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학단상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가?

새벽지기1 2016. 9. 23. 06:04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가?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교회 안에서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매우 신앙적이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는 기도가 기독교인으로서 늘 수행해야할 너무나도 당연한 신앙행위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신구약성서가 한결같이 기도를 가르치고 있으며 예수님 스스로도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기도’를 가르쳐주시기까지 한 사실을 보면 기도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독교 신앙생활에서 기도가 절대적인 요소로 자리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신앙행위에 대해서 철저하게 질문하는 태도를 포기할 수 없다. 이런 반성적 과정을 거쳐서 우리의 신앙을 정화시켜나가는 게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우선 이렇게 우리의 말문을 열어보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실까? 물론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다. 자비로운 아버지는 철없는 자녀들이 아무리 말이 되지 않는 요구를 한다고 하더라도 알아서 좋은 것을 주듯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믿고 열정적으로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소박한 마음을 갖고 기도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본인에게도 좋겠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기 때문에 나는 이런 기본적인 생각과 그런 신앙생활에 문제를 제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데 언젠가 설교 준비를 하다가 이런 신앙생활과 좀 다른 의미의 말씀을 읽게 되었다. 이사야 1장15절 말씀은 이렇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공동번역). 하나님이 외면하는 기도는 우리가 아무리 간절하게 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한번쯤 뒤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중에서 하나님은 세리의 기도만 들으시고 바리새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고 했다. 결국 이런 가르침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들으실만한 기도를 드리는 게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한국 교회의 기도에 대해서 한 마디 해 두자. 지금 우리는 “기도하라”는 말만 크게 외칠 뿐이지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기도에 대한 경고는 전혀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기도 인플레이션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기도에는 민족과 세계 평화를 위해서, 장애인이나 외국노동자 등 소외된 이들을 위한 기도도 적지 않겠지만 모든 기도가 하나님이 들으실만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심지어는 시청 앞마당에 교인들을 잔뜩 모아놓고 반(反)김정일, 반핵 구호를 외치고, 친미(親美)적 기도를 드리는 일도 벌어진다. 가족 이기주의와 자본주의와 교회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기도를 서슴지 않고 드린다. 지금 우리에게는 기도를 많이 드리자는 것보다는 기도의 본질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과 배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의 욕망에 물들어 있는 우리 자신의 신앙적 태도만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기도 드리는 우리의 언어 자체를 문제 삼는다. 칼 바르트가 하나님을 ‘절대타자’(ganz Anderer)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우리의 기도 행위에 대한 근원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만약 바르트가 언급하고 있듯이 절대타자인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 어떤 접촉점도 가능하지 않다면, 그리고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에 대한 존재유비를 제시할 수 없다면 결국 인간의 언어라는 것도 기도의 도구로서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물론 기도는 이런 언어라기보다는 그런 언어로 표현된 우리의 영적인 호소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약간 다른 관점이기는 하지만 기도 문제를 좀더 철저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의 신학개념을 인용한 것뿐이다. 어쨌든지 우리가 영적인 심연에 들어간다면 한국말이라든지 영어나 독일어 등, 이런 구체적인 언어보다는 전혀 다른 영적인 언어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어린아이의 옹알이, 어떤 영적인 깨우침 앞에서 흘러나오는 ‘아하’ 같은 탄식이 훨씬 적절한 기도일 것이다. 이런 상태는 매우 고양된 영적 세계에서 가능하며, 일상에서는 분명히 구체적인 언어가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역시 ‘중언부언’은 가장 나쁜 기도의 한 유형이다. 우리의 온 영혼이 긷든, 절제된 한 마디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영적인 긴장을 유지해야만 한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우리의 요청을 절대자 하나님께 아룀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기도라고 한다면 가능한대로 우리에게 좋은 일을 기도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문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분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흔히 부도나기 전에 기도했더니 기적적으로 해결되었다든지, 심지어는 아들을 낳기 위해서 기도했더니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간증들을 한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결국 자기를 불행에 빠뜨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이 땅에서의 일들은 절대적으로 좋기만 하거나 절대적으로 나쁘기만 한 게 아니라 거의 양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어쩌면 헛수고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거나 기도를 게을리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기도를 하되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를 염두에 두고 성령을 구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에게 실제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보다 훨씬 잘 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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