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인성을 이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가 갖고 있는 인성은 그리스도의 그것과 다른 것이 되고 만다. 이 모든 것은 바르트가 사람의 본성을 사람이 다른 사람과 갖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갖는 관계에서다루는 것이다. 바르트는 모든 사람이 갖는 인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과 만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브루너가 가정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반 계시 차원에서 성육신하지 않은 로고스를 통해 사람이 하나님과 갖는 관계를 규명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 바르트의 인간론이 갖는 특징이다.
바르트가 보기에 사람이 하나님과 관련을 맺는다면,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을 성육신한 아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관련을 맺는 존재라고 정의해야 한다면, 그리스도가 태어나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사람이 아닌가?
여기서 바르트는 그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개념을 사용한다. 하나는 선택의 개념이다. 사람의 존재는 그가 존재하기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한 선택에 의존한다. 오늘 우리가 사람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오래 전에 우리에 관하여 숙고하고 그리스도와 복스러운 연합을 이루도록 계획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비록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의식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저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내 형제다.’
하지만 다른 많은 문제점이 있게 된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선택한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관련을 맺는다면, 과거에 살았던 사람이나 오늘날 복음을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러한 선택을 전혀 알 수 없다면, 그러한 사람들이 분명히 느꼈고 느끼고 있는 도덕적 의무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들이 그러한 의무감을 느꼈고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바르트는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갖고 있는 의무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바르트는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에 관하여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한 의무를 마땅히 치룰 초월적 실재나 인격을 그들이 인지했다는 것은 하나의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이방인이 하나님을 아는 문제에 대해 바르트는 명확하게 밝혀주지 않는다. 그의 교회교의학에 보면, 그의 사고의 주된 흐름을 나타내는 구절이 있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계시 밖에서 부름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책임은 자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책임이다.‘ 이러한 입장은 너무나 역설적이기에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바르트의 주장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에게 실제적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의 전 삶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포함한다.
바르트는 피조물과 인류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본다. 하지만 다른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어떤 다른 피조물이 하나님을 찬양할 책임이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복종만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께 구속하고 복종시키며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이 성육신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계시를 통해서 알려질 수 있다면 시간과 공간 상 그것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실제적 인간이 될 수 없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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