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추상 개념을 만들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이 단지 화학적 과정이 지속되는 몸, 심리적 과정이 일어나고 있는 육체적 존재 및 논리 법칙을 따르는 이성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재하는 사람은,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역사적 존재다. 하지만 역사적 존재는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결정을 해야 하는 존재다. 또한 그러한 대면은 성육신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으로 국한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이 반드시 사랑과 순종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어떤 재능과 은사를 가지고 있는 한 불가피하게 하나님 앞에 서 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반응해야 한다.
사람의 본성의 국면을 다루는 여러 학문이 신앙의 직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중요한 사실들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과 갖는 인격적 관계가 더욱 본질적이다. 사람은 독립적이지 않고 하나님께 의존적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이 점을 브루너가 잘 밝혔다, ‘사람이 하나님과 갖는 관계는 그의 이성의 한 기능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그의 이성이 그가 하나님과 갖는 관계의 한 기능으로 보아야 한다. 책임은 합리적 인간에게 하나의 속성이나 첨가물로 부가된 것이 아니라,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목적으로 사람에게 처음으로 심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는 존재다. 정치학은 사람을 권력 의지를 갖는 존재로, 생물학은 신진대사 작용을 하는 존재로, 철학은 사람을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존재로 각기 본다. 이러한 규정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의 본질의 여러 국면이다. 하지만 믿음을 갖고 보는 것이 일반 학문의 인간의 본질 이해보다 더 깊은 통찰의 결과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이 갖고 있는 많은 기능을 다른 동물도 갖고 있다. 하지만 도덕적 책임은 사람만이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 때문에 도덕적 책임이 다른 어떤 기능보다 더 실제적이고 중심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믿음에 바탕을 둔 판단은 하나님과 사람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이 하나님과 특별한 방식으로 대면하는 것과 같이, 사람은 또한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되어 있다. 실제적 사람의 존재는 특별한 방식으로 그의 참된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는 두말 할 것 없이 다른 피조물과 어떤 면에서 비슷한 것이 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은 사람의 실제적 존재의 본성을 끊임없이 이 땅에 있는 다른 어떤 피조물과 나눠가질 수 없는 특별한 운명에 비추어 본다. 이 운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과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이러한 운명에 비추어서 볼 때에만 현실적으로 또한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바르트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은 그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 형상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밝히지 않는다.
성경적 의미에서 보편적 하나님 형상은 ‘나와 너’의 대면 관계다. 이것은 두 차원이 있다. 하나는 사람과 하나님의 대면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과 동료 이웃의 대면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이중적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사람이기도 하고 죄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면 관계에 있는 존재를 아주 형식적인 방식으로,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나 사람이 하나님과 동료 이웃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과 관계없이, 검토해야 한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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