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에게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하나님을 통해 새롭게 된다. 요한복음 6장 44절의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란 말씀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말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기 위해 세상에 내려왔으며, 그러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않았는가? 그리스도는 실제로 그런 일을 하셨다. 하지만, 만일 내면적 선생인 성령 하나님이 그 길을 우리 마음에 열어주지 않는다면. 그의 설교를 통해 이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운 사람만이 그에게 온다. 성령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을 증거하고 말씀을 조명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사실이라는 것을 이성을 뛰어넘어 확신하게 한다. 이러한 성령의 특별 사역은 선택받지 않은 일반 사람들의 삶과 마음에서 하는 다른 사역과 구별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하나님 형상의 잔재와 성령의 증거를 통해 회복된 하나님 형상이 서로 대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의 것은 자연과 세상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효과적으로 증거하지 못한 반면, 뒤의 것은 선택된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효과적으로 증거한다.
성령이 선택받은 사람에게 일하는 방식은 마음에 믿음을 불러일으키어 죄 때문에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이 우리에게 새롭게 새겨지게 하고, 이러한 회복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끊임없이 향상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이 조금씩 우리 안에서 빛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형상이 아담이 하나님께 죄를 짓기 전에 사람으로서 우수한 성품을 자랑할 수 있게 하였으나 후에 손상되고 거의 파괴되었으나 이제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한 그들에게서 부분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 형상의 광채는 하늘나라에서 완전히 빛날 것이다. 하나님 형상은 선택된 믿음의 사람에게 아담에서보다 훨씬 더 큰 영광으로 빛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형상은 칼빈이 어거스틴 이후 그 어느 신학보다 더 강조한 주제다. 이 교리에 칼빈이 끼친 공헌은 어거스틴보다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칼빈 이후 하나님 형상 교리를 다룬 것 가운데 완전히 새롭고 중요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형상을 역동적으로 이해했고, 어거스틴처럼 그것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다루었다. 칼빈의 하나님 형상 개념은 어거스틴의 그것보다 더 뛰어나고, 종교개혁자들의 착상과 일치한다.
칼빈이 하나님 형상의 잔재와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회복된 하나님 형상을 구별한 것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그 구별이 충분할 정도로 분명하고 일관되게 나타나지 않는다. 구약의 하나님 형상과 신약의 하나님 형상의 관계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칼빈 특유의 선택론이 그의 하나님 형상 교리에 해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다. 그것은 구약에 나타난 보편적 하나님 형상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의 희망이 되는 신약의 하나님 형상 사이를 연결하는 실제적 고리가 그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제한된 사람에게만 구원이 제공된다고 보는 칼빈의 교리에 바탕을 둘 때 그러한 보편적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하더라도, 매우 어렵다. 어떤 사람에게 구약의 하나님 형상은 구원에 이르는 준비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것은 처음부터 저주에 이르는 준비다. 하나님 형상의 통일성을 드러내는 중간 용어가 칼빈의 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칼빈의 선택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가 보편구원론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어떤 경우에 최종적으로 좌절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마지막에 될 일을 어떻게 보든지 간에 큰 어려움이 놓여있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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