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71)

새벽지기1 2016. 6. 23. 08:59


이러한 어려움은 바르트가 두 번째 개념을 끌어들일 때 더욱 명확해진다. 바르트에게 실제적인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 여기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을 듣지 않거나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말씀을 듣는 것은 믿음으로 듣는 것이고, 말씀을 기쁘게 순종하는 것이 따른다. 그러나 외부의 귀로 복음의 선포를 듣고도 그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실제적 사람이다. 그러면 이들은 인간성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인가? 바르트가 인정하는 대로 사람의 하나님 형상이 보편적인 것이라면, 그들은 어떻게 사람일 수 있고 하나님 형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바르트는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의 논증에 따르면, 죄는 사람의 본성을 크게 감출 수 있어도 그것을 파괴시킬 수 없고 비뚤어진 형태로 재현할 수 없다. 따라서 사람이 실제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은 나타난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모습이다.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그러한 존재로, 곧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반응하는 존재로 보신다.
죄가 사람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 아닌데 실제로 생겨났고, 그러므로 은혜가 역시 사람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 아닌 데도 사람의 참된 존재를 드러내고 완전하게 하는데 필요하다.


이러한 주장은 실제의 인간과 참된 인간을 혼동시키는 것에 틀림이 없다. 신학적으로 볼 때 참된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형상이 새롭게 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러한 것이 참된 인간이 아니라 실제의 인간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그가 실재하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다. 이러한 주장은 죄를 논리적으로 극악무도한 것이 되게 하는 위험이 있다. 바르트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불경건함은 결과적으로 인간 존재의 가능성이 아니라 존재론적 불가능성이다.’ 존재론적 불가능성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생각임에 틀림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바르트의 입장에서부터 받아들이기 아주 어려운 추론을 끌어낼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를 들면, ‘하나님 앞에서 갖는 책임을 자유로운 가운데서 다하는 것은  그가 피조물로서 존재하는 방식이다. 사람은 실제로 선하고 악하지 않다. 죄까지도 이것을 바꿀 수 없다. 비록 실제의 인간이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하더라도. 우리가 그의 흔적을 우리 자신과 남들 및 전 인류 역사에서 찾을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그가 잃어버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실제의 인간이 누구이고 어떤 모습인지를 알 수 있다.’ 참된 인간이 아니라 실제의 인간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면, 비록 그러한 모습을 우리에게서나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지만,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의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 더불어 살아간다.


이제 사람이 가진 하나님 형상을 사람이 가진 두 번째 관계 곧 동료 이웃과의 관계에서 살펴본다.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있고 죄를 짓는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과 신적인 운명사이에 어떠한 절대적인 이원론이 있을 수 없고 이 둘 사이에는 적어도 조화되는 것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면 사람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
신학적 인간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헌신하였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 형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하나님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찾아볼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서 죄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의 구속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