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 이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능은, 그 자체로 판단해 본다면, 참으로 놀라운 것이지만 사악한 것이 전염되어 모든 부분에 퍼져서 우리 안에 순수한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 형상의 잔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거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진리를 알 수 없다. 더구나 하나님을 아는 것에 이르지 못한다.
일반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번개가 한 순간 크게 번쩍였으나 한 걸음 앞으로 내딛기 전에 밤과 같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의 이성은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과 하나님이 인류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지이심을 알 수 없다.
칼빈은 자연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 형상을 다루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자연을 통해 분명히 계시되었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바로 보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 눈이 열린 믿음의 사람이다. 하지만 만일 ‘아담이 의로웠다면,’ 사람은 누구나 자연에 나타난 계시를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자연신학의 타당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자연신학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연에 나타난 신적 계시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의 잔재에 바탕을 둔 자연 이성으로 세우려는 어떠한 형태의 하나님 지식의 체계도 칼빈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하나님의 신성에 관한 관념을 주었다. 하지만 종교의 씨앗이 모든 사람에게 심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음에 품거나 성숙한 상태로 자라는 사람이 없다.
칼빈은 자연인과 은혜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구분한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점차적으로 변이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의지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 다스리는 성령 하나님의 법칙이다. 성령 하나님의 다스림은 고치고 개정하며 혁신하는 것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중생의 시작은 우리의 것을 없애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 영을 넣어 주며’(에스겔 36장 26절)란 말씀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가 의를 추구하게 하도록 하시는 것이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이 되게 하는 것과 같다면, 우리 자신의 의지가 갖고 있는 고유한 모든 것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자리 잡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가 없어지는 것이지 의지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회심할 때 우리 자신의 본성에 필수적인 모든 것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새롭게 지음 받는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지가 그때 있기 시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악에서부터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칼빈에게는 이른바 ‘접촉점’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그것 자체를 칼빈이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순종하는 것으로 바뀌는 의지는 어떠한 접촉점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초자연적 은자인 ‘믿음,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웃 구제 및 의의 추구 등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모두 타락 때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담이 죄를 지은 후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약화된 이성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게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성령의 증거를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예비 조건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재능이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도 남아 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증거와 함께 그것들을 보조적인 방식으로 쓰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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