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한복음 20장 앞 부분에서는 부활의 아침에 일어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고, 두 사람은 급히 달려와 그 사실을 확인합니다. 제자 요한은 무덤 안에 남겨진 단서들을 주의깊게 보고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믿게 됩니다. 반면, 베드로는 동일한 현장을 보고도 요한같은 믿음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두 제자는 무덤 안을 충분히 살펴 본 다음, 자신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무덤 밖에는 다시금 막달라 마리아가 홀로 남겨져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아직도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전통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성경 안에는 그런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아주 심한 병에 걸려 고생했었는데, 예수님에 의해 치료 받고 나서, 내내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다녔던 사람입니다. 그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도 그를 특별히 아꼈기 때문에, 고대 교회로부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연인’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아끼는 마음에 있어서는 특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이 특별했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도 특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시신을 잃어 버렸으니, 얼마나 더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두 제자가 무덤을 떠나고 난 후에도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한 참을 울었습니다.
얼마나 울었을까? 마리아는 무덤 안을 다시 한 번 살펴 보고 싶었습니다. 남자 제자들처럼 차마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지만, 혹시나 싶어 다시 살펴 봅니다. 그 때 마리아는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의 수의가 놓여 있는 자리 양 끝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겁니다. 사람의 모습을 하기는 했으나, 이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지만, 그런 존재가 실재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덤 안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는 순간, 마리아는 “아, 사람들이 천사라고 부르는 존재가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라고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자여, 왜 우느냐?”(13절) 마리아는 뭔가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에,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합니다. 마리아는 그 천사들이 뭔가 답을 주기를 기다립니다만, 답은 없습니다. 다만, 천사들이 눈짓을 하여 ‘뒤를 보라’고 신호를 줍니다. 마리아가 뒤로 돌아보자, 어떤 남자가 그곳에 서 있습니다. 그 남자는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15절)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인 줄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눈에 고여 있는 눈물 때문인가요? 그는 그 사람이 그 동산을 지키는 사람인 줄로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그에게 묻습니다.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낯 익은 목소리로 그를 부릅니다. “마리아야!”(16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마리아는 그 사람이 동산지기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 찾던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마리아는 기뻐서 “라부니!” 즉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분을 끌어 안으려 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17절) 마리아는 내밀던 손을 멈칫 거두어 들이고, 행복한 표정으로 주님을 바라봅니다. 와락 안아야 속이 시원할 것 같더니만, 잠시 그분을 바라보고 있으니 행복이 마음에 차오릅니다. 마음의 빈 자리가 이제 뭔가로 가득 채워진 느낌입니다.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아직도 선명한데, 행복한 표정이 얼굴 가득 차오릅니다.
얼마 후, 마리아는 예수님의 분부대로 제자들에게 돌아가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전해 줍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표정과 말과 행동을 보고 적잖이 놀랐을 것입니다. ‘그토록 예수님을 사모하여 따라다니더니, 결국 실성을 했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가 돌아올 때 데리고 올 걸. 여자를 무덤에 홀로 두고 오다니! 우리가 저 여자를 미치도록 내버려 둔 셈이군!’하면서 자책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실성한 사람 치고는 너무도 정상적입니다. 그렇지만 또한 정상적인 사람치고는 너무도 이상합니다. 발이 땅에 닿았는데,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나서야 마리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행복해 보였는지! 왜 그렇게 달라 보였는지!
2.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증거를 손에 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요한처럼, 무덤 안에 남겨진 단서들을 보고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은 것으로도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것으로는 마음의 빈 자리를 채울 수 없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표정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실성한 것 치고는 너무도 정상적이지만 또한 정상적인 것 치고는 너무도 이상한, 신비로운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관조적인 삶을 통해 얻은 요한의 믿음도 아직 온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에 더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역사적인 사실로서 믿는 것으로는 내 삶이 변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부활의 현실이 내 삶 속에 뚫고 들어 와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의 소식은 나에게 복음이 되며, 희망이 되며, 생명이 됩니다. 그 만남의 사건이 있어야만 부활의 능력이 내 삶 속에 뚫고 들어와서 그 능력을 드러냅니다.
지난 주, 저는 요한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면서, 관조적이고 묵상적인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일상에 흩어진 단서들을 주의 깊게, 차분히, 깊이 들여다 보고,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고, 영원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부활을 소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기독교의 매우 중요한 한 차원을 부정하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도를 닦아서 영혼의 눈을 뜨기만 하면 다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만 하면 진리에 닿을 수 있는 믿음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우리가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셔야만 우리가 그분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어 우리를 찾아 주셔야만 우리가 그분을 만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를 터주셔야만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갈 방도는 없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려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야만 만남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묵상적이고 관조적인 노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 주변에 흩어져 있는 단서들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묵상적이고 관조적인 삶을 통해 하나님을 찾아가는 노력이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셔서 당신을 드러내 보여 주시고, 당신의 손을 내밀어 주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단지 머리에 머물러 있고 말 것입니다. 머리에 머물러 있는 믿음은 우리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3.
오늘 이야기에서 주목할 대목이 두 군데가 있습니다. 첫째는,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가, 그분이 “마리아야!”하고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깨닫고는 “라보니!”라고 응답하는 대목입니다. ‘라보니’는 아람어로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에는 기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감옥에 가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죄수 번호가 주어지고, 이름이 아니라 그 번호로 호명될 때, 마치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 당하는 듯한 비참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면, 마치 자신이 다시 인간이 된 것 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름은 이렇듯 의미 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은 자신을 그 사람에게 개방한다는 뜻이고, 마음을 담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열망의 표현이 됩니다.
이 대목에서 김춘수씨의 유명한 시 ‘꽃’을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 말입니다.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며, 관계가 이루어져야만 그 사람을 진실로 알 수 있으며, 그렇게 인격적인 관계가 만들어 져야만 그 관계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유대 사상가 마틴 부버(Martin Buber)도 <나와 너>(Ich und Du)라는 책을 통해 진정한 인격적 관계가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잘 안내해 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에야 마리아가 주님을 알아 보았다는 것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가 그분을 부르기 이전에 이미 마리아 곁에 오셨고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는 그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는 순간 그분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참된 만남,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주목할 대목은 예수님을 와락 껴안으려고 하던 마리아를 제지하면서 예수님이,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17절)라고 대답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두고 주석가들이 고민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의중을 다 알 수 없는 일이니, 이 말씀의 뜻을 다 풀려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당신을 대하는 방법을 바꾸도록 가르치고 있다는 것만큼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습니다. 육신을 입고 계실 때 예수님을 대하던 방식과 부활하신 주님을 대하던 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손으로 만져 확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마음으로 느껴 알 수 있는 분입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영혼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영적으로 한 차원 끌어 올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셔서 당신을 드러내신 부활의 주님은 마리아에게 영적으로 그분과 함께 교제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 동안 갈릴리를 유랑하면 나누었던 사귐의 추억을 이제는 잊어 버려야 했습니다. 이제는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적 존재이신 주님을 새롭게 대하고, 그분과의 사귐을 통해 영적으로 피어나야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경험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고, 부활하신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초대 교회에서 무시 못할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비록 열 두 사도의 명단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베드로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의 죽음과 매장의 장소에 증인으로 있었고, 빈 무덤을 맨 먼저 발견했고,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맨 처음 만난 사람으로서 막달라 마리아는 초대 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그가 부활하신 주님과의 밀도 있는 교제를 통해 부활의 능력의 그의 삶 속에서 빛을 발했기 때문에 그렇게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부활의 역사에 대한 증인일뿐 아니라 부활의 능력에 대한 증인이기도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열 한 제자에게도 나타나셨고, 또한 수 많은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셨지만 그것은 예외였고, 대부분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믿고, 그분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찾아가셔서 그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마음 속에서 들리는 미세한 음성에 귀 기우리는 사람들은 부활의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분과의 관계 안에 들어가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살아갔습니다. 그로써 부활의 능력이 그들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지금도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똑 같은 메시지를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전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3:20) 내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고 나아가 문을 열면 영적인 관계가 시작됩니다. 그분이 내 삶 속으로 들어오셔서 그분은 나와 함께 먹고 나는 그분과 함께 먹습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게 됩니다. 부활의 주님과 내가 일심 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로써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던 우리의 삶에 변화가 생깁니다. 죽음의 세력이 힘을 떨치던 우리의 삶에 부활의 능력, 생명의 능력이 득세합니다. 공동묘지처럼 암울하던 내 삶이 잔치집으로 변화됩니다.
4.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그분을 만나셨습니까? 혹시나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가 낯선 분으로 저 멀리 계신 것은 아닙니까? 그분에 대해 알기는 알지만, 그분을 세계 3대 성인으로 존경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분이 인류의 스승으로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은 알지만, 거기에서 멈추어 서신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그냥 마음에 위로나 받자는 것입니까? 혹은 인격 수양을 위한 것입니까? 만일 우리의 신앙이 그것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선물을 받아들고, 선물의 포장지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의 마음 속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그 음성을 오래 전부터 들어 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음성을 알아 듣고, 지체없이 응답하여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해 들이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음성을 무시하고 외면한 채로 지내 오다가, 끝내 항복하고 주님을 영접하셨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아직도 응답하기를 거부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몸은 교회에 나와 있어도 마음으로는 그 음성에 응답하지 않고 있을지 모릅니다.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사람의 삶 속에서는 생명의 능력이 아니라 죽음의 세력이 더 강하게 활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흑인 영가를 참 좋아합니다. 음악의 분위기도 어쩐지 우리의 전통 음악과 유사하여 체질에 맞습니다. 뿐만 아니라, 흑인 영가 가사는 영혼 깊은 곳을 만져주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너무 타계적인 것도 있습니다만, 흑인 노예들의 곤고한 삶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제외하면 아무 교육도 없던 흑인 노예들이 지어 부른 찬송인데도, 그 가사가 신앙의 진수를 담고 있어서 놀라는 때가 많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렸지요? 믿음은 성적 순이 아니라고 말씀입니다. 아무런 교육이 없던 흑인 노예들의 찬송이 때로 위대한 신학자의 글보다 더 심오합니다.
그 중 하나가 “Hush, hush, Somebody’s Calling My Name”입니다. 캐슬린 배틀(Kathleen Battle)의 음성으로 이 노래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Hush, Hush, somebody’s calling my name,
조용, 조용,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셔,
Hush, Hush, somebody’s calling my name,
조용, 조용,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셔,
Hush, Hush, somebody’s calling my name,
조용, 조용,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셔,
Oh, my Lord, Oh my Lord, What shall I do, what shall I do
오, 내 주님, 오 내 주님, 제가 어찌하리까, 어찌하리까?
Sounds like Jesus, somebody’s calling my name,
예수님 목소리 같은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셔,
Sounds like Jesus, somebody’s calling my name,
예수님 목소리 같은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셔,
Sounds like Jesus, somebody’s calling my name,
예수님 목소리 같은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셔,
Oh, my Lord, Oh my Lord, what shall I do, what shall I do.
오, 내 주님, 오 내 주님, 제가 어찌하리까, 어찌하리까?
(In African aboriginal language; 아프리카 토속 말로)
I’m so glad, troubles don’t last always,
환난이 끝날 때가 있다니, 나는 기뻐라
I’m so glad, troubles don’t last always,
환난이 끝날 때가 있다니, 나는 기뻐라
I’m so glad, troubles don’t last always,
환난이 끝날 때가 있다니, 나는 기뻐라
Oh, my Lord, Oh my Lord, what shall I do, what shall I do.
오, 내 주님, 오 내 주님, 제가 어찌하리까, 어찌하리까
Hush, Hush, somebody’s calling my name,
조용, 조용,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셔,
Hush, Hush, somebody’s calling my name,
조용, 조용,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셔,
Hush, Hush, somebody’s calling my name,
조용, 조용,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셔,
Oh, my Lord, Oh my Lord, What shall I do, what shall I do
오, 내 주님, 오 내 주님, 제가 어찌하리까, 어찌하리까?
여러분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이제, 그 음성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것처럼, 그분의 음성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분과 만나 사귀는 삶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한 집에 살면서 여러분은 그분과 함께 먹고 그분은 여러분과 함께 먹게 하십시다. 우리의 삶이 바뀔 것입니다. 무덤에서 울던 마리아가 기뻐 뛰며 제자들에게 달려가는 것 같은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눈물을 거두고 억제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것이 천국입니다.
5.
이번 부활절에 세례를 받으시는 분들을 면담하면서 여러 가지의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세례를 받으시는 분들의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특별하고 감동적이며 또한 신비로왔습니다. 그 중 한 분의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그분은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사랑받아 본 기억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랑 받는 것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 갈증을 채워 보기 위해서 이것 저것에 희망을 두고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 신통한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늦은 나이에 아이들을 데리고 홀로 미국으로 와서 살면서 우리 교회를 나와 처음으로 신앙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생소했지만, 주일 예배와 다른 경로를 통해 조금씩 신앙 생활에 대해 배워갔습니다. 듣고 배운대로 하나 둘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에 젖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홀로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였습니다. 손을 모으고 기도하던 중에 자기도 모르게 손이 움직여 졌습니다. 그 손은 자신의 볼을 어루 만지고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느낌이 마음을 압도했습니다. 그 순간, 그 자매의 손은 잠시 동안 하나님의 손을 대신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매의 손을 사용하여 그 자매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마음에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잠시였지만 그런 경험을 하는 중에 그 자매는 평생 처음으로 “누구에겐가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체험을 했고, 몇 십년 동안 비어 있었던 그 빈 자리가 채워지고, 깊은 위로와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 자매는 그 때 그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기억하십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나직한 목소리로, 들릴 듯 말듯,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나와 함께 살자고, 나와 함께 놀자고, 나와 함께 눕자고, 나와 함께 먹자고, 나와 함께 일하자고, 나와 함께 살고 지자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렇게 그분과 함께 살아 참되고 영원한 삶을 누리자고 부르십니다. 그 부름을, 여러분은 어쩌시겠습니까?
사랑의 음성으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저희로 그 음성을 듣게 하시고
그 부름에 응답하게 하소서.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더불어 살게 하소서.
주님의 생명이 저희의 목숨을 채우시고
주님의 진리가 저희의 거짓을 삼키시며
주님의 능력이 저희의 무능을 이기소서.
저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저희의 눈물이 미소가 되게 하소서.
부활의 능력이
저희의 삶 속에서 빛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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