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아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인가? 브루너에게 그것은 계시다. 계시는 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브루너는 그것을 세 가지로 분석한다.
브루너는 믿음이 언제나 과거에 대한 참회를 포함한다고 이해한다. 하지만 믿음과 참회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과 나 자신 사이의 장벽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장벽을 허무셨다. 그는 인류가 지은 죄 때문에 받을 저주를 자신에게 지우셨다.
사람은 자신을 심각하게 보면 볼수록 자신의 과거를 더욱 심각하게 본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과거를 우리 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보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려면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고 스스로 독립하려는 열망을 버려야 한다. 현대인은 낮아지는 것을 참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십자가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왜냐하면 죄로부터 구원에 이르는 순조로운 길이 없고 형식적 하나님 형상에서 실질적 하나님 형상으로 결코 진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다가올 때 그것은 순전히 새로운 말씀으로서가 아니라 태초에 있었던 말씀으로서 온다. 그래서 믿음이란 결코 무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와 그것의 한쪽인 믿음은 말씀과 그것의 이해의 분급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새 사람의 행위이다. 현실적으로 새 사람이 되었지만 옛 사람이 남아 있어 순간마다 죽어야 한다. 따라서 믿음은 순간마다 새로워질 필요가 있는 행위다.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그리고 믿음으로만 가지고 있는 것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날을 기대한다. 그 때에 믿음 자체는 완벽하게 될 것이고 사랑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새롭게 된 하나님 형상에 대한 브루너의 이해는 이와 같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개혁신학의 교리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여기서 하나님 형상 이해와 관련된 이른바 접촉점(point of contact)을 다루어 볼 필요가 있다.
브루너의 접촉점에 대한 견해는 1933년 이후 변하지 않아 보인다. 이 때 그는 자연과 은총에서 그것들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주장하기를,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접촉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접촉점은 형식적인 하나님 형상이고, 죄인까지도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사람이 사람인 사실이다.
사람의 인간성은 두 가지 의미에서다, 곧 말을 이해하는 능력과 책임이다. 죄도 사람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사실,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사실을 제거해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받아들이는 능력을 실질적인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단지 말을 듣는 형식적 가능성이다.
말을 듣는 이 가능성은 또한 사람이 도덕적 책임을 갖는 전제가 된다. 사람이 그러한 접촉점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오해이거나 형식적인 하나님 형상과 실질적인 하나님 형상의 혼동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하나님 형상이 파괴되었으나 형식적으로 남아있듯이, 실질적으로는 어떠한 접촉점도 없으나 형식적으로 그것은 필요한 전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게 할 필요가 없다.<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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