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67)

새벽지기1 2016. 6. 19. 22:27


실질적으로 하나님 형상이 파괴되었으나 형식적으로 남아있듯이, 실질적으로는 어떠한 접촉점도 없으나 형식적으로 그것은 필요한 전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게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그러한 능력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능력의 전제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 자체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는 능력 곧 믿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그러한 방식으로 듣게 하는 능력을 갖게 한다. 그러한 접촉점이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결코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요컨대, 브루너에게 남이 이야기 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데 반드시 있어야 할 전제이나 그것에 추가하여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하나님의 내적 증거가 필요하다. 말씀을 듣는 능력은 결코 하나님의 계시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어떠한 공헌도 할 수 없다. 말을 듣는 능력은 사람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창조의 은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갖는 도덕적 책임과 하나님 앞에서 지는 죄의 책임의 전제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 토대 위에 믿음의 건조물을 세울 수 있는 전적으로 온전한 믿음과 지식의 요소가 없다. 이것은 마치 죄인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는 의로움을 준비할 수 있는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4년 후 1937년에 브루너는 접촉점이란 사람이 가진 것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지배력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것, 우리의 외적인 태도, 우리의 외적인 청취, 우리가 논리와 문법을 이해하는 능력, 우리의 이성적인 인격적 존재, 다른 무엇보다 특히 그것의 중심인 우리의 책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접촉점이 만들어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가장 큰 저항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율법주의적으로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저항이 마침내 깨어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고 고백할 때까지 말이다.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언제나 풀기 어려운 신비다.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우리 편에서는 수동적이지 않은 믿음의 행위다. 그것은 우리의 전 인격이 관여하는 유일한 행위다.


이제부터 칼 바르트(Karl Barth)가 이해하는 하나님 형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사람이 갖고 있는 하나님 형상에 대한 칼 바르트의 이해는 그의 교회교의학 3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하나님 형상 이해는 두 초기 단계를 거친 것이기 때문에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것을  짧게 다루고 지나갈 필요가 있다.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바르트는 사람이 본래 상태에서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 아이가 엄마의 태에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엄마와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모든 것이 타락 사건 이후로 잃어버렸다. 죄는 사람이 하나님과 직접적인 통일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영과 자연, 관념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영혼과 육체 등의 다양한 대립은 죄의 결과다. 후에 그의 사상의 두 번째 단계에서 바르트는 본래의 의의 상태와 하나님 형상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로마서주석에서 ‘하나님 형상’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본래의 의에 대해서는 더 이상 다룰 필요가 없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