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진호컬럼

Why? 대신에 Who? (시42:1-3)

새벽지기1 2016. 3. 14. 08:54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42:1-3)


며칠 전에 예수를 갓 믿기 시작한 초신자 한 분이 자꾸 어려운 일들이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방해로 그럴 수밖에 없기에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형통할 것이라는 기대부터 먼저 버려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사단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수를 써서라도 못 믿게 만들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사단이 자기 수하에 있던 종이 하나 탈출해서 하나님 나라로 가버렸는데 가만둘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언뜻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쪽에선 그런 사단의 방해를 막아주고 오히려 상급을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새로이 당신의 자녀가 된 자가 더 힘을 내어 열심히  믿을 텐데 오히려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예수를 믿으려 들면 가족 친척들이 이제 흉사가 겹칠 것이니 예수쟁이 하나 때문에 집안이 망하게 생겼다고 기를 쓰고 반대합니다. 예수님이 싫어서이기도 하지만 주위에서 그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본 시편 기자도 자기가 환난을 당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자꾸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빈정댄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불신자 심지어 일부 신자들마저 갖고 있는 가장 큰 종교적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그 착각을 깨기를 원해서라도 사단의 방해를 묵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신자에겐 여전히 불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몫 단단히 잡아보겠다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 뜻대로 거룩하게 살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어 형통할 생각이 없기에 하나님이 따로 보상은 안 주어도 되지만 환난을 막아주실 책임은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믿었는데도 형통할 일이 안 생기면 신자로선 “아! 예수 믿는다고 대박이 생기는 것은 아니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지 꼭 환난이 생겨야만 알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실은 욥의 경우처럼 신자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환난을 많이 겪습니다. 심지어 아무 죄를 짓지 않고 탐욕을 품지도 않으며 성실하게 하나님을 믿어 영적으로 충만해 있는데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솔직히 주위 사람의 빈정거림에 자기도 모르게 심정적으로 동조가 되어 뭔가 잘못 믿고 있나싶어 당혹됩니다. 


신자가 갖는 고난에 대한 착각 중에 가장 먼저 깨트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 이유를 아는 고난이라면 대책을 세울 수 있거나 혹은 결과가 어떻게 될지 미리 알 수라도 있기에  사실상 고난이 아닙니다. 나아가 이유를 안다는 것은 물리적인 인과응보의 법칙 안에서 고난을 다룰 수 있게 된다는 뜻이므로 하나님과도 아무 연관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유 없는 고난마저 하나님에게 없애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요구는 아예 세상을 오직 물리적 체계 안에서만 움직이게 해 달라는, 다른 말로 하나님은 아무 필요 없으니 이 세상에서 손을 떼어 달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갓 난 딸을 뇌막염으로 잃게 된 한 젊은 엄마가 도대체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아 아버지와 상의했습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Why?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 하지 말고 Who?에 대한 해답을 구하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했는지 그 이유를 따지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 묵상해 보라는 뜻이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신자에게 가장 유익하고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정말로 원하십니다. 심판을 내리기보다는 구원을 베푸시기를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29:11)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히 신자에게 축복을 베푸시기보다는 신자더러 당신과 진정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기를 가장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요구가 결코 아닙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신자의 가장 큰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환난 없이 형통하면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없는 형통은 인간에게 오히려 큰 불행이며 당신 안에서 겪는 환난이라면 도리어 큰 행복이 될 수 있다고 여기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결코 신자의 코앞에 당근을 달아 유혹하지도 않으시고 등 뒤에 총부리를 갖다 대고 억지로 떠밀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과 인간 뿐 아니라 세상의 어떤 관계에서도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절대 생기지 않습니다. 신자 측에선 전자는 아부요 후자는 굴종이며 하나님 쪽에선 전자는 자선사업가요 후자는 독재자일 뿐입니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의 생각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기에 오히려 이유 없는 환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유가 빤히 보이는 환난뿐이라면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또 하나님을 외면하고 도대체 인간이 진정한 평안을 어디서 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혹시 그럴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라면 얼마든지 하나님께 불만을 터뜨릴 수 있으며 아니 아예 믿지 않고 심지어 욕을 해도 됩니다.


나아가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난의 거의 대부분이 사실은 인간의 잘못에 기인합니다. 뇌막염으로 갓 난 아기가 죽은 것은 어떤 경로로든 바이러스가 아기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생긴 근본 원인은 인간이 타락하여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대신에 제 멋대로 황폐하게 다루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죄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불만을 갖기보다는 더더욱 그분 앞으로 겸비하게 돌아와야 하지 않습니까?


프란시스 쉐퍼는 이유 없는 고통을 받는 욥에 대해 명료하고도 은혜로운 해석을 내렸습니다. “우리의 제한된 지혜로는 고통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탄으로부터 온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지 완벽하게 구분해 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곧 위로가 됩니다. 그저 사랑과 믿음과 신뢰 안에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욥의 경우처럼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라면 주님의 은혜로 기꺼이 받아들이면 됩니다.”(‘쉐퍼의 편지’/홍성사간)


세상만사를 하나님이 주관하니까 일개 신자로선 이유 없는 고난을 아무 군소리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고난들이 있기에, 아니 그런 고난 가운데서 신자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소망, 사랑이 더욱 힘을 발휘할 수 있고 또 신자에게 큰 은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그 이유를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반드시 우리를 당신의 크신 영광 가운데로 이끌고 계시기에 신자는 오직 믿음으로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쉐퍼는 그래서 “주님이 다 아시기에 우리는 (고난의 이유에 대해) 절대적 지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혹시 아직도 뭔가 미진하고 불만이 완전히 해소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에서 구원이지, 환난 그것도 이유 없는 고난과는 별다른 연관이 없지 않느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상 가장 억울한 죽음을 그것도 고통이 가장 극심한 모습으로 당했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오직 인간에게 가장 유익하고 복된 일만 해주셨는데도 인간은 오히려 아무 이유 없이 그분을 죽였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앞에서 당근을 주거나 뒤에서 총부리를 갖다 대어 주지 않는다고 죽인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마음은 전혀 없고 독재자나 자선사업가로 모시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 인간은 하나님에게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해 감히 불평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이 이유 없는 고난을 겪을 때에 바로 당신을 쳐다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고난을 당했으니 인간이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가 죄를 범해 나를 배반하고 사단의 종이 되었으므로 이 땅에 이유를 모르는 환난이 횡행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그 죄를 진정 회개하고 하나님 품 안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또 잘 믿고 있는 신자에게는 아무 이유 없어 보이는 환난일수록 더욱 당신의 십자가 외에는 진정한 위로와 해결책이 없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영원한 구원이 있기에 이 땅에선 사단의 방해든, 인간의 죄악이든, 때로는 당신이 직접 주관하든 인간에게는 이유 없어 보이는 환난을 하나님은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신자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또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뇌막염으로 죽은 아이도 천국에선 영원하고도 거룩한 생명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유 없는 환난 가운데 당신의 은혜는 오히려 더 크고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준 너무나 생생한 증표입니다. 인간은 이유 없는 고난은 죽어도 받기 싫다고 우겼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런 말도 안 되는 고집마저 아무 말 없이 아무 이유 없이 받아주셨습니다. 세상에 이유 없는 환난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의 거룩과 의와 생명은 절대로 가감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당신께서 가장 말도 안 되는 환난을 손수 당하신 것입니다. 본 시편 기자가 그토록 갈망하여 찾았던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장소입니다.


신자더러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뜻은 형통은 없고 환난만 있어도 기꺼이 주님만을 정말로 사랑하고 신뢰하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을 따르는 신자가 이유 없는 환난 가운데도 소망을 잃지 않고 인내하며 더 거룩하고 신령하게 자라나갈 용의가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지 가만히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유 없어 보이는 환난이야말로 하나님의 신령한 지혜이자 완전한 섭리입니다. 신자가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할수록 왜를 따지기 보다는 이런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 묵상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마저 언제 어디서든 나에게 등에 총부리를 대거나 앞에 당근을 갖다 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버티는 꼴입니다.


다른 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물리법칙 안으로 끌어넣고야 말겠다는 완악한 고집이 됩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이 원하는 대로 그분을 부려먹겠다는 심보로 너무나 큰 신성모독입니다. 유대 종교 당국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면서 갖다 붙인 죄목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죽이는 셈입니다. 신자마저 말로는 그분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그분이 지신 십자가는 지기 싫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그분이 십자가에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 그 일 가운데 드러난 뜻이 무엇인지 묵상하지 않고는 아무리 믿음이 있는 신자라도 어떤 경미한 고난도 끝까지 고난으로만 남을 것이며, 또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도 여전히 불만은 생길 뿐입니다. 예수님 오늘도 저를 포함한 모든 완악한 당신의 종들을 거룩한 십자가 앞으로만 인도하여 주셔서 날이 갈수록 더욱 겸비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아멘!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 하니라 하시니라.”(눅9:61,62)


오래전 세계 육상계에서 있었던 일화입니다. 로저 배니스터가 1954년 5월에 1 mile을 4분 안에 달려 세계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 후 두 달도 안 되어 존 랜디가 그 기록을 1.4초 단축시켰습니다. 그 해 8월에 드디어 두 선수의 역사적 대결이 성사되었습니다. 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 놓고 랜디가 앞서고 있었는데 마지막 결승점을 눈앞에 두고 배니스터 선수가 어디쯤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만큼 템포가 죽어 바로 역전되어 버렸습니다. 그 후 타임지와 인터뷰에서 랜디는 “내가 뒤만 돌아보지 않았다면 이겼을 것”이라고 후회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지만 가족과 먼저 작별하겠다는 사람에게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가족을 무조건 무시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기에 다른 모든 일은 제쳐두고 오직 그 일에 당장 전념하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신자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사단과의 영적 전투이며 평생을 통해 그 싸움을 해야 합니다. 장거리 경주를 뛰는 선수처럼 그 소명을 주님 나라 가는 날까지 성실하게 수행하여야 합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4) 그래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히12:1)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의 육상경기처럼 0.1초를 다투는 경우는 뒤를 돌아보면 안 되지만 평생을 통해 하는 경주라면 때로는 뒤를 돌아보며 고칠 것은 고치고 헌신할 것은 더 새롭게 다짐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가족도 만나지 않아야 할 정도로 뒤를 전혀 돌아보지 말라는 것은 좀 심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도 쟁기 잡은 농부에 비유한 것에 불과하지 그렇게까지 엄격한 뜻은 아닌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에서 비유를 드는 이유는 비유에 나타나는 내용에 비추어 뜻을 쉽게 이해하여 참조만하라는 경우와 전하고자 하는 뜻을 더 강조하는 경우로 나뉘는데 본문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됩니다. 말하자면 “쟁기를 잡은 농부가 뒤를 돌아보지 않듯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하면 전자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단정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신자는 이미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쟁기를 잡은 자라는 뜻입니다. 쟁기를 잡은 것과 유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쟁기를 잡은 농부는 뒤돌아보는 법이 없습니다. 앞에서 소가 끌고 있는데 뒤를 돌아보면 전진이 안 될 뿐 아니라 고랑이 똑 바로 갈아지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려면 오직 전진이 필요하며 그것도 올바른 전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갈아야 할 밭고랑을 정확히 알아야 즉 소명감에 온전히 헌신된 자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신자는 성실하게 충성하려는 의지적 노력이나 믿음에 앞서 가장 먼저 소명이 구체적으로 확고하게 서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소원과 열정이 뜨거워야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가족과 작별하는 것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소중하고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절감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잘 아는 내용이자 그렇게 실천하려 노력도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지치고 피곤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핍박과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면 때로는 그 일을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는 엘리야처럼 탈진해서 아예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고 또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쟁기를 잡았으니 가족마저 만나지 말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면 솔직히 너무 일방적인 요구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신자에게 어떤 요구, 권면, 명령을 하실 때는 반드시 신자가 그럴 수 있는 여건과 능력을 벌써 다 마련해 놓으십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신자가 그것을 기꺼이 수행하고픈 마음의 소원과 열정까지 채워주십니다. 도저히 지킬 수 없어서 아예 불가능한 계명을 신자더러 단지 분발하라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경우는 세 가지뿐입니다. 첫째는 해야 할 일이 계속해서 많이 생길 때입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을 지은 한국 모 재벌의 K 회장은 평생을 회사 내에서도 뛰어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로선 그만큼 할 일이 많으니까 다른 것에 한눈 팔 겨를이 없으며 단 일초의 시간도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모자라지 않습니까?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불쌍한 영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알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도 흘러넘칩니다. 그들의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이 가족을 만나 즐겁게 보내는 일보다  정말 훨씬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여겨지십니까? 또 그런 소원과 열정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일상사를 무시하고 전도와 선교에만 열심을 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각자가 서있는 장소에서 맡은 바 일을 진정한 감사와 기쁨으로 선하게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얼마나 짧습니까? 그것도 겨우 한 번 뿐이지 않습니까? 실패하면 다시 시도할 기회는 영영 오지 않지 않습니까? 정말 후회 없이 내 인생을 예수님을 닮아 아름답고 거룩하게 가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뒤를 돌아보는 만큼 시간과 자원 나아가 믿음과 소원마저 낭비될 뿐입니다.


신자가 진정으로 이런 소원들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전도할 영혼을 부쳐 주시고 선한 일을 할 기회를 만들어 주시고 범사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해주십니다. 신자가 예수를 모르는 영혼을 만나게 해주고, 자신의 품성이 거룩하게 변하며,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인생이 되도록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아니 예수를 모르는 영혼은 기도할 것도 없이 그냥 문 밖에만 나가면 문자 그대로 수두룩합니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후회와 반성을 하는 것인데 이전에 했던 일이 실패했다는 의미입니다. 성공한 자는 구태여 뒤를 돌아 볼 필요가 없으며 항상 더 큰 성공을 소원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뒤를 돌아보는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럼 무슨 뜻이 됩니까? 예수님만 바로 따르면 뒤를 돌아 볼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 다른 말로 실패는 결코 없을 것이라는 뜻 아닙니까? 안 믿어지십니까? 아니 너무나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이 시킨 일을 예수님과 함께 하는데 실패할 리가 있습니까?


설령 신자의 눈에는 실패같이 보여도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만의 너무나 큰 성공을 그 안에 숨겨 둡니다. 엘리야는 세상에 여호와를 따르는 선지자가 자기 혼자 밖에 남지 않았고 이제 자기마저 생명이 날아갈 판이라 완전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칠천 명의 남은 자를 예비해 놓으셨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무려 칠천 배의 성공이었지 않습니까?


뒤를 돌아보지 않는 세 번째 경우는 장님처럼 앞 사람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따라갈 때입니다. 장님이 앞 사람이 든 작대기를 붙들고 가면서 뒤를 돌아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더 간단한 예로 지리를 전혀 모르는 낯선 곳에서 앞차가 가는 대로 따라가는 뒤차가 옆이나 뒤를 볼 겨를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신자는 오직 그분만 바라보며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하며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자꾸 뒤를 돌아보는 까닭은 자기 실적이 얼마나 쌓였는지에 관심이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일을 하나님의 인도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자기 힘으로만 했다는 증거입니다. 주인이 시킨 일을 오로지 주인의 돈과 수단에 의지해서 한 종이 자기가 한 양 자랑하는 바보는 없습니다. 주인을 자랑하는 종은 있어도 주인을 대신해 자기가 주인인양 하는 종은 당장 쫓겨나가거나 아예 일을 맡기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정말로 충성되게 하고 있는 종은 이 세 경우를 모두 경험합니다. 물론 연약한 인간인지라 실망하고 힘들어 지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고 하염없이 한탄하고 있을 여가는 없습니다. 설령 일시적으로 사단에게 시험 받아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는 오히려 하나님이 절대로 그냥 버려두지 않습니다. 요컨대 예수님이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권면은 당신께서 충분히 그럴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신자를 무조건 부려먹고 쥐어짜겠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또 진정으로 헌신된 자는 그럴 마음도 틈도 없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니라.”(빌3:13-16)


여러분은 어떤 각오와 헌신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정말 가족과 이별하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 더 소중하다고 확신하십니까? 그래서 평생을 두고 주님을 위해 충성할 준비가 되어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 쪽의 결심만 재촉하고 따져 묻는 말이 아닙니다. 위의 세 경우가 나에게 넘치는 은혜 가운데 이뤄지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가 묻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주님이 하고 있고 나는 단지 그 일에 기꺼이 쓰임 받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주님이 자기에게 직접 맡긴 일이 많기에 짧고 한번 뿐인 인생을 주님과 함께 정말로 아름답고도 거룩하게 꾸며나갈 소원이 있어서 뒤돌아볼 겨를이 없으며 또 그분이 그 일을 다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까? 나아가 주님이 하시는 일은 절대 실패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당신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확신하십니까? 그래서 범사를 주님께 감사와 기쁨으로 온전히 의뢰하고 있습니까? 혹시 쟁기를 잡고도 자꾸 뒤만 돌아보고 있지는 않은지요?


아니면 쟁기를 잡고 있기나 합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일이 없고, 아니 아직도 무엇인지 모르거나 알고 싶은 생각마저 없는 것은 아닙니까? 말하자면 쟁기도 잡지 않은 채 뒤만 돌아보는 것은 아닌지요? 풀어서 설명하면 스스로 욕심내어 자기가 결정한 일만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도무지 안 이뤄준다고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