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응답하는 이러한 책임이 사람의 참된 본성이다. 이 책임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향해서만 표시되지 않는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있다. 하나님과 갖는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하나님 형상이 표현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명령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말씀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웃도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료 이웃을 보고 ’너‘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사람이 한 자아로서 존재하는 조건이다. 사람은 남과 고립되어서는 참된 사람일 수 없고, 공동체 안에서만 사람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을 보고 ’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성에 따라오는 어떤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는 조건 자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성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으니, 그것의 핵심은 창조적인 자유의 능력이나 인지적 이성이 아니라 책임의 성취인 교제다. 삼위 하나님은 그 본질에 있어서 사랑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갖는 관계에서 창조자다.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상응하는 사람의 참된 존재는 땅 위에 있는 하나님 형상으로서 동료 인간에게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다.
브루너는 사람의 ‘나와 너’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형상의 문제를 나와 하나님 관계의 경우와 같이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가령, 사람과의 관계에서 형식적 하나님 형상이 무엇으로 나타나는지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참된 인간과 구별되는 현실적이거나 실제적인 인간이 무엇인지를 거의 정의내리지 않는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브루너는 사람이 책임 있는 존재로서 사람인 한, 보편적 하나님 형상이란 하나님 앞에 서는 양보할 수 없는 지위라고 주장한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보편적 하나님 형상이란 사람이 동료 인간에 대한 도덕적 책임에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비록 사람이 법률적인 뜻에서 그 책임을 부인하거나 잘못 해석할지라도 말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지음 받은 것과 같이, 동료 인간을 사랑하도록 지음 받았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참된 의미이자 목적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나와 너’의 관계가 사람과 사람의 ‘나와 너’의 관계와 연결된다. 바로 이것이 브루너가 하나님 형상을 이해하는 데에 중심이 된다.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서 있는, 책임을 질 수 있고 지음 받은 존재로서 하나님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형상은 단지 영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몸과도 관계된다.
브루너는 창세기 1장 26절을 주석하면서 그 형상이 사람의 영혼이나 몸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 오랜 세기동안 논쟁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순전히 영적으로 인지했기 때문에 하나님 형상을 전적으로 영적인 유사성으로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주석가들의 사고가 성경적이기보다 그리스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사람은 영혼과 몸의 전체로서 하나님 형상이다. 사람의 몸의 똑바로 서 있는 자세, 아름다움, 및 얽매이지 않은 눈짓 등은 사람이 가진 영적 본성을 상징한다. 이것을 주장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몸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잘못된 사상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지음 받고 제한된 본질을 나타내는 표징이고, 우리가 세상에서 제한된 창조성과 통치를 갖는다는 것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이 점에서 브루너는 하나님 형상의 주요 자리가 아담의 정신과 마음에 있지만 그의 어떤 부분도 하나님 형상의 불꽃이 빛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보는 칼빈의 사상과 비슷하다.<계속>
출처j...복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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