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하나님 형상은 우리의 인간성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다. 이 하나님 형상은 우리가 타고난 자질에서 볼 수 있고 우리가 하는 반응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그와 같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그것이 우리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거나 더 이상 하나님이 값없이 주는 은혜의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 우리의 생명을 우리에게서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이 지속되는 것은 하나님의 인내가 한계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과 피할 수 없는 책임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보편적 하나님 형상을 갖고 있다. 비록 사람이 하는 반응의 형식이 무한정 변할 수 있을지라도, 이 책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 형식적 형상이 구약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형상이다.
그동안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편적 하나님 형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 하나님 형상이 동료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칼 바르트는 사람이 이웃과 갖는 나와 너의 관계를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람이 타고난 보편적 자질이 다음 네 가지 윤리적 내용을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첫째, 이웃을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이웃에게 말하고 그의 답을 들어야 한다. 셋째, 이웃을 도와야 한다. 넷째, 이웃에게 이 모든 것을 기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성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인간성이 그러하다면 사람은 지상천국에 있는 것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사람이 이러한 인간성을 부정하고 잘못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신의 본성에 따라서 어느 정도 일관되고도 완벽하게 살아갈 수 있으나, 인간성 역시 아주 사라지지 않으면서 불건전하고 혼란스러우며, 뒤틀리고, 파괴되며,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이러한 이해는 한 가지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본성이 사람이 저지른 죄까지도 파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것은 사람이 하는 행동에 의해서 악한 성품으로 변할 수 없다. 따라서 사람의 인간성은 본래대로의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으나 사람이 존재하는 근거 형태다. 그렇다면 그것은 모호하고 흐린 것이며 쓸모없는 것인가? 이것이 답일 수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하나님 형상은 행위, 봄, 들음, 도움 및 기쁘게 행함의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다면 추론할 수 있는 것이란 오직 그것들을 발생시키는 본성을 잃어버렸거나 손상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능력이 은혜와는 별개로 사람의 본성 안에 존재한다고 추론한다. 그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 받으려면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나눠 가져야 하고, 만일 이 타고난 자질이 적어도 이러한 것들이 수반되지 않으면 사람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많은 사람이 구원 받기 전에 이러한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볼 때 이러한 해석이 인위적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하지만 바르트의 견해가 시사해 주는 것은 비록 이러한 능력이 있다는 증거가 없지만 그 능력 모두 사람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틀림없이 사람의 본성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자주 사람이 천성적으로 타고난 자질이 지혜롭고 좋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크게 드러내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어둡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사실에 직면할 때 정직하지 못하거나 하나님이 좋게 창조하신 것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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