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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월터 마샬, "성화의 신비" 2장 복음이 이끄는 경건한 삶을 위한 자질

새벽지기1 2015. 12. 22. 08:15

 

두 번째 원리

복음이 이끄는 경건한 삶을 위한 자질

이제 어떻게 하면 거룩한 삶이라는 위대한 목적에 이를 수 있는지 살펴보자. 이 장에서는 거룩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방편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몇 가지 자질이 있다. 이런 자질은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눅14:31). 모든 어둠의 권세와, 세상과 세상의 유혹들과,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죄와 타락을 대적하여 싸움에 나가면서, 악한 세대와 맞서 싸울 영적인 준비가 바로 되었는지 점검하지도 않고 나갈 것인가? 어리석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본성적인 능력만을 가지고 싸우러 나간다. 이 말을 믿으라. 우리가 가진 본성적인 능력으로는 절대 죄와 악에 맞설 수 없다! 그보다 훨씬 더 탁월한 무엇이 필요하다! 성경을 통해 이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주셔야 하는 네 가지 자질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경건한 삶을 위한 첫 번째 자질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중심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죄를 피하고 하나님께 복종하고자 하는 총체적인 내면의 성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거룩한 삶을 위한 다른 어떤 능력보다 우선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하기를 원해야 한다.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하고 죄짓는 것을 미워해야 한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자유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유의지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유의지만으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마음은 선이 아닌 악으로 전적으로 기울어져 있다. 자연적인 상태대로라면 우리 마음은 악을 향해 치닫는다. 사람이 본성적으로 우리는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사로잡혀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송이꿀보다 더 달콤해야 한다(시19:8). 평생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기뻐하고 바라고 목말라해야 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된 정욕을 이겨야 한다. 우리 자신의 죄와 싸우고, 그것을 미워해야 한다(갈5:17, 시36:4).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종을 단순한 의무 정도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순종이 마치 돈을 벌기 위해 달갑지 않은 물건을 팔아 돈을 버는 세일즈맨이나, 별로 먹고 싶지 않은 약을 낫기 위해서 억지로 먹는 환자나, 일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나쁜 일이 생길까 봐 열심히 일하는 노예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참된 순종이 아니다. 참된 순종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즐겨 하는 것을 말한다! 세일즈맨이 이윤을 남기기를 좋아하듯이, 환자가 건강해지기를 바라듯이, 배고픈 사람이 고기와 음료를 찾듯이, 노예가 자유를 갈망하듯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지 않고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죄를 미워해야 한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거룩한 삶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죄의 정욕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는가!


인간은 원죄로 인해 태어난 순간부터 하나님과 경건에 대하여 죽은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죄악된 행동에 사로잡혀 기꺼이 종노릇하며 산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 마음을 죄에서 돌이켜 거룩을 향해 가게 하기까지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타락한 첫째 아담이 거룩한 삶을 회복하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길은 오직 한 가지다.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져야 한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새로운 마음을 얻어야 한다.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역사를 통해 죄에 종 노릇하는 우리를 풀어 주신다.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셔서 거룩으로 회복하신다. 돌과 같은 마음을 제하시고, 어린아이의 살과 같은 마음을 주신다(겔36:26-27).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마음에 할례를 베푸신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신다(롬12:2). 다윗도 자기 안에 청결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자기 안에 있는 의로운 영을 새롭게 해주시도록 기도했다(시51:10). 이런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내면의 생명이 가진 경향을 바꾸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모든 참된 순종의 원천이다.


경건한 삶을 위한 두 번째 자질은, 하나님과 화평케 되고 하나님께 용납되었음을 전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결과요 가장 큰 복이다. 우리는 죄를 용서 받았고,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과 완전히 화평케 되었다(롬4:5-7).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화평케 되고 의롭게 되어야 한다(죄사함과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덧입는 것을 말함). 일단 의롭게 되면 진실로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알다시피, 죄와 사탄의 권세 아래서 우리는 이미 죽은 자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죄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크신 사랑과 긍휼로 우리 안에서 일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일은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요8:36, 빌2:13, 롬8:7-8).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실 구원 역사를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화평케 된 것을 분명히 확신할 때 하나님의 선한 일에 힘쓸 수 있다.


거룩한 삶을 이야기할 때는 우리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진실로 율법에 순종하고 싶다면,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과, 그분의 사랑 안에 있는 것과, 그분의 은총 아래 사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순종의 본질이다. 기억하자. 우리를 향한 위대한 부르심은 온 마음으로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을 하나님만이 가장 소중하고 유일한 분이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만이 우리의 가장 위대한 행복이어야 한다. 절대적인 하나님과 주님으로서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분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지금 그분의 모습에 만족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필코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할 만큼 그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고난이든 번영이든, 삶이든 죽음이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모든 일 가운데 그분을 기뻐하고 그분께 순종하기를 기뻐한다. 비록 그것이 이 세상에서 자신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인 죽음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기꺼이 순종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일생의 가장 위대한 기쁨이 된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를 정죄하고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내보내라고 했을 때 재앙이 두려워 마지못해 이스라엘을 내보낸 바로처럼, 두려움에 얽매이면 가식적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다. 두려움에 휘둘리는 한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요한 사도도 이를 증거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8-19).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 각자의 경험을 한 번 돌아보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절감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었던 때가 있는가?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자기에게 얼마나 선하신 분인지 보았기 때문이다!

복음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미워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의 미움까지도 우리의 유익이 되게 하실 줄 안다.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는 한, 하나님을 사랑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을 분명히 깨달을 때 비로소 증오를 벗고 사랑하는 마음을 입게 된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을 알 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신의 죄악이 실제로 용서받았다는 것을 양심이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위해 죽으셨다(히9-10장을 보라).


죄책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양심을 가리켜 성경은 악한 양심이라고 한다. 죄의 악독으로 악한 양심이 생긴다. 양심이 깨끗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누릴 때까지 죄는 계속된다. 율법을 성취하는 사랑은, 청결한 마음은 물론 선한 양심에서만 나온다(딤전1:5). 죄책 아래 있는 악한 양심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원수라고 여긴다. 이렇게 생각하는 한, 죄와 사탄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악한 양심은 영혼을 경건에서 떠나게 한다. 하나님을 미워하게 한다. 하나님과 율법에 대해 말하고 듣고 생각하는 것조차 견디지 못한다. 대신에 죄악된 즐거움을 누리고 세상적인 행위들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생각에서 지우려고 한다. 악한 양심은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하심을 대적하는 모든 죄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하나님과 화목케 되고, 양심이 깨끗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돌이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지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죄가 완전히 깨끗해졌다는 것을 먼저 깨닫게 하신다. 즉 하나님은 먼저 자기 백성을 죄책에서 풀어 주고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후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신다. 성경 전반에 걸쳐서 이를 분명히 말씀하신다. 용서는 선행이라는 마차를 끄는 말이다. 마차를 말 앞에 두지 말자!


거룩한 삶을 위한 세 번째 자질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행복하고 영원한 장래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원한 안전”이다. 영원한 안전을 확신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 영원한 안전은 많은 부분에서 공격을 받는다. 순종의 삶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장래를 예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확신하면 방탕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려면 행복하고 영원한 장래를 위해 힘쓰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만 바라고 사는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가 천국에 가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싶다면 상급에 대한 기대나 심판의 두려움 같은 것은 생각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음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첫째, 천국에서 누릴 복된 장래에 대한 확신 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며 살기란 불가능하다. 진정한 순종은 바로 이 확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영생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과 같은 사람을 생각해 보자. 이런 사람이 온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죽으면 금세 헤어질 것을 안다면 누구와도 뜨겁게 사랑할 수 없다! 내생을 믿지 않는다면, 사는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죽으면 다시는 하나님을 못 볼 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 때문에 목숨을 내놓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나님과 누리는 영생이 없다면, 사람들이 죄 가운데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기를 원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제대로 된 사람치고 이 짧은 생을 그렇게 살 사람이 누구인가!


둘째, 아담의 타락 이래로 하나님께서 천국의 영광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순종으로 독려하시는 것을 성경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12:2). 죄로 떨어지기 전에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한 자기가 누리는 낙원이 계속될 줄 믿었다.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도들은 무수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고후4:16-17). 히브리서의 그리스도인들이 “갇힌 자를 동정하고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히10:34).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자기가 당하는 모든 고난도 헛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이라고 했다. 내생이 없다면, 안 믿는 사람들처럼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면서 사는 게 더 낫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 말한다(고전15:58). 세상은 덧없는 소망으로 사람들을 붙잡아 둔다. 하나님은 영광의 소망을 주셔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다(히6:11-12, 요일3:3). 이 소망은 너무나 분명해서 이 소망을 붙드는 사람들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롬5:5).

 

셋째, 영원한 하늘의 복락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과 조화를 이루는지 깨닫고 이 복락을 확신하는 사람은 죄악된 삶을 살지 않는다. 거룩한 삶은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일부다. 구원받은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요일3:1-3). 그래서 천국을 생각한다고 해서 이기적인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순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한다.


영생을 확신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상과 육체보다 하나님을 더 바라게 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선한 분인지 알수록 하나님이 더 사랑스러워지고, 하나님이 사랑스러울수록 우리 마음은 더욱 하나님을 향해 타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치 않다(히11:16). 하나님은 사랑의 사슬로 우리를 그분께로 이끈다. 그중 한 가지 방법이 바로 이 놀라운 특권 즉 경이롭고 영원한 기업을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기업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더욱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누구인가?


거룩한 삶을 위해 필요한 네 번째 자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대로 살기 바라고 또 살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주셨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열망뿐 아니라 살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건하게 사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쁜 습관을 조금 바꾸고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될 줄 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잘 알지 못한다.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간과한다. 거룩하게 살려고 한다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첫째, 인간은 죄와 허물로 본질상 죽은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살리시기까지는 영적으로 선한 일은 바랄 수도, 행할 수도 없다(엡2:1, 롬8:7-9). 그리스도의 비추심을 받고 겸비해진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즉시 깨닫는다. 선한 일을 전혀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고 싶은 마음조차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하고 싶고, 또 그렇게 하도록 마음에서 역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빌2:13). 지기 힘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실로 겸비해진 적이 없는 사람이고, 자기 마음이 얼마나 악한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둘째,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뿐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 정사와 권세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싸우는 것이 쉬운 일인가?(엡6:12). 열 번째 계명을 따라 탐심을 품지 않는 것이 쉬운가?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더 잘 알수록 탐심이 더욱더 자기를 지배하는 것을 본 바울은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다! 우리의 진짜 목표는 단순히 몇 가지 습관을 바꾸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나쁜 습관을 만들어 내는 타락하고 죄악된 욕망을 죽이는 것이 진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죄악된 탐심을 충족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대신 거룩한 사랑과 거룩한 욕구로 채우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불신자들도 안다. 불순종으로 인한 죄책도 알고,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안다(롬1:18-32을 보라). 하지만 순종하는 것이 그렇게 쉽다면,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도 하고 약속도 하는 많은 불신자들이 실제로는 전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들은 항상 실패에 따른 죄책감만 더 느낄 뿐이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역사하셔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쉽고’ 즐거워진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순종하느니 차라리 산을 들어 옮기는 것이 낫다!


셋째, 우리를 부르사 하게 하신 일을 우리가 바라고 또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혜를 따라 충분한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불러 위대한 일을 하게 하실 때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하시는지 성경은 잘 보여준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순종의 삶을 살라고 격려하기 전에, 그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죄가 그들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시켰다(롬6:13-14). 그는 마귀의 궤계를 대적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라고 말한다(엡6:10-11). 요한은 신자들이 이미 강하고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에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할 필요가 없다고 격려한다(요일2:14-15).


이전에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이적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라고 우리를 독려하신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PBA
글쓴이 : 말씀을사모하는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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