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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월터 마샬, "성화의 신비" 6장 행위 구원을 논박함

새벽지기1 2015. 12. 22. 08:16

 

여섯 번째 원리

행위 구원을 논박함

그리스도의 복음은 분명하다. 행위 구원을 말하는 가르침은 하나님의 성령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은혜의 복음 진리가 자연인에게는 어리석게 보인다. 자연인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다(고전2:6, 7, 9, 14).


복음에서 말하는 구원의 길은 분명하고 단순하지만,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행위 구원에서 떠나게 하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 인과율의 체계가 그들의 뼛속 깊이까지 박혀 있다. 생각이 완전히 행위 구원 체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이 체계를 벗어 버리기가 쉽지 않다. 복음을 계속해서 듣는 많은 사람들이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을 쉬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지옥을 피하고 천국에 가고 싶어 한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경건과 잘 훈련된 생활을 위한 열심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라고 계속해서 양심이 증거한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대로 살지 않고 정욕을 따라 살다가 심판을 받게 될까 두려워한다. 이런 두려움이 있는 사람들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설교를 듣지 않으려고 한다.


물론 은혜의 교리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은혜를 값싼 은혜로 둔갑시킨다.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말하면서 복음을 무율법주의로 만든다. 은혜를 왜곡하는 가르침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을 죄악된 삶으로 이끈다. 그러나 더욱더 비참한 것은 은혜의 복음을 믿는다는 사람들마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의 교리에서 물러나 뒤로 숨는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칭의 교리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역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선행을 구원을 위한 절대 조건으로 삼을 때만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위 구원의 교리를 받아들인다. 그들은 우리 믿음의 중심 교리를 ‘개조’해 버렸다. 인간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성화의 교리에 맞게 성경을 새롭게 해석한다. 이런 취약한 기초는 기독교 신앙을 무너뜨린다. 이런 기초로는 누구도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 하지만 그럴 듯하게 들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된다. 가증하고 혐오스러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등장한 것일 뿐이다.


사탄은 지금 거룩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믿음으로 받는 칭의는 거룩하게 사는 데 전혀 도움이 안된다. 그것을 버려라. 복음만으로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다.” 오늘날,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거짓말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정말 위험한 것은 이런 거짓 가르침이 심지어 복음적인 개신교회에까지 흘러들어 복음을 오염시킨다는 사실이다. 이 교리의 가장 큰 문제는 복음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구원이 아닌, 율법의 행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주장하는 것이다. 행위를 통한 구원을 말하는 사람들은 이것만이 구원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통한 구원을 말하는 참 복음만이, 칭의와 성화와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하고 능력 있는 길임을 의심하지 말라.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왜 거짓인지 생각해 보자.

첫째, 선한 일에 진심으로 힘써서 구원을 얻겠다는 사람은 반드시 정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믿음이 아니라 율법의 공로로 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롬9:32).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갈5:4). 이 말이 맞다면,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교리가 거짓임이 분명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


모세의 율법을 받기 오래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순종 때문에 그가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다윗은 모세의 율법 아래 살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행위로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물론 다윗 역시 하나님께 진실한 순종의 삶을 사는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사정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된 것은 아니지만(롬4:1-6), 우리 역시 평생에 그리스도의 율법을 순종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유대교화된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히 그리스도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결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는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뿐 아니라 자신의 행실이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일례로,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이 행한 선행이 더해져서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자들에게 속지 말라.


둘째, 율법과 복음의 근본적인 차이를 기억해야 한다. 율법은 행위를 요구하고, 복음은 행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복음은 구원과 생명을 위해 믿으라고 말한다. 이것이 본질적인 차이다.

갈라디아서 3:12에서 바울은 복음이 요구하는 믿음과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를 대조한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로마서 4:5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셋째,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주신 모든 계명을 진지하게 준행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모세가 준 도덕법 역시 그대로 준행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나누어 서로 다른 것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원받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계명은 지켜야 되지만, 모세의 율법은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계명만 지키면 된다는 새로운 조건을 인정하신 적이 없다. 모세 율법의 권위 또한 부정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마5:17). 스스로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것이다.


다음 사실을 한번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모세 율법의 권위를 분명히 하셨다. 물론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 중에 의식법과 재판관 같은 시민법을 폐지하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덕법의 권위를 폐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온전하게 하셨다. 모세를 통해 주신 도덕법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도덕적 의무를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도들 역시 신자들에게 모세 율법이 정한 도덕적 의무들을 준행할 것을 요구했다. “서로 사랑하라 누구든지 사랑하는 자는 이로써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때문이다”(롬13:8 참조).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엡6:2).


십계명과 도덕법을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폐기된 “율법 조문”이라고 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고후3:7). 그러나 이것은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폐기된 조문이라고 한 것은 율법을 더 이상 완벽하게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율법에 완전하라고 하신다(마5:48). 바울이 말한 것은 생명을 얻고 사망을 피하는 조건으로서의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뜻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십계명은 더 이상 옛 언약으로서의 율법이 아니다(갈2:16, 20, 행:22-25, 행15:10-11).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모세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십계명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지침으로 주어졌다. 십계명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모세 율법이 명하는 도덕법을 지켜야 한다(사실 마5-7장을 읽어 보면, 그 이상의 것이 요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법을 지키기 때문에 의롭게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율법을 의롭게 되는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규칙으로 사용한다면, 율법은 더 이상 "죽게 하는 조문"이 아니다. 완벽한 준수를 요구하는 모세 율법의 속성상 율법을 준수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모세 율법의 완전함은 신자에게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모세 율법은 우리가 목적으로 삼아야 할 완전에 대한 지침을 제공한다. 동시에 우리의 불완전을 드러낸다. 모세 율법의 권위를 벗어 던지지 말아야 한다.


넷째,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을 준수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참된 구원의 길에 반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지금 복음을 통해 계시된 은혜와 믿음을 거슬러 가고 있다. 말로는 은혜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이들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구원의 길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 죄의 능력과 부패에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치료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기 전에, 자신의 진실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고 한다. 자신의 순종을 구원의 근거로 삼으려고 한다. 그리스도만을 구원의 토대로 삼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순종을 힘입어 그리스도를 누리려고 한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의사요 구원자이신 것을 깨달아야 할텐데!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속했는지를 분명히 하기도 전에 스스로 거룩해지려고 한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다(롬10:3-4). 이들은 종종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이 노력해서 얻게 된 율법의 의로 착각한다. 자신의 행위를 복음적 의로 둔갑시켜 그리스도의 의롭다 하심을 받으려 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보면,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유일한 복음적 의는 그리스도의 의뿐이다. 바울은 이 의를 가리켜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롬3:21-22, 빌3:9).


이런 식으로 자기 의를 세워 가는 사람은 아무리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척해도 사실은 그리스도의 의를 외면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한다(갈5:2-4).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면 아무런 의를 얻을 수 없는 잃어버린 죄인, 죽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로 이끄시지 않으시면 자신에게 생명도 없고 선을 베풀 능력도 없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은 은혜로 받는 구원과 행위로 얻는 구원은 완전히 반대라고 가르친다. 이 둘은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11:6). 하나님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에, 사람의 공로를 근거로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서 친히 일하셔서 구원하심으로 누구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신다(엡2:9). 하나님은 행위로 사람을 구원하면 사람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에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돌릴 것을 아신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유일한 일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신 그리스도를 붙잡으라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영광은 결코 사람의 믿음이나 행위로 돌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광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돌아간다. 구원이 은혜에 속하기 위해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다(롬4:16). 믿음은 값없이 주어지는 그리스도를 받는 빈손일 뿐이다. 믿음은 그분을 먹고 마시는 굶주린 사람의 입일 뿐이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구원의 조건으로 행위를 요구하는 복음을 가르친 적이 없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로마서 1:5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위대한 목적으로 "믿음의 순종"을 말한다.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순종과 다른 것이다. 로마서 10:16에서도 바울은 복음의 증거를 믿는 순종에 대해 말한다.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야고보서 2:24은 사람들이 자주 오해하는 본문이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야고보는 '어떻게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는 견지에서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의 삶에서 드러나는 열매를 통해 나타나고 증거되는 칭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구원 얻는 진정한 믿음은 항상 선한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에 대한 자격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자주 금식하고, 많은 거룩한 일들을 하기로 맹세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얻고자 하는 참된 순종에는 이르지 못한다.


왜 그런가? 이런 동기에서 비롯된 순종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거나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락한 본성을 어느 정도 억누를 수도 있고, 위선적이고 비굴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많은 순종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방식으로는 부패한 본성을 조금도 억누를 수 없고, 의무를 전혀 이행할 수 없다. 이런 삶의 방식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삶이 불러오는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이신칭의 교리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교회에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신칭의 교리가 사람들을 순종으로 이끌지 못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일환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그리스도의 율법에 진심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렇게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면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행위 구원의 교리는 오히려 사람들을 불순종하게 만들 뿐이다. 은혜를 저버릴 때, 그 속에 있는 경건한 삶을 위한 유일한 능력도 함께 상실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만 더 언급하려고 한다. 이제 율법의 행위로는 참된 거룩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이려고 한다. 은혜의 복음이 아니고는 참된 거룩에 이를 수 없다.

첫째, 율법의 행위로 받는 구원은 거룩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됨으로 하나님과 화평케 된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할 수 없다. 이런 확신은 그리스도와 누리는 연합과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께서 모든 충만으로 우리와 연합하신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얻을 자격을 가져다주는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신자의 마음에서 실제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방편일 뿐이다. 신자는 믿음이라는 유일한 방편을 통해 복음에서 약속하는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의지한다.


신자가 누리는 신령한 삶과 행복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는 모든 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복이 있는 사람은 이미 영생을 가졌다. 영생을 얻기 위해 거룩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신자에게 주신 영생이 있기 때문에 신자는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다.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율법은 거룩한 실천을 영생보다 앞에 둔다.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복음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행위를 통한 구원 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의미하게 한다. 은혜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가치 없이 여기는 것처럼, 신자도 그리스도를 전혀 소중하지 않게 된다(롬4:14, 갈2:21, 5:2, 4).


그리스도의 계명에 진실하게 순종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이전부터 있었던 여러 형태의 행위 구원 교리들과 다르지 않다. 여느 행위 구원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파괴적이다. 이런 가르침으로는 아무도 거룩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가르침은 의롭게 되기 전에,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과 교제를 누리기도 전에,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새로운 본성을 갖기도 전에,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능력과 방편을 얻기도 전에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행위 구원 교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은총을 실제적으로 받아 누리는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을 파괴하고 앗아 간다. 은혜로 얻는 구원을 아는 지식으로만 이 담을 무너뜨릴 수 있다.


둘째, 율법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가진 본성 또는 옛 본성을 따라 살 수밖에 없다. 물론 이들 중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본성을 가진 참된 그리스도인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있고, 육체를 따라 행동할 수 있다. 바울은 율법적인 구원으로 뒷걸음질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성령으로 시작했으면서도 육체를 통해 완전해지려고 한다는 것이다(갈3:3).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따라 난 것이 아니라 육체를 따라 났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은 이들을 사라의 노예인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에 비교했다(갈4:22-23, 2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새로운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행위 언약인 율법 아래 있지 않다.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4).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5:18).


셋째, 율법은 인간 본성의 무능력을 보여줄 뿐 아니라, 율법을 행할 어떤 능력도 주지 않는다.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의롭게 됨은 분명히 율법에서 생겼을 것입니다"(갈3:21, 새번역). 율법은 생명을 주는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러니 어떤 생명도 약속하지 않는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이 율법에 진실하게 순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복음은 이렇게 선포한다.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7).


이 은혜의 말씀은 생명을 얻는 조건으로 우리가 거룩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값없이 주는 선물로서 거룩을 약속한다. 이런 교리라야 우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할 수 있다(행20:32). 하나님께서 이 가르침을 믿는 신자들을 거룩으로 이끄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이 교리의 특성상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라 기대해도 좋다.


넷째, 인간이 타락하여 완전히 부패한 것이 맞다면, 선행으로 생명을 얻고 행복해진다는 말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생명을 얻는 조건으로서의 선행은, 타락 이전에 누리던 생명을 보존하는 조건으로서는 의미가 있었다. 그때는 율법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다르다. 거룩한 삶을 살라고 인간에게 명령하는 율법은 죄 가운데 죽은 인간을 살릴 수 없다. 온몸이 마비되어 누워 있는 사람에게 '누워 있지만 말고 일어나 많이 걸으면 건강해져서 걸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섯째, 율법은 인간의 죄악과 부패를 치료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율법의 공로로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죄악된 성향과 행위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율법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된 마음 때문에 그렇게 된다. 아직 이 사실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사도 바울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이다(롬7:5, 14). 바울은 육신에 머무는 사람은 율법을 통해 오히려 죄가 그 속에 살아나게 된다고 말한다. 율법의 계명이 오히려 죄를 불러일으킨다.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바울의 마음에 각양 탐심을 불러일으켰다. 율법을 몰랐을 때는 죄는 잠잠하고 그가 살았지만, 율법을 깨닫게 되자 그는 죽고 죄가 살아났다. 구원받지 못한 본성적인 사람에게 율법주의적 교리를 들이대면, 정확히 잠언 9:8에서 말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여섯째, 행위를 통한 구원의 길은 첫째 아담에게 선언된 저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타락 이전에는 아담이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는 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율법은 계속해서 그에게 생명을 주었다. 하지만 아담이 죄를 짓자, 전혀 다른 것을 주었다. 생명이 아닌 사망-죄로 인한 몸과 영혼의 죽음-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 구원의 가르침은 전혀 생명을 주지 못한다.


일곱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것을 완전히 지켜 거룩해지거나 구원을 얻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의 행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주셨다면, 구원은 모세의 율법에 대해 순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정황을 기억하자. 당시 하나님은 언약의 조항으로서만이 아니라 교회가 살아가는 삶의 규칙으로서 모세의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또 다른 언약을 주셨다. 약속의 씨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누리는 복을 약속하는 은혜 언약을 주신 것이다. 율법 언약이 더해진 것은 그 이후였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거룩함이나 생명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자 하셨다. 행위 언약을 주신 목적은, 교회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오직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약속만을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종의 멍에에서 교회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자! 은혜의 새 언약을 진지한 행위 언약으로 뒤바꿔서 끔찍하고 비참한 멍에를 짊어지게 하려는 사람들의 일을 거부하고 책망하자. 이들은 이스라엘이 짊어진 것과 같은 멍에를 우리에게 지우려는 자들이다. 이런 행위 언약을 통해서는 전혀 안식할 수 없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PBA
글쓴이 : 말씀을사모하는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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