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에 가장 정복하기 어려운 것,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뭐니 뭐니 해도, 우리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에 평안을 얻고 그 평안을 유지하는 방법은 모든 사람들이 배워야 하는 가장 어려운 훈련인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심란한 일을 당하신 어느 교우께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그 문제에 골몰해 있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임을 알기에 벗어나기 위해 애를 써 보는데, 잠시 벗어난 것 같다 싶으면 어느 새 그 문제에 다시 사로잡혀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불면증에 시달려 보신 분들이라면, 이 심정을 잘 이해하실 줄 압니다. 수 만 가지 생각들이 바통 터치를 해 가면서 마음을 흔듭니다. 그래서 잠이 오질 않는 겁니다. 그 상태에 있는 한 잠에 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 모든 상념들을 내려놓고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으려고 노력합니다. 숫자도 세어 보고, 그것도 안 되면 거꾸로 세어 보기도 합니다만, 마음은 잘 잡히지 않습니다. 잡으려고 힘쓰면 쓸수록 마음은 더욱 잡히지 않습니다.
마음이 흔들리고 분산되어 있으면, 마치 흔들리는 기차에 서 있는 것처럼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안정된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에 평화인데, 그것을 얻고 유지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게다가, 우리 모두는 마음의 평화를 위협하는 여러 가지의 환경에 에워싸여 있습니다. 크고 작은 일들이 번갈아 가면서 마음의 평화를 위협합니다.
다 잡은 줄 알았던 질병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나타날 때, 우리의 마음은 불안에 휩싸입니다. 은퇴할 때가지 아무 염려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직장으로부터 갑자기 해고 통지를 받았을 때, 우리의 마음은 심하게 요동칩니다. 잘 해 주리라고 믿었던 아이에게 이상이 생긴 것을 눈치 챌 때, 우리의 마음은 와르르 무너집니다. 하루 밤만 잘 자고 일어나면 또 하루 일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던 몸에 이상이 느껴질 때, 우리는 갑자기 불안에 휩싸입니다.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처럼 느낄 때, 우리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립니다. 악화되는 경제 사정 때문에 그 동안 지불한 돈을 모두 날려 보내고 집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마주할 때, 우리 마음은 심한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흔들립니다. 이토록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길에서 언제나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과제 즉 mission impossible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이야기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의 대강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어느 집에 있는 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문을 굳게 닫아걸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을 종합해 볼 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에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를 죽게 한 유대인들이. 언제 들이닥쳐 자신들을 잡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그들 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설명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가 두었는데, 예수님이 문득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기적처럼 보이지만, 부활하셔서 3차원 공간을 초월하여 계셨던 예수님에게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미가 어디를 가다가 커다란 바위를 만나면, "아, 이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때, 제가 그 돌을 집어 옆으로 옮겨 놓으면, 개미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내 앞에 있던 거대한 벽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이것은 기적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3차원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이 3차원에 묶여있는 우리에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에 질려 모여 선 자리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입을 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것은 유대인들이 나누었던 상투적인 인사말입니다. 상투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을 때는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건성으로 말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전혀 상투적이지 않은, 제자들의 마음에 깊은 안식과 위로를 주는 인사말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참된 평화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인사말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그래요! 그 평화를 좀 저희에게 주세요. 지금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마음의 평화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 가운데 나타난 사람이 누구입니까? 제자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문들을 모두 꼭꼭 걸어 잠갔는데 갑자기 그들 한 가운데 나타난 이 사람은 도대체 무엇인지! 이게 꿈인가 생신가 싶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도깨비에 홀린 것 같은 느낌에 빠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소름 끼치고 닭살이 돋아 올랐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더욱 더 두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감정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두 손을 펴서 양 손 바닥 가운데 못 박혔던 상처를 보여줍니다. 그분은 또한 옷자락을 헤쳐 창에 찔렸던 옆구리 상처를 보여 주십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분이 유령도 아니고 도깨비도 아니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나사렛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그들 가운데 오셨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고 나서 제자들이 안도의 한 숨을 쉬자, 예수님은 또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제야, 그들의 마음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든든한 평화가 자리를 잡습니다.
3.
이 이야기의 초점은 아주 분명해 보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인해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었다는 메시지입니다. 문이란 문은 모두 걸어 잠그고 피신해 있던 제자들이 그 이후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아가 목숨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을 깨닫고, 그것을 믿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면, 마음에 평안을 얻고, 그 평안의 힘으로 환난과 시험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는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쉽던가요? 처음 믿으시는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믿음의 연조가 어느 정도 되시는 분들은 다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이것은 그냥 귀에 듣기 좋은 위로의 말씀이 아닐까? 그렇게 믿고 의지하고 평안을 구하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은 요동치고 손이 떨리고 눈동자가 흔들리며 판단력이 마비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믿음이 참 좋은 줄 알았는데, 그 믿음으로 큰 시험과 환난이 닥쳐와도 멋들어지게 이겨 넘길 수 있기를 바랐는데, 작은 사건 앞에서조차 종적을 감춰 버리는 내 믿음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은 과연 진실일까?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니,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생각납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칼리지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던 성공회 신부 존 웨슬리는 1735년에 미국 조지아 주에 선교사로 가서 미개한 인디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겠다고 결심합니다. 편안한 환경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무엇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1735년 겨울, 배를 타고 조지아로 떠납니다. 당시로서는 겨울에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거센 풍랑과 싸워야 하는 고된 일이었습니다. 그는 야만적인 문화 속에서 죽어가는 인디언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정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감당하기로 결심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 겨울 대서양의 뱃길은 참으로 험했습니다. 거센 풍랑을 겨우 싸워 이기고 평안을 찾는가 하면, 또 다른 풍랑이 찾아왔습니다. 웨슬리는 점점 믿음과 용기를 잃어갔습니다. 그는 종종 죽음의 위협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기가 싫었습니다. 죽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 전까지는 그런 줄을 몰랐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꽤 좋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풍랑에 시달리면서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러 보니,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설교하고 영생을 말하며 천국을 설교하는 자신이 죽음의 위협 앞에서 혼비백산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존 웨슬리는 독일에서 온 모라비안들(the Moravians)이 드리는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모라비안은 보헤미아에 살던 한 종족의 이름인데, 이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박해를 피해 독일로 이주했던 개신교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 중 일부가 미국으로 이민하는 중이었습니다. 웨슬리가 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중에 강력한 폭풍이 배에 들이닥쳤습니다. 배가 뒤집힐 듯 흔들렸고, 갑판이 깨어졌습니다. 배 안에 있던 여행객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우왕좌왕했습니다. 웨슬리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모라비안들은 침착하게 앉아서 부르던 찬송을 계속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웨슬리는 그 모습에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느 전기 작가는 "웨슬리를 뒤흔든 것은 폭풍이 아니라 모라비안들의 표정에서 보았던 그 평안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그 때까지 그 같은 평안을, 그 자신에게서도 혹은 다른 사람에게서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웨슬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야만의 문화 가운데서 죽어가는 인디언들을 구하겠다고 나선 선교사입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친 신학자입니다. 성공회 신부요 교수요 선교사인 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두려움에 질려 있는데, 변변한 교육도 없던 모라비안들은 죽음 앞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 날 일기에, "이 날은 내가 그 동안 보아 온 날들 중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다."(This was the most glorious day which I have hitherto seen.)고 적었습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절절하게 깨달은 그 날을 그는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경험이 있었기에 그로부터 약2년 후에 웨슬리 자신도 참된 믿음을 얻었고 모라비안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평화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4.
이 이야기를 생각하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그분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써 불안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능력의 복음이요 진리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적인 죽음 앞에서조차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비밀이 이 믿음 안에 있습니다. 모라비안들이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의 믿음에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약속은 진리인데, 그 진리가 능력을 발휘하기에 우리의 믿음이 너무 적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믿는다고는 하였지만 그 믿음이 부족했고, 그 믿음이 부족했기에 그의 평화는 너무도 쉽게 흔들렸습니다. 같은 믿음처럼 보여도,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믿음이 있고, 아주 작은 일 앞에서 촛불처럼 꺼져 버리는 믿음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믿음은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에 있는 평화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진실하게 믿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에게 있었던 그 평화를 얼마나 누리고 있습니까? 존 웨슬리처럼, 우리 자신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싶지 않습니까?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마음의 평안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싶지 않습니까? 죽음의 위협 앞에서조차 눈동자에 미동도 없고, 목소리에 떨리는 기색이 하나도 없으며, 손길과 발걸음이 견고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죽음의 위협은 고사하고, 아주 사소한 일 앞에서조차 초라하게 흔들리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14:27).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인사하신 것은 돌아가시기 전에 주신 이 약속을 확인해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씀은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그 평화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있었던 그 평화는 어떤 환난과 역경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는 평화였습니다. 그분에게 있었던 그 평화는 어떤 의문과 혼란 중에서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 평화였습니다. 그분에게 있었던 그 평화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였습니다. 당시 최강자였던 가야바와 안나스와 빌라도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흔들림 없이 가게 했던 평화였습니다. 내면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그 평화는 오히려 가야바와 안나스와 빌라도의 거짓 평화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전권을 가졌던 빌라도가 무력한 죄수 예수 앞에서 떨었습니다. 권력과 금력과 군사력으로 얻은 빌라도의 거짓 평화가 예수님의 참된 평화 앞에서 무참하게 깨어진 것입니다. 그 평화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믿는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이토록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누리고 있었던 예수님도 다가오는 위협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을 겪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7절을 보면, 예수님은 앞으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미래를 내다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이 구절을 달리 번역하면, "지금 내 마음이 심히 흔들리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도 인성을 가진 분이므로 환난과 고통과 죽음의 가능성 앞에서 마음의 평화가 일시적이나마 흔들렸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가지고 계셨던 평화를 생각하면서, "아, 그건 신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나 같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불가능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동시에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도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셨습니다. 환난과 고통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분도 잠시 감정적인 출렁임을 경험하셨습니다. 우리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곧 그 흔들림을 진정시키고 다시금 깊은 바다 속 같은 평화를 되찾으셨고, 그 평화의 능력으로써 십자가의 길을 완주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있었던 그 평화가 모라비안들 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5.
아, 이 평화가 우리에게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같은 평화는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마음 속에 있던 그 평화가 너희에게 있기를!" 이 음성을 듣고 그분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오, 주님, 내 마음에 오시옵소서! 나의 주님이 되어 주옵소서.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주옵소서!"라고 고백하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그 평화가 내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감정에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감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만, 그것을 인생의 인도자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어떤 부정적인 일이 생길 때, 우리의 감정은 믿을 수 없도록 반응합니다. 작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우리를 속이려 합니다. 그 감정이 예수님에게도 있었다면, 그것이 왜 우리에겐들 없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우리 말버릇 가운데 고쳐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일을 당했을 때, "이거, 큰 일 났네!"라고 말하는 버릇입니다. 혹은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다짜고짜로 "큰 일 났어!"라고 운을 떼는 버릇입니다. 남성들도 그런 버릇을 가진 분들이 많지만, 특히 여성들에게 이런 버릇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내로부터 온 전화에서, "여보, 큰 일 났어!"라는 말을 들으면, 남편의 마음은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런데 그 뒷이야기를 들어 보면 별로 큰 일이 아닙니다. 타이어에 바람이 빠졌거나, 싱크대에 물이 안 내려가거나, 아이 성적이 조금 떨어진 것뿐입니다. 학교에 가 있는 아이가 전화를 걸어 "아빠, 큰 일 났어!"라고 말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러나 듣고 보면 그렇게 큰 일이 아닙니다.
정말 큰 일이 아니면 "큰 일 났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감정에 속고 있는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속이는 일입니다. 감정에 속으면 작은 일도 큰일처럼 보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오히려, 큰일처럼 보이는 일을 당해도 작은 일처럼 대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어떤 일을 당하여 "큰 일 났네!"라는 느낌이 들 때, 마음을 진정시키고 "아니야! 이건 분명 그렇게 큰 일이 아닐 거야!"라고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고 그분과 함께 매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리고 그 믿음이 매우 깊은 사람이라 해도, 부정적인 사건을 만났을 때, 어느 정도 감정이 동요하는 것은 피할 수없는 일입니다. 물론, 영적으로 성장해 가면서 흔들리는 회수와 정도가 점점 감소할 것입니다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에게서 인성을 제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이 들고 불안이 엄습할 때, "그래,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6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 요즈음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드십니까? 갈수록 빡빡해지는 이민법으로 인해 얼마나 불안하십니까? 경기 침체로 인해 얼마나 고되게 살아가십니까? 자녀들로 인해 밤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분들은 또 얼마나 많으십니까? 재정적인 압박으로 인해 혹은 불안한 직장으로 인해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하십니까? 자꾸만 약해져 가는 기력으로 인해 낙심 될 때가 자주 있지 않습니까? 몸의 기능이 하나 둘씩 망가져 가는 것을 목도하면서 침울해지고, 다음에는 또 무엇이 망가질까, 불안한 마음으로 몸을 살피시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 불안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면제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늘 이 시대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전염병이 불안이라는 병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실로 진실인 듯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이 마치 예루살렘의 어느 집, 구석진 방에 모여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이 일이 장차 어떻게 될까 몰라 두려워 떠는 제자들과 많이 닮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두려워 떨고 있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즉 "너희들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말씀이 진실로 우리 모두에게 절실합니다.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 있었던 그 평화가 우리에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평화를 얻기 위해, "큰 일 났다!"고 외치는 감정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요히 물러서서 감정의 속삭임에 귀 막고 우리 중에 와 계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꼭꼭 걸어 잠근 우리의 마음의 방안에도 부활의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이젠 희망이 없다!"고 속이는 감정의 소리에 귀 막고, 고요히 물러 앉아 현실에 눈 감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진실에 눈 뜨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그 일이 나를 어쩔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한다면, 그리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신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 죽음조차도 나를 어찌할 수 없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무엇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불안은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 오는 법인데, 미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을 불안해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십시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구하십시다. 그 놀라운 평화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항상 머물러 있어서, 그 평화의 능력으로써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이 세상을 이기십시다.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평화의 주님,
저희에게 평화가 없습니다.
저희의 평화는 너무나도 깨어지기 쉽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주소서.
그 어떤 일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위에
늘 서서 살아가도록
저희를 도우소서.
주님의 평화를 저희에게 주셔서
그 평화로써 세상을 이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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