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타

[스크랩] 월터 마샬, "성화의 신비" 1장 복음이 이끄는 삶의 시작

새벽지기1 2015. 12. 22. 08:15

 

서론

저자 소개

-1628년 영국의 웨어머스(Wearmouth)에서 태어남.

-1661년에 교구목사로 임명되었지만, 1662년 통일령이 발효되자 그 자리에서 물러남.

-그 후 가스폴트에 있는 한 교회의 목사로 부름받아, 숨을 거두기까지 그곳에서 목회.

-그는 탁월한 설교자요 신실한 목회자.

-1680년 영원한 안식에 들어감.

이 책과 관련해서

이 책은 가스폴트에서 목회하는 가운데 쓴 책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열네 가지 지침을 담고 있다. 이 책은 거룩하게 살고자 했던 저자 자신의 개인적인 싸움과 경험에서 비롯.

저자는 자신이 젊었을 때 가졌던 신앙은 기쁨과 위로의 원천이 되기는커녕, 번민과 고통만 주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 영혼의 상태를 고민하느라 수년을 괴로움 가운데 보냈는데, 몇몇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해 보기도 했다. 그 중에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도 있었다. 나중에는 탁월한 청교도 신학자였던 토머스 굿윈(Thomas Goodwin)과도 상의하며 문제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짓누르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시간이 갈수록 성령 안에서의 기쁨과 양심에 큰 평안을 누리는 가운데 거룩에 더욱 자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영혼을 큰 평안으로 이끌었던 성경의 탁월한 교훈들을 글로 남기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다.

1954년판 「성화의 신비」에서 서문을 쓴 퍼시 루오프(Percy O. Ruoff)가 이 고전의 가치를 잘 요약하고 있다.

「성화의 신비」(1692년에 처음 출간된)는 비교적 가치가 덜한 수많은 아류작들에 지금껏 가려져 있었다. 그동안 이 고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참 개탄할 만한 일이지만, 이제 성화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책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약간 고어체이기는 하지만 독자들은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신령한 진리들이 묻힌 금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의 백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간절히 우리 마음에 심어 주고자 했던 교훈을 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영적 싸움을 위한 새로운 지침 같은 것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다.”

첫 번째 원리

복음이 이끄는 삶의 시작

이 장에서 나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삶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서 거룩, 의로움, 경건, 순종, 참된 신앙이라고 일컫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지침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십계명으로 요약된 성경의 도덕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고, 특별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대계명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마22:37-39). 성경의 나머지 부분들은 사실 이 계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어떻게 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지 보이려고 한다.

우선,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바라시는 거룩은 영적인 것이다(롬7:14을 보라). 겉으로 드러나는 선행과 사랑만을 진정한 순종이라 하지 않는다. 순종은 물론 겉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참된 거룩이 될 수 없다. 참된 거룩은 마음에서 나온다. 거룩한 생각과 동기와 감정이 바로 참된 거룩이다. 이런 거룩은 주로 사랑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다른 선행도 사랑에서 나온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은 이런 내적인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둘째로, 참된 거룩은 단순히 죄악된 정욕을 억제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보다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참된 거룩은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신자가 준행해야 하는 율법은 대단히 포괄적이다. 야고보서 2:10은 계명 하나를 어기면 전체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율법을 요약하면, 온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분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분의 정의, 거룩, 주권적인 권위, 그분의 모든 작정, 계명, 판단, 행사를 사랑해야 한다! 신자는 하나님을 모든 선의 원천으로 알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항상 그분을 섬기고, 온전히 자신을 드리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이에 덧붙여,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친구든 원수든 누구나 다 우리의 이웃이다. 이 두 가지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보다 위대한 계명은 없다. 이것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이 가르친 핵심이다(마22:36-40, 막12:31).

이 고상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경건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강력하고 효과적이고 유일한 길을 아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기대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 길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이다. 이 책 전체는 신자가 거룩해질 수 있도록 하는 방편을 다룬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방편을 쓸데없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여긴다. 왜 그런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정확히 알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나가서 그렇게 할 수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애를 써 봐도 해내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거룩한 삶을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거룩을 영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거룩한 삶 자체를 목적으로 보지 않는다. 거룩 자체가 바로 수단과 방편을 필요로 하는 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생긴 데에는 목사들이 일조한 바가 크다. 이들은 자신이 섬기는 회중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데 설교 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잘도 말하면서 그들이 실제로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율법에 진정으로 순종할 수 있게 하는 방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의롭게 사는 삶을 마치 아무 훈련이나 기술 없이 열심히만 하면 되는 단순 노동 정도로 치부한다. 부지런히 힘쓰고 애쓰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 줄로 생각한다.

이제 막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이런 흔한 잘못에 빠져 실패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단순히 율법이 정하는 의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하지만,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신자로서의 의무를 효과적으로 준행할 수 있는지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있게 하는, 단 하나의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편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잠잠히 앉아서 이 방편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왜 이 방편을 배워야 하는가? 명백하고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본성적으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요구하시는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는, 완전히 무능력한 존재다. 인간은 죄와 사망으로 이미 죽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처음 조상인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롬5:12-21, 엡2:1-3, 롬8:7-8). 이것이 바로 원죄에 대한 가르침이다. 원죄의 교리는 지금부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말하는 모든 것의 토대가 된다. 원죄의 교리를 인간의 삶에 적용했을 때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거룩한 삶을 살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건강하고 힘이 센 종은 ‘저리 가라’고 하면 가고 ‘이리 오라’고 하면 온다. 그러나 병들어 침상에 누워 있는 종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또 자신의 머리카락을 데릴라가 자르도록 내버려 둔 삼손이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고 말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 죄를 지어 이미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삿16:20). 그러므로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그 일을 할 수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기도와 교리문답과 신앙고백을 통해 자기에게 원죄가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행위로는 원죄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말은 하지만, 어떻게 하면 율법을 지키고 힘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하면’ 될 줄로 안다. 이제 노력하고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자신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모른다!

모든 비그리스도인들도 반드시 알아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자연적 이성의 빛으로 율법의 일이 무엇인지 안다(롬2:14). 그러나 자연적 이성만으로는 그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방편을 발견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를 통해 가르침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제멋대로 다니다가 길을 잃은 양과 같다. 목자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는 어느 길로 돌이켜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신자의 마음과 삶이 율법의 수준으로 자라가는 과정이 성화다. 칭의와 마찬가지로 성화 역시 여러 방편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다. 여기서 방편이라 함은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포함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성화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지식을 통해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주어진다(벧후1:2). 사람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의의 종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교리가 있다(롬6:17-18). 이 악한 시대를 살면서 죄와 사탄에 대적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알고 무장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있다(엡6:1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될 수 있도록 성경을 통해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딤후3:15-16).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까지 낮아지셔서 성경에 난 생명의 길을 가르치신다. 그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먼저 이 길을 배워야 한다. 성경이야말로 경건한 삶을 체득하는 유일한 길이다.

참된 경건의 길을 배우는 것은 이중적인 일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경건에 대한 해묵은 개념을 버려야 한다. 지혜로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미련해져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참된 경건의 길을 가르쳐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 길을 알기 위해 성경을 탐독해야 한다. 성경 기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자.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시119:5, 33).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시143:10).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5). 확실히 이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많은 교훈과 지침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있는 능력-수단과 방편-이었다.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편을 알아야만 한다. 이런 방편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주고,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준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도덕적 계명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핵심이다. 거룩한 하나님이 주신 이 거룩한 계명과 상치되는 그 무엇도 허락하지 말라. 이 계명을 주신 거룩한 하나님이 거룩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성경에는 그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자신의 영혼과 교리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참된 경건과 일치하는가이다(딤전6:3). 그리스도께서도 이 시금석을 가지고 자신의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증명하셨다(요7:17-18). 그리스도께서는 열매로 거짓 선지자를 안다고 하셨다(마7:15-16). 특히 그들의 교훈이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편을 알지 못하면 거짓 교훈에 쉽게 미혹된다.

성화를 이루는 참된 길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삶을 사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한 결코 거룩한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 낼 수 없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방편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에게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구원과 성화의 방편을 택하시고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라는 방편을 통해서만 신자의 삶을 복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힘쓰고 애쓴다고 누구에게나 관을 씌우시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따라 애를 쓰는 자에게만 관을 씌워 주신다(딤후2:5).

성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방법을 잘못 알면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도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모두 마찬가지다! 물론 비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할 때가 많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율법의 외적인 요구를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실패한다. 이들은 겉으로 선하게 드러나는 것에만 신경을 쓰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마음에서 우러나는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둘째, 거룩한 삶은 그저 고리타분하기만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삶을 포기한다! 만약 이들이 성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이 지혜의 길이 다름 아닌 “기쁨의 길, 평강의 길”인 것도 알았을 것이다.

셋째,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애쓰지만 잘못된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매우 빠르게 달려가는데 거룩한 삶을 향한 바른 길에는 단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한다. 온갖 시도를 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마치 열심이 특심인 사람들은 금식과 같이 자기 몸을 괴롭게 하는 금욕적인 방법으로 정욕을 죽여 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욕은 보란 듯이 다시 일어난다.

앞에서 언급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거룩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효과적인 방편이 무엇인지 알게 하려는 이 노력에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바란다. 나는 고통스럽게만 할 뿐 거룩에는 아무런 진보를 주지 못하는 허탄한 노력에서 신자들을 지켜 내고 싶다! 하나님께서 이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의 마음을 넓히셔서 그들이 즐거움과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의 계명의 길을 달려가게 되기를 바란다! 9p-37p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PBA
글쓴이 : 말씀을사모하는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