우상입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야훼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신 분입니다. ‘우리보다 크다’는 말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성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고, 과학의 원리에 마찰되는 부분도 있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그런 부분이 있어야만 우리보다 큰 존재가 됩니다. 우리보다 커야만 우리가 신으로 섬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신이 아니고는 우리를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2.

 

부활이 무엇입니까?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소생’(resuscitation)이 아닙니다. 그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서점에 가면 생물학적인 견지에서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갔다가 되돌아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소생했다가 얼마간 살다가는 다시 죽었습니다. 부활은 죽었던 과거의 생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생과는 전혀 다른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비유적으로 표현했던 것처럼, 땅에서 나온 우리의 몸이 하늘로부터 임하는 영원한 몸을 덧입는 것(고후 5:1)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우리가 경험해 본 바가 없기 때문에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것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것을 입증할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기가 어렵습니다. 믿기가 어려운 것이 당연합니다.

 

여기서 고민이 생깁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고전 15:14) 무슨 말입니까?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싶은데, 가장 믿기 어려운 부활이 그 핵심이라니,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이성을 억압하고 무턱대고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믿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뭔가 수상쩍지 않습니까? 저 같아도, 그렇게 믿으라면 믿지 않겠습니다. 분명한 증거(evidence)는 아니더라도, 뭔가 믿을만한 단서(clues)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부활 신앙에 대해 무조건 믿는 것 말고 다른 방도는 없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지 사흘째 되는 날, 막달라 마리아가 그분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돌산에 만들어진 동굴을 무덤으로 사용했습니다. 시신을 안치한 다음, 짐승이 들어가서 시신을 파먹지 못하도록 입구를 돌로 막아 놓았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에 보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다 놓고 부활했다고 선전할지 모르니 무덤을 단단히 지켜 달라고 부탁합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청을 들어 경비병 몇 사람을 내어 주면서 무덤을 경계하도록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당도했을 때, 경비병들도 사라지고 없었고, 무덤을 막아 놓았던 돌문도 옮겨져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깜짝 놀라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갔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요한복음서를 쓴 제자 요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둘은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끌려갔을 때 뒤따라갔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두 제자에게 달려가서 당황스러운 어조로 말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2절)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지체 없이 무덤까지 달려갔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난데없는 달리기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었기 때문에 먼저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무덤 입구에 도착하여 헐떡이는 숨을 고르면서 목을 길게 빼어 무덤 안을 살핍니다. 과연, 마리아가 말한 그대로 무덤 안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윽고 베드로가 헉헉대며 뛰어 옵니다. 다혈질의 급한 성격의 사람이었던 베드로는 무덤 입구에 서 있는 요한을 지나쳐 거침없이 무덤 안으로 달려듭니다. 그리고는 옷소매로 땀을 훔치며 무덤 안을 둘러봅니다. 예수님의 몸을 쌌던 수의가 시신이 놓였던 곳에 그대로 놓여 있고, 그분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습니다. 그 때, 요한도 무덤 안으로 들어와서 무덤 안을 유심히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의 8절은 그의 행동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3.

 

요한은 무덤 안에서 무엇을 보고 또한 무엇을 믿었다는 뜻일까요?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싸맸던 수의가 그 자리에 놓여 있고, 그분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이 한쪽에 개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냥 육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며 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어떻게 된 것일까? 왜 수의가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져 있을까? 수의가 놓인 모습이 마치 나비로 변한 애벌레가 껍질을 두고 빠져 나간 듯, 혹은 뱀이 굳은 껍질을 벗어놓고 빠져 나간 듯, 시신을 둘둘 싸맸던 그 모습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왜 한 쪽에 개켜져 있을까? 마치 누군가가 차분하게 모든 것을 정리한 모습입니다.

 

짧은 순간이었겠지만, 요한은 마치 수사관처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시나리오를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가 침입해서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을까? 그렇다면 수의를 벗겨놓을 필요가 없지 않는가? 수의를 벗길 이유가 있었다면, 왜 그것을 다시 둘둘 말아 시신이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놓아두었을까? 그들은 왜 시신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을 이렇게 단정하게 접어놓고 갔을까? 게다가, 무덤 안에 사람들이 침입한 흔적도 없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안심입니다.

 

그렇다면 뭔가? 요한은 계속 생각했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잠시 코마 상태에 빠졌다가 선선한 무덤에서 며칠 쉬면서 원기를 회복하여 어디론가 가셨는가? 처형 전문가들인 로마 병사들이 죽은 사람과 기절한 사람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허술할까? 혹시 그렇다 해도, 그렇게 고문당하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은 사람이 사흘 만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셨으니) 40여 시간 만에 회복될 수 있는가? 만일 그랬다 해도, 벌거벗은 사람이 왜 수의는 그대로 두고 갔을까? 상처를 싸매거나 몸의 주요 부위를 가리기에 수의는 그런대로 쓸 만했는데, 왜 모든 것을 벗어 두었나? 만일 깊은 코마 상태에 있다가 깨어나 스스로 수의를 벗은 것이라면, 둘둘 말았던 것을 풀었을 터인데, 수의는 둘둘 말린 상태로 그대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풀었던 수의를 왜 다시 말아 놓았나? 대답할 수없는 질문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이것도 아님이 분명했습니다.

 

누가 훔쳐간 것도 아니고, 스스로 살아서 나간 것도 아니라면,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요한에게는 제 3의 가능성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즉 예수께서 생전에 말씀하시던 그 사건, 그로서는 그게 무엇인지 전혀 추측할 도리가 없는 그 사건, 부활이라는 것이 그분에게 일어난 것이라고 밖에는 결론지을 길이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시신을 훔쳐 간 것도 아니고, 죽었다가 다시 소생한 것도 아닌, 죽음을 통과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닐까?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여 껍질을 두고 빠져 나가듯, 예수님의 시신이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하여 그 몸을 두르고 있던 수의를 그대로 두고 빠져 나간 것이 아닐까?

 

요한은 무덤 안에 남겨진 단서들을 유심히 보고는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그가 보고 믿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몰라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무덤 안에서 관찰한 것들을 추정해 보는 과정에서 그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는 부활이 무엇인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어떤 것인지, 어떤 일이 그분에게 일어난 것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다른 그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생전에 말씀하시던 부활이라는 것임을, 요한은 믿을 수 있었습니다.

 

4.

 

부활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부활한 몸이 어떤 몸인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요한도 이해하지 못했고, 기독교 역사 2천년 동안 나타났던 천재적인 신학자들도 모두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되어 보지 못하고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경험해 보지 않고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 부활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마치 애벌레가 나비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지만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고 해서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이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지만 믿었듯이,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이성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성을 제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요한은 믿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요한보다 먼저 현장을 보기는 했지만, 그 자리에서 믿지는 못했습니다. 요한만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만큼 질문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만큼 깊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이 머리가 더 좋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뇌가 좋아야만 믿을 수 있다면, 그것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머리 좋은 덕에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그 덕에 내세에서도 잘 산다면, 하나님은 정말 불공평한 분이라고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머리가 나빠서 이 세상에서 손해 보고 산 것만도 억울한데, 저 세상에서까지 손해를 보라는 말입니까? 다행스러운 사실은, 비록 이 세상은 두뇌의 명석함에 따라 등급을 매기려 하지만, 적어도 믿음에 있어서는 그것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명석한 것이 믿음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자신의 이론과 결론을 너무 지나치게 믿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뇌의 명석함이 아니라 주변을 살피는 마음입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진지하게 질문하고 답하는 태도를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이 무덤을 살펴보면서 가졌던 안목(perspective)과 그것을 바탕으로 진리를 찾아간 그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그런 태도로 진리를 찾아간다면, 부활을 이미 믿는 분들은 더 견고한 믿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며, 아직 믿지 못하는 분들도 이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도 믿는 길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5.

 

요즈음, 믿지 않는 것이 자랑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것이 이성의 목적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을 비롯한 몇몇 무신론 변증서 들이 베스트셀러로 읽히면서 이런 분위기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것이 똑똑하다는 증거인 것처럼, 정신적으로 자유하다는 증거인 것처럼, 깨어 있고 시대의 흐름에 맞는 증거인 것처럼 오해되고 있습니다. 반면, 믿는 것은 어리석다는 증거로, 정신적으로 뭔가에 예속되어 있다는 증거로, 시대 흐름에 뒤쳐진다는 증거로 오인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믿는 사람들은 주눅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마치 믿는다는 것이 큰 약점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드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부끄러워해야 할 믿음이 있습니다. 수치스러운 믿음이 있습니다. 명백히 이성에 모순되며 도덕률에 위배되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믿음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교 집단(cult group)에 빠지는 경우가 그 예입니다. 꼭 사교 집단에 빠진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극단적인 믿음, 맹신적인 믿음, 광신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본인들은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과녁을 한 참 빗나간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처럼 믿는 믿음은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성의 목적은 요한의 경우처럼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참다운 믿음에 이르기 위해 힘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contemplative living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관조적 삶’ 혹은 ‘묵상적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쉬운 말을 사용하자면, 차분하고 침착하게 주변을 관찰하고 묵상하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그렇게 주의 깊게 살피고 생각하고 기도하면 믿음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힘쓰는 목적은 요한이 무덤 안을 살펴 본 것과 같은 눈과 마음과 생각을 유지하는 것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눈과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진실한 믿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무작정의 믿음이 아니라, 관조적인 삶을 통해 이른 믿음이라면, 무신론자들 앞에서 주눅 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이성을 자랑합니까?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부정할 수 없는, 신의 존재에 대한 단서들을 발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과학의 원리와 법칙을 자랑합니까?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들이 종교가 저질러 온 잘못을 비판합니까? 부정할 마음은 아닙니다만, 그것으로 인해 믿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판단입니다. 요한의 눈과 마음과 생각으로 진리를 추구해 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그 어떤 무신론자(atheist) 혹은 반신론자(anti-theist) 앞에서도 의연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믿는 바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신의 존재를 믿을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인정할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결정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결정적인 증거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의 존재에 대한 단서들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단서들만이 있습니다. 그 단서들을 보고 추론하여 진실을 추적해 가야 합니다. 요한이 믿은 것은 결정적인 증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남긴 흔적들을 세심히 관찰하고 나서, 그 관찰을 근거로 하여 믿은 것입니다.

 

6.

 

이 대목에서 20장 후반부에 나오는 도마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20:25)라고 말했습니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한 믿지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마를 만나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27절)고 말씀하십니다. 도마는 예수님과의 만남에 압도되어 즉석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29절)

 

도마는 보고 믿은 사람이라면, 요한은 보지 않고도 믿은 사람입니다. 도마는 결정적인 증거를 보고서야 믿었지만, 요한은 그런 것 없이도, 그에게 남겨진 단서들만을 보고 추론하여 예수님이 그분의 예언대로 부활하셨음을 믿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보지 않고 믿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부활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다렸을 때, 그분은 요한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육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가 숨을 쉬고 있는 것만큼이나 명백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저는 구상 선생의 시 ‘말씀의 실상’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시는 관조적인 삶을 통해 일상에 널려 있는 단서들을 보고 영의 눈이 열린 순간의 황홀한 체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개인 것도
이적에나 접한 듯
새삼 놀라웁고

창 밖 울타리 한 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꽃도
부활의 시범을 보듯
사뭇 황홀합니다.

 

창창한 우주, 험악한 바다에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상상도 아니요, 상징도 아닌
실상으로 깨닫습니다.

 

7.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도마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안으로 보고 믿을 방도가 없습니다. 요한처럼 믿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불행하다 하겠습니까? 예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우리가 요한처럼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단서들을 주의 깊게 보고 그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며 진리를 추구해 나간다면, 하나님에 대해, 부활에 대해, 영생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깨달아 갈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믿음에 이르면, 비로소 마음의 눈, 영의 눈이 열리고, 육안으로 보이지 않던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설교 후에 부르게 될 찬송 151장의 가사를 생각해 봅니다. 후렴 가사를 보면, "예수 예수 늘 살아계셔서 주 동행하여 주시며 늘 말씀하시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 계시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찬송의 영문 가사를 참 좋아하는데, 특히 후렴 부분의 경우, 악보에 맞추느라 우리말 번역이 영어 원문의 의미를 많이도 깎아 버렸습니다. "He Lives"라는 제목의 이 찬송의 후렴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He lives, He lives, Christ Jesus lives today!
He walks with me and He talks with me along life's narrow way.
He lives, He lives, salvation to impart!
You ask me how I know He lives:
He lives within my heart.

 

이 가사를 악보의 흐름을 생각하지 않고 의미만을 고려하여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그분은 살아 계시네, 살아 계시네
그리스도 예수는 오늘 살아 계시네!
인생의 좁은 길을 걸어 나갈 때
그분은 나와 함께 말씀하시고 나와 함께 걸으시네.
그분은 살아 계시네, 살아 계시네
구원을 베풀어 주시네!
그분이 살아 계심을 어떻게 아느냐고,
당신은 묻지요.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분이 제 마음에 살아 계시거든요.

 

이러한 관조적 삶의 은총이 여러분 안에 깃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우리의 일상에 흩어져 있는 단서들을 깊이 들여다보심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영적 눈이 열려 우리 마음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함께 인생의 좁은 길을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살아계신 주님,
저희에게
요한의 마음, 그 눈, 그 태도를 주소서.
그리하여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게 하소서.
주위에 널려있는 단서들을 보고
주님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눈을 주소서.
저희 마음 안에 계신 주님을 알아볼 눈을 주소서.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살아감으로
사막 같은 세상을 꽃동산으로 바꾸고
전쟁터 같은 인생을 잔칫집으로 바꾸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