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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월터 마샬, "성화의 신비" 제5장 새로운 본성의 원리

새벽지기1 2015. 12. 22. 08:16

 

다섯 번째 원리

새로운 본성의 필요

우리는 지금 구원 얻는 믿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능력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서로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상태로 살아간다. 새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복된 상태에 있다.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 의롭게 된 것이다. 또한 그 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사신다. 이 성령을 통해 신자는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고, 내생에서도 영원한 영광 중에 거룩하게 살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살지 않는 사람은 첫째 아담으로부터 받은 상태 그대로 사는 사람이다. 아담 안에서 잉태되고 태어난 사람은 죄악된 본성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이런 사람은 일생 동안 본성의 능력대로 산다. 인간의 이런 상태를 본성적 상태 natural state라고 한다. 성경은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한다(고전2:14).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새로운 상태 new state에 들어가게 된다. 본성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출생을 통해서만 이 상태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리시는 성령을 받는다. 성령에 속한 새 사람과 육신에 속한 옛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대적한다(고전2:14-15). 이 두 가지 상태는 각각 전혀 다른 원리로 움직이지만, 모두 신자의 영혼과 관련이 있다.


불신자들과,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본성에 속한 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들은 먼저 본성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죄악된 길에서 돌이켜 의로운 삶이 되려면, 먼저 자신의 본성이 의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상태에 있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물론 그들이 항상 실패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거룩해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고 싶어 한다. 거룩해지기 위해 내면의 생각도 억누른다. 죄라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피하려고 한다. 율법의 의무라고 생각되면 무엇이든 하려고 애쓴다. 종교적 실천에도 열심이다. 죄악된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면 몸에 해가 될 정도로 식음을 전폐하기도 하고, 어떤 고통스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허사가 된다. 자신의 정욕과 싸우며 수년을 보내지만 소용이 없다. 결국 크게 좌절하고 죄를 탐닉하는 삶으로 다시 빠져들고 만다.


괴롭고 무익하기만 한 이런 노력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이런 올무에 빠져들고 있다면, 본성적 상태에서 발휘하는 자연적인 능력으로는 절대 거룩해질 수 없음을 기억하라. 거룩하게 살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누리는 새로운 본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본성적 노력에서 비롯되는 염려와 수고가 없이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본성을 통해서만 거룩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여덟 가지 진리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첫째, 믿음으로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를 통해서만 거룩하게 사는 능력을 얻는다. 인간의 의지에서 나오는 본성적 능력으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 영혼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둘째, 본성적 상태에서 거룩한 삶이 불가능한 이유를 성경은 분명히 밝힌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2:10). 새로운 출생과 창조가 없이는 거룩하게 살 수 없다!


셋째, 바울은 우리의 옛 본성을 가리켜 “육체”라고 한다. “육신(육체)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분명히 말한다(롬8:8). 많은 사람들이 육체에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때때로 죄를 짓거나 육체의 원하는 것을 과도하게 좇아 사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이 뜻한 바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자. 육체에 있다는 말은 단순히 가끔 죄악된 일에 빠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원인을 가리킨다.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죄는 육체에 상존하는 육체의 병기다(롬7:18). 육체는 성령과 반대되는 것을 원한다(갈5:17).


넷째,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처럼 그에게서 듣고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음으로, 일상의 죄악된 삶의 습관을 피하게 된다고 사도 바울은 증거한다(엡4:21-24).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다는 말은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사귐을 통해 본성적인 상태를 벗고, 새로운 상태를 덧입는 것이다. 새 사람이란 “오직 그리스도가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는” 복된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울은 보여준다(골3:11).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인간의 본성적 상태를 옛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상태를 옛 사람이라고 하는 이유는,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을 통해 새로운 상태로 들어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화는 삶의 방식을 “좀 더 개선시키는 것”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혀 새로워진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전혀 대비되는 두 가지 삶의 상태를 의미한다. 옛 사람은 죄악된 삶으로 몰아가고, 새 사람은 거룩한 삶으로 이끈다. 죄악된 행위를 그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한다(롬6:6-7).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새로운 본성을 입기 전까지는 결코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것을 촉구하는 로마서 13:12-13이 말하는 바다. 이것이 바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가운데, 어둠의 일을 벗어 버리고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는 유일한 길이다.


다섯째, 옛 본성이 전혀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본질적으로 옛 본성은 경건한 삶을 방해한다. 옛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옛 본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죄악된 삶으로 사로잡아 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경건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은 사람이다. 육체를 특징짓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죄책 아담이 처음 지은 죄가 가져다주는 죄책이고, 죄악된 삶을 살게 하는 타락한 본성이다.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엡2:3),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 육체 가운데 있는 한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롬8:1, 엡1:7). 하나님과 원수로 행하며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이 죄와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


악한 양심 악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하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 이런 사람은 죄로 더럽혀진 양심으로 인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기보다 원수로 생각하고 미워한다. 눈먼 양심을 가진 사람은 더욱 완악해져 더 많은 죄를 짓는다.


악한 성향 악한 성향은 사람을 항상 악으로 치닫게 한다. 우리는 이것을 사람 안에 역사하는 죄라고도 부르고, 사람을 강제로 죄의 종 노릇하게 하는 죄의 법이라고도 부른다(롬7:20-23). 주저함 없이 율법을 대적하는 고정된 성향을 육체라고 한다. 이런 성향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육체의 정욕을 막을 수 없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마음과 생각이 완전히 죄에 종 노릇하는 사람이, 원하면 얼마든지 선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소리인가!


마귀의 권세에 굴복함 마귀는 모든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이 세상의 신이다(고후4:4). 마귀는 자기 영토에서 자기를 거스르는 모든 자들-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고 자신의 옛 본성으로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모든 자들-을 굴복시킨다.


이런 육체의 특징들은 사람의 본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연인 스스로 어떤 능력이나 은혜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그렇게 할 만한 힘이 없다(롬6:6). 육체 가운데 살면서도 온 힘을 다해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죄 밖에 없다. 왜 그런가?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한 대로, 자연인에게서 선한 것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7:18).


여섯째, 옛 본성에 머무는 한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선한 일을 할 마음을 주시고, 그분을 기쁘시게 할 만한 일을 하게 하실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육신에 있는 사람은 경건한 일을 할 수 없다. 경건한 일을 할 마음조차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분과의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에게는 옛 본성을 훨씬 능가하는 새로운 본성을 주신다. 이 모든 일을 통해 신자가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하셨다. 사람의 자의적인 능력으로가 아니라,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살 수 있다.


“내가 만약 새 본성을 가졌다면, 여전히 죄와 씨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신자도 있을 것이다. 죄와 계속해서 씨름하는 것 때문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해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여전히 육신이 끌어당기는 것을 느낀다. 거듭난 신자들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롬7:25). 죄의 법이 남아 있는 한, 육신은 성령을 대적할 수밖에 없다(갈5:17). 이 세상을 떠날 때에라야 육신이 완전히 멸한다.


일곱째, 불신자는 자신의 죄악된 삶을 핑계할 수 없다. 비그리스도인 역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대에 섰을 때 그 역시 그가 지은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날 때부터 죄악된 본성을 가졌다고 해서 죄를 일삼는 삶을 핑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전7:29).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의 책임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많은 유산을 받은 사람이 방탕한 생활로 유산을 다 탕진하고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되었다고 하자. 빚갚을 능력이 전혀 없다고 해서 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빚을 청산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핑계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취한 상태에서 미친 듯이 죄를 지었을 때, 취한 상태가 죄악된 행동을 합리화해 주지 못한다. 오히려 술 취함으로 죄만 더해질 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순종할 능력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순종할 수 없는 사람의 무능력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자. 첫째,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할 능력도 권세도 없다. 둘째, 진정한 의와 거룩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도 없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거룩한 삶을 원하지 않는다. 거룩을 좋아하지 않는다. 거룩과 반대되는 것을 원한다(갈5:17). 사람은 본성적으로 빛을 미워한다(요3:20). 하나님께서 영혼에 선한 일을 하셔야만 사람은 거룩을 사랑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선한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은 시작하신 그 일을 온전히 이루신다(빌1:6). 물론 참된 그리스도인도 살아가면서 거룩에 미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신다(고후8:12).


여덟째, 불신자들은 죄 가운데 잃어버린 자들이고 하나님께 순종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회개를 촉구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결코 쓸모없는 짓이 아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그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이키고 구원을 얻는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옛 본성에 남아 있는 한 거룩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본성적 상태에서 일으켜-스스로가 아닌-“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이다(골1:28).


사람이 본성적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복음은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을 돌이키게 하고 구원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이 선포되면, 성령께서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신다. 죄 가운데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허락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참 믿음을 주신다. 복음은 말로만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권능으로 택한 자들에게 다가가고, 이런 확신 가운데 그들은 성령 안에서 기쁨으로 복음을 받는다(살후1:5-6).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사역이다(고후3:6-8). 하나님으로 인해 복음은 강력으로 역사한다(고후10:4).


아홉째, 이쯤 되면 한 가지 고민이 생길 만도 하다. 불신자들 중에도 아주 도덕적인 사람들이 있다. 철학자나 심지어 무신론자와 같이 그리스도를 아는 구원의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아주 착하게 사는 것을 볼 것이다. 삶에도 아주 성실하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이 사람들에게도 정말 복음이 필요할까? 하나님 앞에 저 정도면 되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들의 도덕적 성취는 하나님께 용납 받기에 전혀 충분치 않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라. 그는 열심 있는 바리새인이었고, 높은 수준의 도덕적 삶을 살았다(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은 후에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보았는가?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불렀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이 이루었던 모든 도덕적 성취를 버렸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배설물로 여겼다(딤전1:15, 빌3:6-8).


비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지혜와, 정의와, 선하심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그들을 심판하여, 경건한 자들은 복으로 들이시고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형벌을 내리실 것을 그들도 안다. 이런 확신으로 믿음을 고백하기도 하고, 경건에 대한 위대한 말을 하기도 한다. 알고 있는 모든 죄를 피하려고 애를 쓰기도 하고, 정욕을 억누르고, 할 수 있는 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신의 삶과 소유를 드려 하나님을 섬기려고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참된 사랑이 없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자신의 선행과 노력으로 지옥의 형벌을 피하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에 대해 그들의 사랑은 억지로 하는 가짜 사랑이다. 실제로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고 섬기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무자비한 주인 정도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계명은 골치 아프고 성가신 것일 뿐이다.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 때문에 속으로는 불평하고 찡그리고 괴로워한다! 영원한 지옥의 불을 피하고 싶을 뿐이다.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의 정욕을 누릴 때로 다 누리면서 지옥의 위험도 피하고 싶은 것이다! 겉으로는 의롭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 이들의 삶은 거룩의 모조품이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거룩의 모조품도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께서 악으로 치닫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이만큼이라도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저들을 본성이 치닫는 대로 내버려 두시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은 사람들의 악한 본성이 갈 수 있는 데까지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일반 은총으로 그들의 사악함을 억제하신다. 몇 가지 방편이 있다. 율법, 양심의 두려움, 죄의 결과, 이 땅에서의 보상, 세상 지도자들, 음식을 포함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체계 등이다. 그리고 복음은 비그리스도인들의 죄를 억제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 죄를 억제하신다. 이로 인해,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고 비그리스도인들도 복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은 결국 회심하게 될 것이다.


불신자들도 분명 도덕적인 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모든 외적인 도덕을 다 더해도 진실로 거룩한 삶을 살지는 못한다.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본성이 새롭게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옛 본성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타락한 옛 본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이 없다. 그리스도로부터 새 마음과 새 본성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없이는 사람은 절대 순종할 수 없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PBA
글쓴이 : 말씀을사모하는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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