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 가지 뜻으로 쓴다. 새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갖는 최초의 관계는 성육신한 그리스도와 갖는 관계가 아니라 이전에 존재한 로고스와 갖는 관계다. 브루너가 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준 하나님의 계시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한다. ‘그러나 육신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에 있는 말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말씀,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과 동일시된다.’
사람의 인격을 이루는 말씀과 갖는 이러한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바르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도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해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곳에서도 존재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 그리고 사람이 그것에 반응하는 능력과 필요성은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요소다. 이 사실은 브루너의 말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사람의 존재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하나님의 일은 창조와 보존의 말씀과 일이지만, 우리가 첫 번째 일을 아는 원천은 두 번째의 일이니 곧 화해와 구속의 말씀, 영원을 밝힌 역사적 계시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하신 두 번째의 일에서 우리는 그의 첫 번째 일을 그의 첫 번째 일로 인정한다. 곧 우리는 처음부터 생명을 소유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람을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갖는 이 첫 번째 관계다. 사람이 도덕적인 책임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사람이 죄를 지을 수도 없고 무에 빠질 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이교도들이 살고 움직이며 존재한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과 뒤틀린 관계에 있을지라도.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키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람은 어느 정도 맹목적이지만 알고 있다.
브루너에게 창조 때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선물이지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이루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선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요구가 아니라 생명이다. 그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다. 최초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서술이다. 그것은 “네가 나의 것이다”라는 신적 사랑의 서술이다.
창조 때에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다. 그러기에 죄인들도 그것에 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여전히 사람은 도덕적 책임을 분별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비록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혹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의무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도덕적 의무가 무엇을 뜻하며 그것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우리는 도덕적 의무를 수행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임을 알기 때문이다. 믿음은 사랑이 단지 신적 성품이 우연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시되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은 서로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한다. 사람을 창조한 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다. 이러한 반응을 하는 것이 사람이 가진 참된 본성이다. 이 본성을 갖출 때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다. 사람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 사랑으로 반응할 수 있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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