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산상수훈

산상수훈 (2)

새벽지기1 2016. 6. 1. 12:16


산상수훈 02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오늘 마태복음 5장의 본문은 그 중요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빛이라 라는 이 성경의 말씀은 약속이며 책임이며 또 특권이며
그리고 우리의 정체와 삶을 신자로써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모든 내용들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앞에 있었던 팔복에 이어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의 연결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본 11절과 12절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하는데,
11절에 있는데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하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팔복을 생각할 때에 그 모든 내용들이 자격과 조건이나 또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된 나라에 초청을 받을 수 있는 무조건적인 범위를 제시하고 있다는 걸 확인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자 일지라도 예수로 말미암아 부르시고 허락하시는 하나님나라에 복된 나라에 예외 없이 들어갈 수 있다 하는 것이었죠. 우리의 능력과 자격을 요구하지 않고 허락하는 천국이지만,

이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나 중요하게 오늘 본문식으로 세상 나라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나라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하는 이 일은
이 복을 얻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는 모든 자들이 이 세상에서 확인해야 되는 소속감입니다.

세상 나라에 속했는가 하나님 나라에 속했는가 하는 것은 둘을 동시에 공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 말을 12절에 있는바와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라고 나옵니다. 옛날 선지자들이 당한 박해는 우리 뭐 구약성경을 이해하는대로 이런것들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라 하는 것들이 선지자들의 사명이었습니다.


그것을 인하여 왜 선지자들이 박해를 받았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선민들이고 하나님과 약속관계에 있는 큰 책임을 지고있는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과 율법으로 요약된 모든 그 지켜야 할 내용들을 몰랐을리도 없고 아주 반대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기에 말하자면 오늘 우리가 보는 바와같은 옛선지자들이 박해받은 그 이유와 그 이유가 설명하는
우리 성도된 자들의 이 세상에서의 현실에 관한 실마리가 있습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11장  으로 갑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새의 줄기에서 나는 싹, 다윗과 그의 후손으로 지칭되는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이 메시야, 그의 아들이 오셔서 성취할 하나님의 약속들 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들은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세워졌던 모든 하나님의 종들, 선지자들에게 위임됐던 동일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공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 공의를 실현하는 문제를 4절 보시면,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한다' 에서

심판과 판단은 정죄한다는 뜻이 아니고 사법권으로 보호한다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자를 보호하고 겸손한 자를 지켜주고 라는 뜻입니다.
그의 행하는 모든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종들이 행하는 일들이 이런 세상의 정의를 공의를 평화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것들은 아직도 우리 기독교의 큰 책임으로 남아있는 영원한 우리의 책임이기도 합니다만 이일들은 종종 우리의 오해를 삽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에 공평과 정의를 구현해내는 일은 기독교신앙의 속성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속성이냐하면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그리고 자비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 주시는 분이라서 그런 공평과 정의를 요구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공평과 정의라는 사회에서의 기독교 책임을 낳습니다.
여기있는 11장 1절에서 5절의 내용도 이런 하나님의 종이 해야하는 일,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일은, 그 근거가 2절에 보듯이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에 의해서 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에 의해서 3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아' 이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마태복음 5장에서 보는 '너희는 세상의 빛' 이라는 선포, 또는 우리의 책임은 우리의 정체성 때문에 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정체성?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어 복음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정체성, 어떤 정체성인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아래 있다는 정체성 그 지위와 신분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 우리의 빛 됨은 우리가 가지는 기독교신앙의 내용들 속에 나오는 도덕성과 종교성 이전에,  
그 도덕성과 종교성이라는 것이 속성으로 속성으로 그 내용되어 있는 통치자의 근거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는 내용은 우리 모든 신자들이 우리가 가진 신앙고백, 예수그리스도안에서 가진 바 믿음의 내용들 때문인데 그 믿음과 신앙고백들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누군가에 근거합니다.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이 누구냐에 관한 것이며, 그기에 대한 고백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가 보십시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빛은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이 빛은 무슨 빛이냐 그러면 생명과 진리에 관한 것인데 여러분 잘 아시는 요한복음 14장에 그 고백대로 선언대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은 생명에 대해서 깨우쳐주러 온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이 진리고 그 분이 생명입니다. 우리의 빛은 우리가 예수를 소유하고 있다,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다는 것으로 빛이지, 우리가 믿는 신앙을 어떻게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실현하는가에 빛이 있는 것 아닙니다.


중요한 차이가 있죠. 여러분은 먼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고백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속에서는 핍박을 받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적대적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러신 것같이 우리도 성육신의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왜요? 예수님 오신 것을 우리 지난번 확인했듯이 팔복을 이해한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써 이 빛은 흑암에 찾아온 빛이었습니다.


사망의 자리에 찾아온 빛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빛은 전부 사망의 그늘진 곳과 어두운 자리로 보냄을 받습니다.
세상은 예수가 없고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것은 흑암의 자리와 사망의 자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외에 다른 곳에서 빛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의 빛 된 것은 이런 소속에 의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통치자요 우리는 그의 신민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빛되게 하며, 우리의 빛된 것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소속감과 신분과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로 말미암는 정체성으로 이 빛을 이해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5절 이하에 신자된 정체성과 삶을 이렇게 바울이 묘사합니다.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빛된 것은 쉽게 아주 근본적으로 대조를 하면, 예수를 믿어서 내가 어떻게 변했는가가 아니라
예수를 믿어서 내가 누구를 만났는가 여기에 전 촛점이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우리가 변하고 당연히 우리의 책임이 윤리 도덕적으로 있지만 근본적인 것은 윤리 도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도덕성을 가지십니다. 윤리성을 가지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이시고 진리시고 생명이시고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십니다.
그런 근본적인 속성에 도덕성과 윤리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신자된 자기 확인이 무엇을 행하고 유익하기 이전에 내가 예수를 믿는다라는 정체성으로써 자신을 확인하며 세상안에서의 신자의 삶을 이해하고 버텨내는데 있어서 필요한 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지금 이 시기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성육신의 삶을 삽니다.
그래서 뭐라 그래요?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신자된 사람들의 인생은 섬기는 인생입니다. 고달픕니다.
종이 주인보다 고달픈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계속보죠.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보배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자신으로 증거하고 우리 자신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없답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이 어떠하셨는데요. 예수님은 메시야로 대접받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죠. 죽었다는 것은 세상적으로는 완벽한 실패입니다.
완벽한 실패!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삽니다. 예수가 산 것같이 살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빛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어 그를 통하여 우리 모든 인류를 그의 자녀로 부르시는 것같이 우린 그렇게 삽니다.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인생은 고달픈 인생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문제를 어떤 유혹속에서 늘 이 말씀을 가지고 씨름을 하게 되느냐하면은,
내가 제대로 빛 노릇을 하게 되며는, 사람들에게 효과도 있고, 내가 가진 신앙과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를 볼 수 있지않을까? 하는 유혹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뭘 잘못해서 어디가 부족해서 나의 빛된 사명, 신자된 인생은 아무 보상이 없는가 라는 문제에 여러분이 늘 직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된다 그러자 제자들이 모두 말렸다니까요! 죽으면 말이 안되쟎아요.
신자의 생애가 궁극적으로 죽는 생애다, 그렇게 얘기하자면 여러분들 마음에 항복이 되세요?

보란듯이 신앙생활이 결과되고 보상됐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성경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주께서 죽으신 길을 가고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 집니다.
죽어야 결과가 나타나는, 마치 질그릇이 깨어져야 보배가 드러나는 것같이 부름을 받고 있답니다.
그렇게해서 우리는 나의 믿음이라는 종교성, 우리의 신앙의 어떤 열정이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속했다는 것으로 기능하는 존재가 됐다라는 것을 인식해야된다 이겁니다.

그것이 빛입니다. 그게 어떻게 빛이 되느냐!  
저 사람은 세상이 주인이 아니며 세상의 법칙으로 살지 않으며 세상에 굴하지않는 사람이다! 이게 빛입니다.
저사람은 예수로만 주인을 삼고, 예수를 위하여 기꺼이 세상이 가지는 가장 큰 힘에 대해서도 굴복하지 않는다,

이게 빛이죠!  
저들은 다른 것을 가졌다 이겁니다. 그 다른 것은 당연히 세상성을 가지고 확인하는 보상들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니까 잘 되더라 예수를 믿어니까 성공하더라는 아닙니다.
그것 갖고는 세상과 예수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기독교신앙으로 인하여 또 기도해서 많은 하나님의 그 응답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것으로 여러분을 하나님이 여러분 기도에 응답하시고
하나님이 세상보다 크다는 걸 확인시켜주셨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죽는 인생을 살아야합니다.


빌립보서 4장에 사도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이런 가르침을 줍니다.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바울의 이 큰소리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는
결단코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긍정적인 확신이 아닙니다. 낙관성에 관한 얘기가 아닙니다.
그는 지금 로마 옥중에 갖혀 있습니다. 곤궁한 처지에 있습니다.
그를 위로하러 찾아온 빌립보 교인들, 문안차 찾아온 빌립보 교인들에게 준 답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나는 어떤 형편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그가 하는 얘기는 이겁니다.
나는 세상을 섬기지않고 예수를 섬긴다. 내가 섬기는 예수님이 하라는 일은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기서 무엇이든지는 뭐겠어요? 무슨 꼴이라도 당할 수 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무슨 형편도 감수할 수 있다. 이게 신자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당연히 마음속에 질문이 나올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왜 믿어? 그럼 믿지않으셔야 됩니다.
우린 바로 그 이유때문에 믿습니다. 세상보다 예수가 더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믿습니다.
예수를 알게 됐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굴할 수 없고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세상을 포기합니다. 이 같은 문제를 고린도전서 2장에 가면은 우리가 각오해야되는 것뿐만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도 가져야하는 빛된 신자의 책임을 감수하기 위하여 알아야 할 내용으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절 이하의 이 말씀을 줍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1)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음의 길을 걸어야한다, 성육신을 뒤쫓아야된다 라는 것을 감수하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우리가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길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그렇게 산다고해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 일이 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문제에 대하여 섣부른 낙관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하나님이 아실 겁니다.
우린 그걸 위하여 여기 고린도전서 2장에 증거된대로 하자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갔을 때, 자신의 믿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상대방들을 인간적인 능력으로 항복시키려는 유혹을 물리치는게 제일 힘들었다고하는 고백을 기억해야합니다.


그건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우린 순종할 뿐이지 우리에게 능력과 우리에게 조종할 힘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가 한대로 하자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들어가 여러분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여러분의 판단을 내리지 마시고,
이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가 오셨고 예수가 십자가에 죽어셨다만 기억하기로 하고 사셔야됩니다.


사도바울도 예수님 생전에는 예수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를 핍박하고 그의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였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 만나고 그러고야 돌아섭니다.
그의 중생은 전혀 인간적인 힘에 근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셨고 바울을 변화시키신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셨고 그리고 또 얼마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내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리 보고하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입니다.
그리하여 그기서 말하는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모든 사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라 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보내야하는 영광은 우리가 한 일의 효과 대단함으로 받는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영광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영광,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앞에 부름받는 자들이 세상이 제시하고 세상이 위협하고 세상이 약속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외면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을 따르는 자의 다름을 저들이 최우선적으로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을 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우리가 가진 열심과 헌신과 진심 때문에 나 스스로의 하나님 자녀된 정체성과
또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헌신들이 보상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어두운데로 보냄을 받는 성육신의 길을 방해합니다.
우리는 되는대로만 갑니다. 되는 것만하고,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없는 데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평생을 신자로써 살았는데 신자다운 보상을 안 해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게 납득이 되십니까?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으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내가 얼마나 유능한가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자체, 하나님이 누구시란 걸 아는 것 자체, 성경적으로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이사야 42장 5절에 이 문제를 이렇게 성경은 분명하게 못박습니다.  

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 빛은 모든 선지자들이 가졌던 위임받은 사명이며 직임이며 책임이며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도는 또는 그 주인이신 예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허락된 겁니다.
우리야말로 빛입니다. 어떤 빛이죠?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들을 해방시키는 겁니다' 이 이들은 기능적이기 전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8절,

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그가 만드신 자기의 형상대로 만든 인류를 우상에게 넘겨주지 않겠노라고 분명히 작정하셨습니다.
세상에 맡겨두지 않겠노라고, 그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고 그전에 선지자들을 그렇게 보내셨으며
지금도 우리를 보내어 가장 열악한 환경, 가장 어두운 곳, 가장 절망적인 자리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자비롭고 거룩하고 신실하신 통치를 모든 피조물들에게 허락하기 위하여
열심히 열심히 일하시고 이루실 것입니다.
그게 우리 모두가 가지는 신자로써의 빛된 사명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도움이 되느냐 어떻게 충성해야 되느냐 이전에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이 이 뜻에 맞게 살고 순종한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그것 자체로 보상받은 인생이며 복된 인생이고
그것을 보이는 결과로 확인하고 싶으면 우리는 사실은 하나님의 통치아래에 있는 것과
세상의 통치아래에 있는 사이에서 사실 시험받고 있는 꼴이 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오늘의 신자된 고백과 삶과 존재에 유일하고도 충분한 힘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일이 얼마나 큰 일이며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큰 것인가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고 예수 안에 허락된 모든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통치아래 부름받았으니
그 복된 책임을 우리의 기쁨으로 신자된 자랑과 영광으로 도리어 승리하는 우리들 되게 하옵소서,
충성과 인내를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진리와 생명을 소유한 자의 넉넉함과 풍성함을 허락하옵소서,
세상이 우리를 이길 수 없음을 믿고 순종케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http://lamp.kr/lamp-sermon/?p=4560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주일예배 설교 녹취록 이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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