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소외된 개인이 아니라 교회의 신부인 교회의 구성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믿음으로 그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형상이고 그는 하나님 형상이지만 홀로나 그의 교회와 분리되어서가 아니다. 그는 또한 그에게 속한 여자와 더불어 곧 구속 받은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 형상이다.
이렇게 남자가 여자와 갖는 관계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갖는 관계의 비유다. 바르트는 이 추론의 주제가 어떤 존재 혹은 능력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그것은 로마 가톨릭이 사람이 갖고 있는 하나님 형상을 이성의 능력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두 절대적 관계 곧 남녀의 관계와 사람이 하나님과 갖는 관계를 비교하면, 첫째 것은 자연에 속하는 것이고, 두 번째의 것은 은혜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 것은 두 번째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간의 교제를 나타낸다. 따라서 남자가 여자와 갖는 사귐 혹은 사람이 그의 친구와 갖는 자연적인 교제는 간접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나타낸다. 이러한 하나님 형상은 보편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관계가 그리고 있는 것과 다르게 사람들의 눈으로 대략 볼 수 있다. 그것은 죄 때문에 감추어져 있거나 전적으로 파괴되지 않았다.
바르트의 하나님 형상 이해는 이전에 살펴보았던 브루너의 그것과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가? 먼저 그 둘은 다음 점에서 놀라운 정도로 일치를 이룬다. 첫째, 하나님 형상을 고립된 자아에서가 아니라 동료 이웃 및 하나님과 갖는 실제적 관계에서 이해한다. 둘째, 하나님 형상은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그것은 죄 때문에 파괴되지 않는다. 브루너에게 보편적 하나님 형상은 형식적 하나님 형상, 곧 구약의 하나님 형상이다. 사람은 동료 이웃과 갖는 관계와 하나님과 갖는 관계에서 하나님 형상을 갖고 있다. 바르트에게 역시 하나님 형상은 그 두 관계에서 보편적이다. 하지만 남녀 관계에서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셋째, 하나님 형상을 자연 신학의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 하나님 형상은 자연인의 직관이나 내적 반성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넷째, 하나님 형상을 기독론적 관점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다음 점에서 그 둘은 서로 다르다. 첫째, 브루너는 사람이 일반 계시 곧 창조에 나타난 계시를 통해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말씀 곧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빛과의 관계다. 사람을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관계다. 그것은 비록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계시 밖에서는 바로 해석되거나 이해되지 않지만, 사람이 책임을 갖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러한 관점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것은 이와 같은 이른바 말씀과의 관계 곧 사람에게 순종하거나 불순종을 선택할 자유를 허용하는 관계가 사람이 죄를 저지를 가능성의 근거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기 때문이다. 둘째, 브루너는 창조에 나타난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사람은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고 본다. 이 자유는 아담의 타락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비록 사람이 죄를 짓지 않을 자유나 능력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지만, 대안적인 선택을 할 능력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하지만 바르트는 그러한 자유에 어떠한 신학적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 그에게 살펴볼 가치가 있는 자유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할 자유뿐이다.
셋째, 브루너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형상을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한다. 하나는 형식적 하나님 형상 곧 구약의 하나님 형상이고, 다른 하나는 실질적 하나님 형상 곧 신약의 하나님 형상이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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