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그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형상을 구약성경의 고정적 개념에서 벗어나 행동으로서의 하나님 형상,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존재로서의 하나님 형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이다.
브루너의 논증에 따르면, 구약성경의 하나님 형상 개념과 대조를 이루는 신약성경의 하나님 형상 개념의 전제는 사람이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회복해야 하며, 하나님 형상으로 새롭게 되고 완전하게 될 때 그리스도가 하는 모든 화해와 구속 사역이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형상의 두 개념을 연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경에는 그 두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조화시키거나 연결시킬 수 있는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다. 바로 여기에 그것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조직신학적 과제가 필요하고 중요하다.
브루너가 지적하는 문제는 다음 세 가지다.
첫째, ‘타락한 사람의 인간성이 갖는 신학적 중요성이 무엇인가? 이 물음은 또한 하나님 형상의 관점에서 구약성경의 하나님 형상은 무엇인가고 표현할 수 있다.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구약성경 기자가 창세기 1장 26절의 용어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실재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둘째, 보편적 하나님 형상과 하나님이 의도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게 된 사람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물음 역시 ‘구약성경의 하나님 형상과 신약성경의 하나님 형상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형태로 나타낼 수 있다. 셋째, 이것에서 비롯되는 종속적인 물음은 접촉점에 대한 질문이다, 곧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려면 사람에게 본래적으로 접촉점이 있는가 아니면 그러한 접촉점이 전혀 없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브루너는 어떠한 답을 주는가?
브루너는 하나님 형상이 타락한 사람에게서는 완전히 사라졌다는 견해와 하나님 형상의 잔재가 남아있다고 하는 견해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제시하는 답은 사람이 갖고 있는 본래의 하나님 형상이 없어졌고, 본래부터 갖고 있는 의와 그것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선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행하거나 하려고 하는 가능성, 따라서 결과적으로 의지의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브루너에 따르면, 사람은 죄인으로서도 본래는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 비록 현재는 그 하나님 형상에 반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 형상과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때 그것은 비유적 표현이다. 사람의 전 존재를 결정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죄 때문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틀려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닌 때가 없다. 다만 사람이 지는 책임이 사랑의 삶에서부터 율법아래에 있는 삶으로 바뀐 것일 뿐이다.
바로 이것이 구약성경의 하나님 형상 곧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 죄를 지은 존재다. 사람은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하나님과의 대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서는 본래의 의로 돌아갈 수 없고 따라서 구원에 이를 수도 없다.
브루너는 말하기를, “사실상 우리는 사람이 가진 하나님 형상을 두 가지 뜻으로 말해야 한다. 그것은 형식적 하나님 형상과 실질적 하나님 형상이다.” 앞의 것은 창조 때 사람이 가진 우수성 곧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지니도록 사람을 지었다는 사실에 기초한 지위를 뜻한다. “그 형상을 지닌 존재로 부름을 받은 것은 죄 때문에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의 전제이고, 우리가 짓는 죄 자체가 그것에 대한 생생한 증거이다.” 개념적으로 하나님 형상을 둘로 나눌 수 있다. 형식적으로 하나님 형상은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았다.<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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