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형식적 하나님 형상 개념은 ‘계시를 받아들이는 능력’을 뜻하는 것인데 이것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는 원칙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르트는 창조 은혜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사람의 인간성을 철저히 중요하지 않은 것이든지 아니면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잘못을 저지른다. 사람이 죄에 있으면서도 사람이 계속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창조의 은혜다. 그리고 이 은혜의 목적은 사람이 계속 하나님 면전에 있게 하고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나눠 갖게 하는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브루너의 형식적 하나님 형상의 개념은 일리가 있다. 따라서 사람이 본래의 의의 상태에 있든지 아니면 죄인으로 있든지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 면전에 있고, 그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제부터 사람이 갖는 타락한 인간성의 본성이 무엇이며 그것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갖는지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 논의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에 초점을 둔다. 바르트의 보편적 하나님 형상 개념이 신빙성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성경적 가르침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브루너에 따르면 이 우주에 있는 피조물 가운데 서로 다른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동전에 형상이 찍혀 있듯이 본성이 그것에 찍혀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은 창조자의 손에서부터 완전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있어야 할 모습으로 있고, 비록 자연적 발전의 과정을 거칠지라도 그러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첫째,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 있는데 그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자신만이 갖는 특유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사람은 ‘결정을 하는 존재’다. 심지어 죄인이라도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심리적 혹은 이성적인 대상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죄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내포된다는 것을 뜻한다.
죄는 결코 어떤 자질이나 실체가 아니다. 죄는 행위다. 사람이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행위와 사물이 있는 것으로서의 행위는 어떤 면에서 비슷할 수 있으나 존재 방식을 나타내는 ‘이다’라는 말을 두 경우에 똑 같이 쓸 수 없다.
둘째, 사람의 존재 방식이 하나님의 창조적 부름에 반응하는 행위이지만 사람의 존재는 행위나 관계로 한정되지 않는다. 사람의 존재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행위로 그리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면을 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실체다.
실존주의에 영향을 입은 신학자들은 때때로 사람의 존재가 행위에 지나지 않고, 만일 우리가 그것을 실체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사람의 인격을 오직 사물에 대한 인간의 생각에 맞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브루너는 이런 사고를 따르지 않는다. 그에게 사람이 갖는 다른 동물과 다른 특징적 모습은 모든 순간에 결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든 인간 이하의 존재 곧 자신만을 위하는 존재와 대조된다. 그러나 사람은 동시에 신적인 존재와 대조를 이룬다.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라 “응답하는” 반응을 보이는 존재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신적 존재의 대응자로 둔 피조물이다. 곧 하나님께 대답할 수 있고, 오직 이러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하거나 그것을 파괴하는 하나님의 대응자다.
물론 브루너는 사람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거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연히 부가될 수 있는 실체라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정말로 실체적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본래 대조하고자 하는 것은 실체와 행위 사이가 아니라 인격과 사물 사이 곧 인격 실체와 사물 실체 사이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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