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그들은 하늘로부터 어떠한 빛을 받지 않은 채 살다가 죽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찾으시고, 그의 백성과 함께하려고 하며, 마침내 사람의 성품을 입고 사람을 위해 죽으신 은혜로운 하나님이 아니거나, 그의 백성이 의지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만약 악이 하나님의 능력에 우세하여 하나님의 선을 완전히 망가뜨린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일반 계시는 신구약 성경이 분명히 증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신론이나 인간론에 필요하다.
이처럼 성경적 인간론에는 일반 계시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신학이 정당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자연인의 이성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체계를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많은 종교는 조물주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그 종교를 통해서는 창조 질서를 통해 자신을 밝히신 하나님을 오류 없이 바르게 알 수 없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신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만 종교가 왜곡된 진리를 말하고 거짓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일반 계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사람이 바른 자연신학의 체계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브루너의 로마서 1장 주석은 설득력이 있다, ‘이 장은 한 때 있었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하나님 지식의 가능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여전히 하나님 지식의 현재적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 하나님 지식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식은 죄의 결과 곧바로 환상으로 변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 지식으로서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죄 때문에 우상숭배로 변한 지식이다.’
사람의 마음에 끊임없이 번뜩이며 스치는 이러한 하나님 지식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고, 사람이 누구나 갖는 도덕적 책임의 근거로서 필요하다. 이것이 로마서 1장이 가르치고 있는 것 곧 자연인의 마음에 번쩍이는 참된 하나님 지식이다. 1장 21절은 기록한다,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이교에서 회심한 사람의 경험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무서운 것에서 벗어나 믿음을 가진 사람이 많다. 한 오스트리아 원주민이 고백하기를, ‘나는 이백만의 귀신에서 벗어나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에게 말씀하셨으나 나는 이해하기를 거절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자연신학은 정당화될 수 없다.
맹목적 우상 숭배 면에서 어떤 종교는 다른 것보다 그 정도가 덜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자연신학의 체계는 다른 체계보다 덜 맹목적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신학의 정당성을 받아들인다면, 이 땅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보편적으로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리고 도덕 명령의 본질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 너무나 많은 이유를 밝히기 어렵다. 자연신학은 또한 보편적 대면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그러면 사람이 불순종에서 벗어나 믿음을 가질 때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인가? 앞서 우리는 사람이 본질이 타고날 때부터 반응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제 이러한 사람의 본성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하지만 먼저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고,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존재를 지속하게 하며 그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하나님의 대면 행위를 규명해야 한다.
따라서 다룰 것은 다음 네 가지다, 곧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대면 행위, 사람의 반응 및 사람의 타고난 본성 등이다.
첫째, 사람이 믿기 시작하는 때다. 하나님의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의 목적이다, 곧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참된 진리를 알고 구원받게 하려고 한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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