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Ways To Hear God’s Voice) (마26:36-46)

새벽지기1 2015. 12. 6. 21:18

 

1.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 혹은 어떤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 있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십니까? 아마도 우리 중 대다수는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할까?” 얼른 생각하면, 그것으로 충분해 보입니다. 하지만 따져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나에게’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다. ‘나’의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 오직 나 하나만을 생각합니까? 배우자도 상관 없고, 부모도 관심 밖이고, 아이들도 상관할 바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선택과 결정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나 자신도 결국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생각할 때 나 하나만이 아니라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유익하면 충분합니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유익하다’라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십시다. 무엇이 유익한 것입니까? 당장은 유익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해로운 것이 있습니다. 푹신한 카우치는 잠시 동안 앉아서 쉬기에는 유익합니다만, 오래 앉아 있기에는 불편합니다. 대신, 딱딱한 나무 의자는 잠시 앉아 쉬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오래 앉아서 무엇을 하기에는 훨씬 더 유익합니다. 입맛에는 좋지만 건강에는 해로운 것이 있고, 입맛에는 쓰지만 건강에는 유익한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유익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 것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나에게 유익한지 어떤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앞에 두고 “이것이 나에게 유익한가?”라고 묻고 대답하는 것으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 질문에 정확히 대답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도 아니고, 우리가 내린 대답이 얼마나 정확한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유익’이라는 기준보다 더 믿을만한 것은 없는지 묻게 됩니다.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보려는 사람들이 이런 경우에 제기하는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을까?” 질문의 초점이 ‘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이동된 것입니다. 작은 변화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은 세계관이 뒤집어진 것입니다. 믿고 안 믿고의 차이가 이렇게 큰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 유익의 관점에서 보던 사람이 하나님의 뜻의 관점에서 보는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나와 다른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집니다. 나에게도 유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전쟁의 한 복판에서 전투에 임하고 있는 병사는 전체 전황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가 할 일은 작전 본부에서 떨어지는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작전 본부는 전체 전황을 보기 때문에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전투에 임한 병사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느냐?”에 있어야 합니다.


2.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어찌보면, 나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것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분의 음성은 잘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사건건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았다고 말하지만,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만 있다면 기쁘게 순종하겠는데, 그럴 수 없어서 답답하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대해 말씀 드리려 합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여러 가지 채널을 사용하십니다. 일상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방법 혹은 채널을 모두 알아야 하고, 그 채널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루 하루 끊임없이 다가오는 선택과 결정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면 그 채널들을 다 알고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세 가지 채널에 집중하여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기도 중에 직접 응답하십니다. 귀에 들리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물론, 녹음기에 담을 수 있는 음성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의 귀에 들리는 음성인데, 너무나도 또렷하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그렇게 흔하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마치,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듯, 하나님과 대화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일이 별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청소년기에 성경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읽으면서 이점이 참 궁금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잘 못 가면, “성경의 이야기들은 모두 전설이다”라는 잘못된 결론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소위 ‘후손의 오만’(arrogance of the descendents)이라는 오류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후손의 오만’이란 과거의 일들을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 일은 과거에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향 때문에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전설로 취급하는 잘못에 빠집니다.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성경에는 많은데 우리에게는 잘 일어나지 않는 현상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을 바꾸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영성이 그만큼 퇴락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이 대기에는 수 많은 종류의 전파 통신이 오고 갑니다. 그 전파를 잡아내는 기계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고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포착할 우리의 ‘영성의 안테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이르면 때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렷이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점쟁이들이 전하는 악령의 음성처럼 “남쪽으로 가라!”거나 “물을 피하라!”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기도 중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을 듣고 우리는 깊은 위로와 평안을 얻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용기를 얻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에 선교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상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곳에 있던 유대교인들이 그의 선교를 방해했고, 고린도시에 가득했던 미신의 추종자들이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처음에는 선교의 결실이 변변치 않았습니다. 악전 고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적잖이 낙심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행 18:9-10). 바울은 이 음성이 힘을 내어 일 년 육 개월동안 그곳에 거하면서 역경에도 불구하고 선교 활동을 지속합니다.


3.


둘째, 하나님은 마음에 일어나는 깨달음이나 확신을 통해서 응답하십니다. 기도 중에 어떤 문제를 붙들고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과연 이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지, 그분이 기뻐하실 일인지를 묻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 든든한 평안이 들어찰 때가 있습니다. 불안하고 두렵던 마음이 한 순간에 변화됩니다. 그럴 때면, 그 마음의 변화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이 아닌지를 조심스럽게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은 끝내 그 불안감과 두려움이 떠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혹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싸인이 아닌지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시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생각할 때, 두려움이 예수님의 마음을 압도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 26:38)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지도자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는지를 잘 말해 주는 대목입니다. 그분은 할 수만 있으면 그 운명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힘써 기도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뜻을 좀 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성부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이미 당신의 뜻을 충분히 전하셨기 때문에 침묵하셨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세 번이나 이 문제를 두고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세 번째 기도를 마치고 났을 때, 그분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침묵하셨지만, 성자 예수님의 마음에는 응답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든든한 평안과 확신이 들어찼을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났을 때, 예수님은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라고 말했던 몇 시간 전과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십니다. 잠에 골아 떨어져 있는 제자들을 깨우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자고 쉬어라. 보아라. 때가 이르렀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마 26:45-46).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받은 기도 응답은 ‘마음의 변화’였습니다. 그분은 자주 성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하지만 때로 이렇게 마음에 깨달음으로 혹은 확신으로 혹은 평안으로 응답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의 변화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시는 채널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4.


셋째,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여기서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선포되는 ‘들리는 말씀’을 모두 가리킵니다. 성경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시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기록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영감된 말씀’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단순한 인간의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감이 담겨 있습니다.


이 진실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행하여 체득해야만 “아, 그렇구나! 그래서 성경이구나!”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죽어 있는 문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무릎 꿇고 읽는 동안에 그 문자가 꿈틀거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4:12)


시편 저자는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119:105).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발견하고 이정표를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인생길에 대한  안내(direction)가 나와 있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영적인 GPS입니다. 이것은 시편 저자의 체험적인 고백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수 세기 동안 수 많은 신앙인들이 이 시편의 고백에 공감했기에 오늘 우리가 읽는 성경 안에 수록이 된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들은 히브리서 저자의 말과 시편 저자의 말에 공감할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여 선포되는 ‘들리는 말씀’도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매우 중요한 채널입니다. 들리는 말씀에 속하는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설교입니다. 설교가 기록된 말씀에 든든히 뿌리를 두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설교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설교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겸손한 마음으로 설교에 귀를 기우리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도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살전 2:13) 


여기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신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히 받아들인 것을 칭찬합니다. 그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말씀이 그들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그렇게 생각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바울같은 설교자가 있다면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는데…” 지당한 말씀이기는 합니다만,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 지금 예수님처럼 설교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겸손히 듣겠는데, 바울 정도의 설교를 가지고서야 어디…” 예수님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 같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겸손히 머리 숙이겠는데, 저 무식한 전도자의 말을 어떻게 듣겠는가?” 결국, 이같은 생각은 하나님의 음성을 회피하기 위한 구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귀 기우리면, 누구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5.


이상에서 말한 세 가지 채널 외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채널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주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말에도 종류가 많습니다. 잡담이 있고, 한담이 있고, 재담이 있고, 험담이 있으며, 농담이 있습니다. 그런 말들은 귓등을 스치는 소음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다해 나누는 정담이 있고 또한 진담이 있습니다. 믿음 가운데 나누는 영적 대화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같은 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도 있고, 뉴스를 읽거나 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연을 관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도 있고, 땀 흘려 일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여러 채널을 통해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그 모든 채널에 영적인 주파수를 맞추고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일관되게 힘쓴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찾는 일에 점점 더 익숙해질 것입니다. 영적 생활도 경험과 경륜과 관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일관되게 노력하다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직감하는 영적 감각이 형성되고 발달합니다. 기도 중에 마음의 변화를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일에 눈이 뜨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려지는 말씀을 통해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일에도 경륜이 쌓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한 가지 목적을 삶의 중심 과제로 두고 일관되게 살다  보면, 그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과 지향과 열망이 하나님의 뜻에 점점 일치되어 갑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택과 결정을 하기에 힘겨운 씨름을 해야 하지만, 그같은 노력이 어느 정도 쌓이면 점점 더 쉬워집니다.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고, 소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과 일치합니다. 처음에는 내 존재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했다면, 나중에는 내 존재 자체가 하나님과 연합됩니다. 그렇게 내 뜻과 생각과 의지와 꿈과 소원이 하나님의 그것과 일치되는 것이 우리의 영적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진실한 열망이 있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우직하게 그 뜻에 순종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을 해야 할 때도 있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버려야 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적’을 경험해 보고 싶어하지만,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것에 대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고 하면서도 막상 그 음성을 듣기 위해 자신을 훈련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게을리 합니다.


헨리 나우웬이 기도에 대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정직하게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정직한 기도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기도를 통해 일방적으로 나의 소원만을 하나님께 알리는 것이라면 용기가 필요 없습니다. 인내심만 있으면 됩니다. 욕심만 특심하면 됩니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한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음성을 듣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듣지 않는 것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세요. 나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치 않습니다”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6.


저는 오늘 설교 시간의 대부분을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정작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뜻을 찾기 원합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이 있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 마음만 진실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채널에 우리의 영적 주파수를 맞출 것이며, 항상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마음으로 귀 기우리며 살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운 일도, 모호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 나는 그저 나 좋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사십니까?  부디, 그 상태에서 도약하시기를 권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사람이라면, 내 뜻보다 그분의 뜻을 더 높이 여겨야 마땅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마음을 쏟는 변화가 속히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데, 저는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순종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럴 용기가 있습니까? 때로,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그럴 용기가 없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핑게대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같은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기 바랍니다.


혹시, “저는 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있고, 항상 그 뜻대로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장 위험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사람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기록된 오점들은 대부분 그처럼 하나님의 뜻에 대해 확신했던 사람들에 의해 남겨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신앙적 오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혹시, “아, 저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에 두렵습니다. 저는 자주 하나님의 뜻보다 제 욕심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라고 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있음을 알고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큰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희망의 징조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욕심 사이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이 희망의 징조입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절망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면, 우리는 겟세마네의 예수님처럼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두려워 떨더라도 진실한 기도 후에는 용기를 얻어 하나님의 뜻을 향해 걸어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언제나 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

주님을 예배하고 섬긴다고 하면서도

저희는 저희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며 살았습니다.

저희 삶의 중심 과제가 주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유익에 있었습니다.

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저희의 세계를 뒤집어 주소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주시며

그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저희 자신의 능력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도우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