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자(Bystander)로 살지 말라!
(옵1:10-14)
◆서론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는 사람을 방관자(Bystander)라고 합니다.
한자로는 수수방관(袖手傍觀) 또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이라고 씁니다.
수수방관은 팔짱을 끼고 보고만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수(袖)자는 ‘소매 수’자로 즉 손을 소매 속에 집어넣고 있다는 의미지요.
요즘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 사람이 쓰러지더라도
청소년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더라도
큰 싸움이 일어나 심각한 사태로 치닫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냥 바라만 볼 뿐 나서지 않는 방관자가 참으로 많습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방관자의 최후>에 관한 내용입니다.
좀 표현이 그런가요? 하지만 실제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형제간입니다.
오바댜서는 그 후손들간의 비극적인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야곱의 후손은 이스라엘이며 에서의 후손은 에돔입니다.
에돔은 현재 요르단에 위치한 나라였습니다.
오바댜서는 바로 에돔의 멸망을 선포한 선지서입니다.
BC586년 이스라엘은 바벨론은 3차에 걸친 침공 끝에 마침내 함락되고 맙니다.
이 과정에서 형제 된 에돔은 '방관'했습니다.
아니 방관을 넘어 형제의 멸망에 협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간과하지 않으시고 오바댜라는 선지자를 통해 '엄중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선지서에는 심판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가 동시에 나옵니다.
하지만 오바댜서에는 에돔의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그 만큼 에돔의 죄가 중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11-13절에는 '방관'이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에돔은 형제가 멸망당할 때 '방관'했다는 것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멀리 섰던 날(방관)!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11-13)'
본문 12-14절 내용을 풀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방관하다-히브리어 '라아=지켜보다, 관찰하다, 즐거이 바라보다' 뜻입니다.
1
따라서 본 구절은 에돔이 남유다가 멸망하는 날 멀리서 관망하면서 멀리서 관망하면서 즐거워하는 악의적인 태도를 취하였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이 구절은 앞에서 나타난 '방관함'의 의미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실제 에돔 족속은 남유다가 멸망하게 되던 날
이를 기뻐하며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을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시137:7)'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입을 크게 벌릴 것'은 기쁨을 제어하지 못해 크게 웃는 것을 말합니다.
<13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에돔은 끝내 본성을 드러내어 다른 정복자들과 함께 악행을 저질럿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에돔은 마땅히 형제의 아픔에 동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복자의 끄나풀이 되어 예루살렘을 약탈했던 것입니다.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이는 에돔 족속이 바벨론의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성안에서 그 남은 것 마저 약탈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14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후, 많은 남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성을 탈출하여 각지로 흩어졌는데, 이 때 에돔 족속은 이들의 퇴로를 차단하여 남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히거나 칼에 맞아 죽게 했던 일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
이 구절은 에돔이 예루살렘 성 중에 남겨졌거나, 혹은 바벨론의 군사를 피해 숨어있는 남유다 백성을 찾아내어 바벨론에 넘겨주어 노예로 삼게 한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제가 봐도 에돔의 악행은 심판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에돔은 BC586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합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주님의 일>에 방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방관자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하나님의 일에 방관할 수 없어서 <의연히> 일어난 분들이 많습니다.
바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골리앗 앞에서 모욕당하는 하나님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17:26)“
다윗의 이 의분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때 다윗의 나이 불과 10대 중반이었습니다.
2
벌써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모욕영화 <다빈치 코드>가 상영 된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의 한 교회 목사님이 영화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했습니다.
저는 그 분이 한 말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내가 예수님 욕보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분은 예수님이 모욕당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을 이 복음을 위해 살기로 작정합니다.
그는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을 <빚진 자>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복음에 방관할 수 없어서 일어선 분들이 많습니다.
세계 각지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이 그렇습니다.
저는 여기에 모인 여러분도 그런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지난 9일 서울 마포에 있는 원룸에서 시커먼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에 격분한 20대 남성이 홧김에 불을 질렀습니다.
가장 먼저 119에 신고한 이는 이 건물4층에 살던 28살 청년 안치범 씨입니다.
자신은 안전하게 빠져 나왔지만,
활활 타는 원룸을 지켜보다 결국 다시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너무 이른 새벽 불이 난것도 모른 채 단잠을 자고 있을 이웃들을 깨우기 위해서 입니다.
실제 이웃 주민들은 잠을 자고 있을 때
누군가 초인종 소리를 듣고 탈출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모두 무사했지만 안전하게 건물을 빠져나왔지만
5층 계단에서 유독가스에 질식해 쓰러진 채 발견된 것입니다.
성우를 꿈꾸던 28살 청년 안치범 청년!
올해는 꼭 방송사 시험에 합격하겠다고 가족과 약속을 뒤로 한 채 숨을 거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청년은 이웃의 위험을 보고 자신의 위험을 보지 못한 <의로운 바보>였습니다.
안치범씨는 왜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갔을까요?
본능적으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안치범씨 덕분에 생명을 구한 누군가는 앞으로 그런 희생적인 삶을 살까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바로 이 안치범청년과 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안치범 청년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지만 영혼을 구하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시대의 위대한 청년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복음의 방관자로 살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다면
이제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일에 방관자로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3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둘째, <공동체의 일>을 방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일은 곧 <나>의 일이며<우리>의 일입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가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 DFC공동체,
학교 공동체, 민족 공동체등이 있습니다.
지금 수여대는 축제기간을 맞이해서 너겟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모두 오전에 완판을 했다고 합니다.
저도 곁에서 지켜보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어제는 아주대 진수형제가, 오늘은 아침부터 나영자매가 수여대를 도왔습니다.
오후에는 한세대 인환형제와 선일형제도 함께했습니다.
특히, 나영자매는 호객행위(?)를 가장 열심히 했습니다.
수여대의 모든 지체들과 더불어 주님의 이름으로 격려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형제요, 지체입니다.
최근 <밀정>이라는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이 영화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로
의열단과 밀정간 서로를 이용하려는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이 숨가쁘게 펼쳐지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연출자인 김지운 감독은 “누가 밀정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누구나 밀정이 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질곡을 담으려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계기로 일제시대를 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불행했던 시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과
조국을 팔아서라도 살기 위해 몸부림 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분법> 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머리속에는 늘 <독립 운동가>가 아니면 <매국노>
두 종류의 사람들만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에서는 전혀 들어나지 않았지만 제3지대에 선 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바로 조국의 국난 앞에서 꼼짝하지 않고 숨어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다음은 아주 유명한 '도베레 장군'이라는 영화 내용입니다.
나치에 저항하던 레지스탕스들이 모두 잡혀 감옥에서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저항운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잡혀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처형이 집행되기 전,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울면서 호소했습니다.
“나를 꺼내 달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저항운동도 하지 않았는데 왜 내가 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 말을 듣던 다른 레지스탕스 한 명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
전쟁이 5년이나 계속되었다.
4
수많은 동포가 피를 흘리며 죽었고, 우리의 삶의 터전인 도시가 파괴되었다.
조국이 망할지도 모르는 이 위기의 순간에
도대체 어떻게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지금 죽을 위기에 처한 것도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 즉 <방관 죄>입니다.
영화 <밀정>도 <도베레 장군> 모두 <침묵하는 자들에 대한 경종>이
또 하나의 주제요 교훈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어느 편인가?’
그리고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3지대에 서지 말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DFC공동체도 일 년에 한 두 번 행사를 합니다.
누구도 방관자로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손님으로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셋째, <이웃의 일>에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1964년 3월 13일 금요일에 뉴욕에서 일어난 실화입니다.
<뉴욕 주 퀸스 지역의 이른 새벽 공기는 춥고 축축했습니다.
캐서린 제노비스라는 한 여성이 야간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녀가 주차장 안에 차를 주차시키고 밖으로 걸어나왔을 때가 새벽 3시였습니다.
그녀는 아파트 건물을 향하여 발걸음을 떼자마자 수장쩍은 한 덩치 큰 남자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모즐리라고 신원이 밝혀진 남자가 갑자기 제노비스의 등에 칼을 깊숙이 찔렀습니다.
그녀가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그러자 동네 사람들 집에 불이 켜졌습니다.
그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집집마다 불이 켜지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이 계단 아래로 내려올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때 범인은 그 자리에서 도망을 쳤고,
몸의 여러 군데 칼에 찔린 제노비스는 몸을 이끌고 어느 서점 문 앞에 가 드러누웠습니다.
5
그러자 아파트의 불이 꺼지기 시작했고, 거리는 조용해 졌습니다.
자신의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가던 범인은
거리가 조용해지고 창문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범행을 마저 끝내기로 결심하고
칼로 다시 그녀를 난도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노비스는 다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파트에서 다시 불이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모즐리는 다시 도망갔고 제노비스는 간신히 몸을 이끌고
자신의 집이 있는 아파트 건물 복도 안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몇 분 후에 또다시 그녀를 찔렀습니다.
살인 사건은 새벽 3시 15분에서 50분까지 약 35분 동안 일어났습니다.
한 여성이 칼에 찔리고 쓰러지는 것을 창가에서 구경만 한 사람들은 모두 38명이었습니다.
교수의 부인이라고 밝힌 한 여성은 < 뉴욕 타임즈>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38명의 증인에 대해서는 그들이 마땅히 느껴야 할 도덕적 책임을 인식하지 못한 대가로 일간지 1면에 그 이름과 주소가 전원 공개되어야 한다.-
여러분! 어떤 느낌입니까?
다음은 언젠가 읽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들이 흑인 노예들을 잡으러 왔었어.
나는 가만히 있었지. 왜냐하면 나는 흑인이 아니니까.
그 다음에는 그들이 유대인들을 잡으러 왔었어.
그때도 나는 가만히 있었어. 왜냐하면 나는 유대인이 아니니까.
그 다음에는 그들이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었지.
그때 역시 나는 가만히 있었지. 왜냐하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니까.
그 다음엔 그들이 또 동성애자를 잡으러 왔었어.
그때도 나는 가만히 있었지.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니까.
마지막엔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어.
그때 나는 억울하게 잡혀 죽을 수밖에 없었어.
왜냐하면 나를 보호해줄 이웃들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 가 죽게 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의 댓가였습니다.
◆결론
성경에는 다윗과 요나단처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나
피를 나눈 형제보다 귀한 사랑을 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가인과 아벨 같은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본문에 나오는 에돔입니다.
그들은 형제(이스라엘)이 고통 당할 때(바벨론 침략) 방관했습니다.
에돔은 그래서 멸망했습니다.
에돔의 멸망은 <방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북이스라엘 여호람 왕때 아람 군대의 침공으로 사마리아가 포위 되어
심각한 식량난이 있었을 때 천대 받고 버림받던 네 명의 문등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목숨 걸고 아람진에 들어가 식량을 발견한 후 했던 말을 기억하십시오.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왕하7:9)”
그렇습니다.
예수의 제자된 우리가 해야 할 일!
그것은 침묵해서는 안 될 때 침묵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빚진 자입니다.
우리는 방관자로 살지 맙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를 짖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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