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교리해설

[라은성 교수의 쉬운 교리해설] (17)자유의지에 대하여

새벽지기1 2016. 7. 19. 07:06


타락의 선택 대가 지불하시다

 

개혁신앙에서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한 것은 인간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4세기 삼위일체 논쟁에 이어, 5세기에 교회 역사에 있었던 뜨거운 주제는 단성론, 즉 그리스도론 논쟁이었다. 이와 함께 ‘은혜론 논쟁’의 주제였던 자유의지도 뜨거운 감자였다. 이단자 펠라기우스가 억지 주장한 것에 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거의 20년에 걸쳐 반박하였다. 여기서 드러난 자유의지에 관한 설명은 종교개혁 시기에 마르틴 루터에게서 다시금 점화되었고, 17세기 초에는 개혁교회 내에서 일어난 아르미니우스파 논쟁에서 폭발하므로 자유의지에 관한 주제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기에 이르렀다. 개혁신학에 조금이라도 의문이 들거나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진 자는 누구든 이 문제를 거론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간략하면서도 분명한 설명을 개혁신앙 교리를 통해 밝혀보도록 하겠다.

⑴자유의지는 타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타락은 인간이 ‘자유의지로’ 또는 ‘자발적으로’ 불순종의 길을 택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영예로운 상태에 있었을 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탁월성을 인지하지 못했고, 신이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도록 버려두었기에 죽음과 죄에 종속하게 되었고,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벨지카 신앙고백서> 14항).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류의 최초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의지로 또 의도적으로 불순종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 질문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를 막도록 방해할 수 없었을까? 아니다! 그렇게 되면 자유의지가 아니다.

아담은 순전한 상태의 의지를 자발적으로 사용했다. 물론 그가 불순종할 것을 하나님은 아셨을 것이다. 그분이 예지하신 것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를 우리는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은 그분의 의지에 있는 비밀적이고, 신비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충돌하는 두 가지로 보이지만 그분에게는 단일한 것이다(<기독교강요> 1권 18장 1, 4항).

⑵자유의지란, 한 마디로 선택하는 능력이다.

철학자 칸트는 선의지를 강조했을 뿐 그 의지가 부패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의미는 인간이 누구의 간섭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향방은 자신에게로 늘 향하는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의지는 이성을 가르치는 것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는 임무를 갖고 있고, 자유는 형용사로서 의지에 속하여 어느 쪽이든 기울이는 것을 한다”(<기독교강요> 2권 2장 4항). 타락은 아담과 하와가 의지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 점에 관해 5세기 이단자 펠라기우스는 죄를 범하는 것이 필연적이기에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게다가 아르미니우스파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완전한 의지를 요구했다고 억지 주장하면서 구원은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고 했다(<돌드레히트 신조> 2장 거절 3).


하지만 이들은 ‘자유’와 ‘자발’을 오해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논박하면서, 칼빈은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도 자발적으로 행하게 된다”고 말한다(2권 5장 1항). 그렇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타락했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상태를 자유라고 본다면, 인간은 죄를 범할 수 없는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론(1)-타락 전의 인간의 상태’에 설명했듯이 인간은 순전한 또는 청렴한 가운데 지음 받았다(1권 15장 8항; <돌드레히트 신조> 3~4장 1항 참고). 인간은 순전하게 영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자발적으로 또는 자신이 원해서 사탄의 편에 서기로 선택한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9장 2항).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9문에서는 하나를 덧붙이는데, “마귀의 충동으로 인해 고의적으로 불순종하게 되었고 자신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도 이 능력을 빼앗기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이 마귀의 충동을 받아 자발적으로 또는 의지적으로 타락한 것이다. 그래서 의지는 “선이나 악을 행하도록 강요당하거나 또는 본성의 어떤 절대적인 필요성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는다”고 고백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9장 1항).

⑶중생은 의지의 전환이다. 인간은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율법, 행위언약 또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면 의지의 전환, 즉 중생은 인간의 힘으로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면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의지를 갱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또 그리스도께서 관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지에 순응할 수 있는 오성이나 의지를 인간이 가질 수 없다(<벨지카 신앙고백서> 14항; 요 15:5 참고). 칼빈 역시도 “율법이 명할 때 그분의 의를 성취할 수 없지만 성령의 도움으로 힘을 얻어 의지를 복종시킬 수 있다”고 한다(2권 2장 8항).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중생 또는 의지의 전환이 일어나면 “자유로이 선을 행할 수 있게 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9장 5항). 이 의미는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선을 향하게 된다는 것이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유의지는 구원과 관련된 것을 선택할 수 있었으나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편에 서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런 성향은 모든 인류에게 있음을 의미하기에 그의 범죄로 노예적 의지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보다 사탄의 손아귀에 있게 되었다. 인간 스스로 이 속박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누군가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그분이 바로 죄가 없는 인간, 즉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 되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역할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라은성 교수 기자  opinion@kid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