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3권 1장도 그러한 형식 관계 이상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바르트가 말하는 이 사람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수 있고 하나님과 자연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존재다. 후에 바르트는 하나님이 창조자로서 사람에게 열려 있고, 하나님에 반응하는 존재가 하나님께 열려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요컨대, 여기서 하나님 형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간주되고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 형상은 죄로 가득 찬 세상에 살아가는 인류에게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하나님 형상을 갖고 있다. 따라서 바르트는 구약성경적인 하나님 형상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를 전적으로 피해가고 있다. 루터처럼, 바르트는 사실상 신약성경적인 하나님 형상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죄 지은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하나님 형상에 대한 신학적인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루터는 타락 이래로 하나님 형상이 죄 지은 사람에게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바르트도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곤 하였다. 이 견해는 구약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증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결론적으로 바르트가 사람의 본성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정의내리는 것은 죄 지은 사람이 하나님과 갖는 관계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바르트는 구약성경이 밝히고 있는 하나님 형상 곧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하나님 형상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하였다. 바로 여기에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성품을 설명하는 두 가지 신학적 개념을 살필 필요가 있다. 하나는 칼빈의 하나님 형상의 흔적이란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브루너의 형식적 하나님 형상의 개념이다. 둘 다 타락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연결되는지를 설명한다. 칼빈은 사람이 본래 가진 성품의 흔적이 오늘날 사람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본다. 반면 브루너는 하나님 형상의 형식은 남아 있으나 그것이 본래 갖고 있던 내용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이제 두 개념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칼빈은 사람이 본래 받은 성품의 흔적이 아담의 타락 후에도 남아 있고, 이것이 인간성을 구성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브루너는 이러한 관념이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위험스러운 것으로 본다. 하나는 사람의 본성이 죄를 지은 후에도 타락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람을 너무 긍정적으로 본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간과할 만큼 사람을 너무 부정적으로 본다는 점이다. 그러나 칼빈은 사실상 이러한 위험들의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인간론은 브루너 자신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
칼빈은 사람의 본성의 어떤 부분도 죄 때문에 손상되지 않았다고 여기는 위험에 빠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볼 때 사람이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아마 그가 말한 구절을 보면 그러한 착오를 암시하는 것이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해충에는 사람이 갖고 있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형상이 지워져버린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죄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마귀의 손에 붙잡혀서 그것에 지배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소유가 되었다. 마귀가 우리의 왕자다.’(칼빈, 욥기 설교 2장 1절이하).
브루너는 칼빈의 하나님 형상의 ‘흔적’ 대신에 ‘형식’과 ‘내용’이란 용어를 쓴다. 브루너에게 본래의 하나님 형상의 내용은 타락 이후 완전히 잃어버렸지만, 그 형식은 조금도 영향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바르트는 브루너가 타락한 사람이라도 형식적 하나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반박한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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