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산상수훈

산상수훈 (3)

새벽지기1 2016. 6. 2. 12:53


산상수훈 03 / 마 5:17-20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당신의 오심이 하나님의 은혜롭고 의롭고 복된 통치로 우리 모두를 부르고 있는 것이라고 전파하십니다.
그래서 앞에서 본 팔복에서 보는 바와같은 어떠한 조건, 여하한 형편에 있는 자라도 이 나라의 영접된다는 것, 환영을 받는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자신을 복속시키는 순종하는, 그래서만 비칠 수있는 책임을 진다고 얘기합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이 나라로 초대를 받고 복을 약속받는 것이 순전한 은혜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근거한다고 해서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 책임도 없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이 책임은 20절에 있는 바와같이 서기관과 바라새인보다 더 나아야하는 의를 수행하고 책임져야될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 하나님의 통치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해지는 의가 무엇일까요.
이게 오늘 우리가 살펴봐야 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의 책임이며 또 그 부르심의 내용이라는 것,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율법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충돌하시는 예수님을 자주 만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분노와 그 질책이 복음서에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가장 큰 핵심은 이 율법이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는 것이 그 목적도 내용도 아니다 하는 문제이죠.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사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같이 어느 계명이 제일 큽니까? 라는 질문에 첫째는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 라는 예수님의 답변에서도 드러납니다.
율법은 결단코 자기증명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으며, 타인의 이익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라는 요구가 등장하고 또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왜 이 문제를 실패했을까, 오늘날 우리 모든 신자들의 신앙실천의 현실속에서도 왜 우리는 성공보다 실패가 많은가 라고 한번 물어야됩니다. 로마서 7장 14절로 가시죠.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또는 행할 능은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 곤고한 사람은 우리 모든 인류입니다. 모든 자연인들 입니다.
모든 우리 기독교식으로 표현을 하면, 죄인으로 태어나는 모든 자연인들은 옳은 것을 알고 옳은 것을 소원하되,
옳은 행실을 행할 능력은 없는 현실에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율법은 선하고 율법은 신령한 줄 알고 원함도 있지만 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이룰 수 없는 인간들의 처지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것은 분명 앞에 있는 24절의 대한 답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에 대한 답으로 예수가 우리를 건져낸다 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반절이 그 앞의 현실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소원하고 있지만, 알고 있지만 행할 수 없는 나에게 예수만이 해답이 되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8장에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라는 위대한 선언이 나오고 이런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결국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케 하려 오시고,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나라로 부름을 받는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율법을 성취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보통하는 표현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은 능력 주시는 예수 그리스로로 말미암아 율법을 이룰 수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대로 예수를 믿고 소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현실은 아직 예수가 등장하기 전에 율법의 의로운 것을 알고 있고 그래서 그것을 이루기 위한 소원이 있지만 이루지 못했던 자연인들의 모습과 방불한 신자의 현실을 현실속에서 늘 만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문제이죠. 이걸 구체적으로 오늘 다 설명하는 것은 좀 버겁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중요한 내용은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율법을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신앙적인 승리, 예수 안에서 시행되는 하나님의 통치의 신민이 되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 크죠. 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자녀로써 가지는 어떤 특권, 또는 어떤 식의 특권이 우리로 하여금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이루지 못했던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는 더 보편적인 표현으로 참다운 구원을 우리에게 결과 시킬까요! 그것이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그랬지만 우리는 세상이 예수를 믿는다는 문제에서 가장 크게 예수 믿는 문제를 오해하는 문제가 예수 한 분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도 인류는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도덕선생으로 보거나 무슨 인류애의 위인으로 보거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
이렇게는 얘기를 해도 우리 모든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고 하나님과 화목시킨 구세주로 하나님으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우리가 밖에 나가 믿지않는 사람들과 어쩌다 신앙의 문제를 같이 주제로 해보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표현을 이렇게 합니다.
난 당신들이 착하게 살려고하는 것 인정해, 나도 착하게 살려고 그래, 이렇게 얘기하죠.
말하자면, 이 착함, 이 의로움, 혹은 행복을 추구함, 이런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이 언급된다는 사실이죠.


우리는 팔복에서부터 산상설교 내내 확인하는 것이 뭐냐하면,
예수 없이는 기독교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예수그리스도의 중요성! 절대성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문제, 구원이 우리에게 성립시키는 온전한 율법의 완성, 사랑을 할 수있게 되는 것도 오직 예수그리스도와만 연결이 됩니다. 어떻게 연결되는냐 하는 문제죠. 우리의 영성이 다만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에서 그렇듯이 각 개인의 주관적인 종교성, 주관적인 정신적 진지성에 국한되어서는 안됩니다. 거기에는 예수가 없습니다.
각자가 진지하게 자신의 정신과 영혼과 삶을 성찰한다 하는 것을 영성이라고 하는데
기독교에서 모든 영성은 예수와만 직결되어 있습니다. 예수에게만 실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구원, 생명, 진리, 행복, 의라는 말을 할 때, 개념으로 얘기하는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에 대하여 얘기하러 오시지도 않고 구원을 설명하시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부활이고 생명이며, 부활에 대한, 생명에 대한 분이 아니라,
그 자신이 부활이고 생명이며 예수님 자신만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보다 더 본질적으로 예수 자신과의 직결된 문제입니다.
조금 더 이 문제를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7절,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이 표현이 우리에게 본질을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게 이겁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보였으니, 우리도 그 사랑에 보답하자, 그 사랑을 본 받아 사랑하자, 가르침을 받고 배운 것을 가르치는 것 같이 얘기하는 것은 기독교신앙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굉장히 부족합니다.
그것보다 큽니다. 이렇게 얘기하죠. 7절 다시 보죠.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즉 율법이 추구했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것은 어디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의로부터 나옵니다. 그것은 뭐냐 같으냐 하면, 생명이 생명을 낳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이 생명을 가르쳐서 생명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생명만이 생명을 낳듯이 하나님만이 생명을 낳습니다.
우리가 생명이라는 단어를 아무리 이쁘게 써도 생명이 되지않는 것과 같이 우리는 이것을 가르침을 받고 흉내를 내고 하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하나님 당신의 사랑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사 우리에게 심었다, 낳았다라고 밖엔 얘기할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개념은 하나님의 자녀로써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지 못한 죄인니라는 표현은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관계에 있어서도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속성과도 성품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를 죄인이라고 합니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하나님을 닮는 것 하나님이 낳은 자녀로 회복되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이제 우리 보통하는 식으로) 배웁니다.
아니 하나님으로 물러 받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랑이고 그외 어느 것에서도 사랑은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흉내 내고 모조품을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으로부터만 납니다. 8절 이렇게 하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것 참 성경의 특별한 표현이고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고 하나님이 사랑입니다.
사랑에 대하여 가르쳐주는 분이 아닙니다. 이건 하나님만이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와 생명과 거룩이 하나님께 속해있고 하나님만이 만들어 내십니다.
우리는 그의 자녀로 부름을 받기 때문에 혈연관계에서 유전적으로 부모의 내용을 물러 받듯이
구원받은 자녀들이 이런 모든 것을 물려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는 모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가지는 특권들이, 이 하나님과 예수 안에서 허락된 것임을 분명히 해야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늘 하나님은 저 하늘 보좌에서 말하자면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시고 우리가 어떻게하나 보시는 분으로 되어있지,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우리를 낳으셨고 함께 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12절 이하에 이렇게 이어집니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루시며 완전케 하시며 그가 구원하시는 그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통치아래 불러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구원 속에서 하나님이 목적하셨던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는 이 일은,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우리가 죄인되었던 자리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보통하는 표현으로 부활생명을 입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세상하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유전인자를 갖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적인 표현으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뭘 가르치시고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고 하는 관계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관계성으로 설명이 되는데, 관계성은 성삼위 하나님의 연합과 관계성으로의 부름이라고 얘기합니다.

다시 보죠, 15절에 보면,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이게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안에 거하게 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 갖는 내용들은 규범도 아니고 말하자면 책임도 아니고 정성의 문제도 아니고 본질적인 그 존재의 구성적 요소들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우리는 이것을 지금 요한일서 4장에서 얘기하는대로 하나님이 누구냐를 예수안에서 만나는 겁니다.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부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이름 중의 하나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이죠.
이 성삼위 하나님의 교재에 부름을 받아 신자가 가지는 신앙적인 모든 내용들 그것을 요구로 이해하시든 명령으로 이해하시든 책임으로 이해하시든 특권으로 이해하시든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적인 실천과 분발의 그런 표현들의 차이가 각 개인에게 다르게 좀 더 어느 것이 더 유용하게 적용되든 간에 공통되는 본질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 부름받음으로써 우리가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는 사실입니다.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실천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은 내가 존재하고 내가 당하는 삶의 모든 정황, 기독교 신앙이 요청되는 무대와 경우속에 내가 하나님의 뜻과 요구되는 신앙을 어떻게 실천할 것이냐하는 문제를 나 혼자 서 있지 않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늘 직면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이겁니다.
하나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예수님 이런 건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라는 교재를 가지고 만나시라 이게 오늘 성경이 하는 얘기입니다. 너무 신비롭게 뭐 희한하게 하는 것 같으니까 좀 더 확인하는 성경 구절을 찾읍시다. 요한복음 17장 21절에 가봅시다.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더 이상 뭐 설명이 필요없죠. 예수님께서 오셔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연합과 관계같이 우리를 요구하셔서 우리를 목적하셔서 예수를 보내셨고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우리 모두를 아버지 안으로 부르기 위하여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뭐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자녀로 부모과 자식의 관계로 부름을 받으며 그래서 아버지의 어떠하심같이 우리도 그렇게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걸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변명의 여지도 없고 더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가지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죄와 사망의 법아래로부터 생명과 성령의 법아래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우리가 예수안에서 얻은 구원이 무엇인가를 정말 놀랍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은 책임이기 전에 유전적 성향, 속성, 성품에 있어서 새롭게 지음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옛 습관의 많은 영향을 아직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건 이겁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라.
모든 삶의 정황 속에서 내가 이 문제를 신자로써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가,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가,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로 생각할 때마다 예수를 떠올리십시요. 예수가 왜 왔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실천에 있어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우린 밖에 나가서 저 어렸을 때 이렇게 까불고 놀다가 누가 '너 누구 아들 아니야?' 하면 꼼짝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죠?
'너 아무개지?' 보다 '너 누구 아들이지?' 그러면 그 순간부터 (아버지가 뭐 별로 건강하지 않은 분이라면 할 수 없지만 보통은 그렇죠) 그칩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된다 는 이유입니다.
그건 이유이면서 놀라운 특권이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아버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느 기회에 복음서 속에서 예수님의 질책을 받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들의 치명적인 결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가면 신자의 삶을 사도바울은 이 유명한 구절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놀라운 설명입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는 신자의 존재를, 또는 신앙인의 자리를 이렇게 신비라는 말로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인제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이름으로 약간 책임을 면하고 어떤 신적 조종과 능력 속에서 그저 모호한 낙관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철처히 함께 삽니다. 지켜보고 계시고 돕고 계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어느 자리 어떤 경우도 나 혼자서 있지 않습니다.
도우심으로서도 중요하지만 두려움으로서도 중요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라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의 신자된 그 내용을 위치를 분명히 하는 오늘 말씀이 되고 그것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실제 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 사는 시간, 자리라는 것으로 여러분의 신앙을 승리케하는 오늘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서 자녀로 부르시고 영생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며 거룩으로 부르셨으며
그러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기쁨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당연히 승리해야할 것이요 책임져야할 것이요 두려운 마음과 부르신 부름에 합당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이루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된 자랑인 것을 알게 하시고 이 구원의 특권들과 이 놀라운 은총들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내는 누리는 우리의 삶과 신앙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극지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하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자된 특권과 그 인생의 놀라움을 확인하고 충성과 승리를 약속하고 돌아가는 심령들 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http://lamp.kr/lamp-sermon/?p=4562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주일예배 설교 녹취록 이택자


'좋은 말씀 > - 산상수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상수훈 (6)   (0) 2016.06.10
산상수훈(5)   (0) 2016.06.08
산상수훈(4)   (0) 2016.06.03
산상수훈 (2)  (0) 2016.06.01
산상수훈 (1)   (0) 2016.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