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79)

새벽지기1 2016. 7. 2. 10:38


우리가 하는 죄의 결정과 반응에서 그리고 우리가 하는 다른 결정의 이면에 있는 신기한 결정에서 우리는 본래의 의를 잃어버렸다. 타고난 자질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 요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선물을 본래의 의로부터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그 의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희망하는 의는 존재론적으로 단지 선물뿐만 아니라 반응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복을 받은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비추는 거울이다. 이 반응이 우리의 타고난 자질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의 반응의 필요조건이 되는 선물일 뿐이다. 타고난 자질이 본래의 의라면 그것이 신약성경이 뜻하는 하나님 형상이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하나님 형상은 본래의 의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형상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다, 사실상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멀어져 갔다.


그러면 구약적인 의미의 하나님 형상을 사람이 자연적으로 타고난 본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결론 낼 수 있는가? 
구약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형상은 사람이 자연적으로 타고난 본성에서 찾을 수 없다. 자연인이 깊이 사고하면 그가 갖고 있는 재주와 능력이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자신을 넘어서는 것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능력이 자신을 하나님과 연결시킨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는 통찰을 갖지 못한다. 이것은 자신의 자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그 사고 행위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 기준에 포함된다는 사실의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질 자체가 하나님께 거역하는 행위에 의해서 더 나쁘게 변한다. 사람이 날마다 저지르는 죄는 영적 자질을 변하게 하고 떨어뜨리며 행동의 자유와 선택을 제한시킨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다르게 다루듯이 우리도 그들을 다르게 다룬다. 서로에게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반드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흔적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물로 주신 자질이 만약 죄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본래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보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적은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지 않는가? 만약 로마서 1장의 논증이 이것을 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면전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붙들어 주신다. 우리의 자질은 비록 죄에 의해 감해졌을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여전히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도록 할 만큼 충분하다. 따라서 우리가 갖고 있는 타고난 자질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계속하여 하나님을 닮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행위다.


만약 의지에 바탕을 둔 행위로 하나님이 주시는 창조적인 선물에 반응하고 우리가 하는 결정으로 우리 자신을 세상에 드러낸다면, 그곳에서 또한 하나님 형상을 찾을 수 있는가? 그와 같은 결론을 내리는 방식에는 한 가지 어려움이 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믿음을 떠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내리는 결정은 어느 것이든지 어느 정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형상은 자연인의 결정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 없다.

 

하지만 넓은 뜻에서 하나님 형상의 증거를 사람이 하는 모든 결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응하는 자질로 존재하게 하는 창조적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타고난 보편적 자질은 사람이 그가 내리는 결정에서 하나님께 답할 수 있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의 면전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인간 존재는 우리를 사랑하기도 하고 우리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생명이다.
그러나 믿음의 눈은 사람이 살아가는 진정한 목표와 의미가 구원이라는 것을 본다.<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