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아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인가? 브루너에게 그것은 계시다.
계시는 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브루너는 그것을 세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 사람은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둘째, 사람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과 그 형상에 반항하였다.
셋째, 사람의 전 존재는 본래 상태와 그것에 반하는 상태가 서로 대치되게 되었다. 이 모두는 믿음을 가질 때 받아들일 수 있다.
먼저 브루너의 창조 개념은 무엇인가?
구약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였을 때 고결한 상태였으나 타락으로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브루너는 이 이야기를 문자적인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보는 것은 초기 교회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브루너는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창조를 역사적 사실로 보는 것은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태고의 역사는 사람이 그러한 고결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 증거로 밝힐 수 있는 시간을 넘어가는 과거로 소급하려는 어떤 시도도 전혀 가치가 없다.
따라서 역사적인 의의 상태와 뒤이은 타락에 대한 믿음을 버려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브루너에게 ‘본래 상태’와 ‘창조’란 말은 인류의 경우 기원전 어느 날이나, 개인의 경우 기원 후 어느 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시편 139편에 있는 유명한 구절-시편 기자가 자기 자신의 창조를 말하는-을 인용하면서 시편기자에 관해 말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적 시작 곧 어머니의 자궁에서 임신한 것에 관해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기 자신의 본래 상태 곧 하나님의 생각, 의지 및 창조적 행위 등에 관해 알고 있다. 기독교의 창조론은 역사 이면과 위에 그리고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땅에서의 시작에 속하는 신적 기원의 교리다.’
이러한 말을 통해서 볼 때 창조 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란 다름 아닌 생명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이 생명은 기본 요소가 하나님이 하시는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따라서 본래의 의는 하나님이 순간마다 호의와 선물로 주는 생명이다. 이러한 선물과 이러한 호의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할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나 브루너는 본래의 의에 대해 다르게 이해한다. 그에게 그것은 경험할 수 있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있지 않다. 창조와 타락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창조와 관련하여 그것이 어떻게, 어디서 그리고 언제 일어났느냐고 묻는 것이 헛되듯이, 타락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창조와 타락은 모두 역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실재 이면에 놓여 있다.’
만약 이것이 그러하다면, 본래의 의는 ‘과거’의 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이 용어를 사용할 때 문자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도덕적으로 죄가 되는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결한 상태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상의 죄의 결정에 ‘앞서’ 타락에 의해 하나님을 반역하게 되었다.
만약 이것이 그러하다면, 본래의 의의 선물은 다르게 이해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에 주신 선물뿐만 아니라 우리 존재의 바른 반응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은 우리가 한 때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과 조화를 이루었으나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이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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