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감사를 명하는 이유”(Ordered to Give Thanks) (빌립보서 Philippians 4:4-9)

새벽지기1 2015. 12. 8. 06:09

                                                                            

 

1.

Happy Thanksgiving! 2010년도 추수 감사절을 맞아 교우님들의 마음과 영혼에 그리고 교우님들의 가정과 직장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추수감사절 휴가를 맞아 오고 가는 일이 많은데, 부디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생존하고 성공하려는 사람이라면 기억해 둘 말이 있습니다. “항상 불평하라. 그 무엇에도 감사하지 말라.”
사안이 중요할수록, 기뻐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이면 얕잡아 보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아흔 아홉가지가 만족스러워도 불만족스러운 한 가지를 크게 확대하여 불평해야 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절대 양보하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침묵하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사람을 깔아 뭉개려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습성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깔판(doormat)처럼 짓밟히지 않으려면, 아우성을 쳐야 합니다. 항상 불평하고. 그 무엇에도 감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무엇인가 손에 쥐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감으로 인해 잃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항상 불평하라. 그 무엇에도 감사하지 말라”고 권하는 이유는 현재 상태에 만족하더라도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전략적으로 불만족한 것처럼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다 보면, 우리 마음이 진짜 그렇게 변해 버립니다. 그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마음의 지도입니다. 더 많은 것을 손에 쥐려 하다 보면, 스스로 마음을 삭막하게 만들 위험에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삭막해지면, 인간 세상이 동물이 사는 정글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같은 변화를 우리가 사는 이 미국 사회에서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미국식 삶의 전략과 정 반대의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특히, 오늘 읽은 빌립보서와 다른 편지들에서 바울 사도는 ‘자족’과 ‘기쁨’과 ‘감사’의 덕에 대해 말합니다. 몇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빌 4:4)

“항상 기뻐하십시오.”(살전 5:16)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엡 5:20)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골 3:15)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살전 5:18)

이와 비슷한 말씀들을 다 열거 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그 많은 말씀들을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항상 기뻐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여기서 고민이 생깁니다. 성경은 미국 사회에서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이 비정한 사회에서 항상 기뻐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다가는 어떻게 될지 불을 보듯 뻔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성경의 말씀을 외면하고 살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기도 싫고, 말씀에 불순종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과연,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스럽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바울 사도가 살던 시대와는 너무 다릅니다. 이 복잡한 세상에 사는 사람이 원시 시대나 다름 없는 바울 시대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럴 듯하게 들리는 말입니다만,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알고 보면, “항상 불평하라. 어떤 일에도 감사하지 말라”는 미국식 지혜는 우리 모두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가뭄에 찌든 논바닥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고, 우리 사회에는 불평 불만의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반면, “항상 기뻐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바울의 명령은 우리 마음이 보드라운 애기 살처럼 변화되고 우리 사회가 낙원으로 회복되는 비밀입니다. 이 말씀은 2천 년 전에도 진리였고, 지금도 진리이며, 또한 앞으로도 진리로 증명될 것입니다.

 

2.
“항상 기뻐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말은 좋게 들립니다만, 따져 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먼저, 명령형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쁨이라는 것이 명령으로 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참 기쁘다”라는 말은 되지만, “야, 너, 기뻐해!”라고 욱박지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참, 감사하구나!”라는 표현은 말이 되는데, “야, 너, 감사해!”라고 명령하는 것은 이치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쁨과 감사는 감정의 문제입니다. 감정은 저절로 느껴져야지, 억지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뻐하라” 혹은 “감사하라”는 명령이 어색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뻐할 것을 명령하고 감사할 것을 명령했을까요? 이것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기뻐하는 시늉이라도 하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척 하고 살라는 뜻도 아닐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허위와 위선과 가식과 시늉을 거부합니다. 성경 말씀이 그런 식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할 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뭘까요? 왜, 감사를 명령하고, 기쁨을 명령했을까요?

첫째, 이 명령은 때로 감사할 수 없을 때가 있으며 기뻐할 수 없을 때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저절로 감사의 마음이 항상 흘러 넘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늘 마음이 기쁠 수 있다면, 이런 명령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때로 감사할 수 없고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곤 합니다. 또한 우리의 감정은 아주 쉽게 출렁입니다. 감정적인 동물인 인간이 탈도 많고 일도 많은 세상에서 살다 보면, 기뻐할 수도 없고 감사할 수도 없는 때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둘째, 이 명령은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가능할뿐 아니라, 그렇게 살도록 힘써야 한다는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상황에 휘둘려 살지 말라는 뜻이고, 감정의 출렁임에 따라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 물으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우울증(depression) 같은 질병에 빠지면, 자신의 뜻대로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이 증발한, 사막같은 혹은 늪과 같은 일상을 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울증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말씀 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우울증을 가리켜 ‘현대판 전염병’이라고 말합니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18세 이상된 미국 국민의 약 10%가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또한 전체 국민의 15% 이상이 일생을 살면서 한 두 번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있다고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의 60%가 우울증 환자라고 합니다. 젊은 세대로 가면 더욱 위험은 커집니다. 십대 청소년의 약 20%가 성인이 되기 전에 우울증에 걸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같은 경향은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나와 내 자녀는 예외일 거라고 장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울증은 더 이상 감출 일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일도 아닙니다. 감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신 분들은 우울증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에 매우 어려워하십니다. 그것이 마치 신앙이 약하다는 증거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은 영성가 헨리 나우웬(Henri Nouwen)도,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도, 그리고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분으로 평가받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선교사도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습니다. 그같은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여 우울증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우울증을 인정하고 전문적인 도움을 받아 치료하는 것에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울증의 치유 과정에서 믿음은 아주 주효한 약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에 와서 우울증에 대해 강의하신 분이, ‘우울증’(depression)과 ‘우울함’(being blue)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씀한 것이 기억납니다. ‘우울증’에 빠진 분들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울함의 감정 안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과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명령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3.

어느 식당에 갔다가 벽에 걸린 그림에 적혀 있는 글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구덩이에 빠졌다면, 첫 번째로 할 일은 더 파들어가기를 멈추는 것이다”(If you find yourself in a hole, the first thing to do is to stop digging.). 그 말을 읽는 순간 “그렇다!”고 공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울함의 구덩이에 빠진 것을 발견한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이 더 우울해지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감정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타락성을 확인하곤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 버리면 더 깊이 파고 들어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미움’이라는 구덩이에 빠지면,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앙심’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외로움’이라는 구덩이에 빠지면, 더 깊이 파고 들어가 ‘고독’과 ‘소외’를 자초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게 되면, 자신을 ‘저주’하고 ‘심판’하기까지 구멍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려 합니다. 우리의 본성이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그 타락한 본성을 따라 가면, 우리의 인생을 온통 불평과 불만과 저주로 채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라” 혹은 “기뻐하라”는 명령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따라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러므로 어떤 상황에 처할 경우,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이 주어지는 셈입니다. 내가 떨어져 있는 감정의 구덩이를 더 파고 들어가든지, 아니면 그 구덩이에서 나오는 길을 찾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본성을 따라 가면 우리는 감정의 구덩이를 더 깊이 파고 들어가게 됩니다. “감사하라” 혹은 “기뻐하라”는 명령은 구덩이 파기를 멈추고 그곳에서 빠져 나오기를 선택하고 그렇게 힘쓰라는 것입니다. 혹시나, 여러분 중에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참 좋은 말이지요. 하지만 삶의 비정한 현실을 제대로 경험해 보고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당신이 나같은 상황에 처한다 해도 같은 말을 할지, 보고 싶군요. 항상 기뻐하라구요? 모든 일에 감사하라구요? 구덩이에서 나오기를 선택하라구요? 제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이 쉽지 않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선교 활동을 하면서 험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기뻐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기를 힘썼습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때로 낙심되고, 때로 분노를 경험하기도 하고, 때로 우울함에 빠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의 구덩이를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바울 사도가 한 말은 귀 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경험했던 믿음의 비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아, 어떻게 우리같은 사람에게 바울 같이 살기를 바라십니까? 그분은 기독교 역사 상 최고의 영적 거장이었고, 나는 그저 평범한 신자에 불과합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그분을 닮을 수 있겠습니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생각은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기쁨과 감사를 영원히 빼앗아 가려는 사탄의 속임수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바울의 그것처럼 대단한 경지에 이를 수 없을지 몰라도, 시작은 해야 합니다. 그리고 꾸준히 성장해 나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결국 어느 수준까지 오를 수 있느냐를 따지지 말고, 할 수 있는대로 믿음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담대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9절)

누구에게 하는 말씀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같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첫 걸음부터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능력 안에서 자라가면, ‘종종’ 기뻐하게 되고, ‘자주’ 기뻐하는 단계로 자라다가, 마침내 ‘항상’ 기뻐하는 단계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일’에 감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자라면서 ‘여러 가지 일’에 감사할 수 있게 되고, 점차로 ‘많은 일’에 감사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나중에는 ‘대부분의 일’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자라서 결국 ‘모든 일’에 감사하는 단계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4.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바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요소’(God-factor)가 우리의 생각과 판단에 늘 포함되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엄연한 현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이 세상의 사건들은 우연과 사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것이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 있습니다. 그분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이 세상을 든든히 쥐고 있으며, 내 삶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 진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모든 요소들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요소 때문에 마음에 평안을 얻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6절과 7절을 유진 피터슨은 다음과 같이 풀어서 번역합니다.

마음을 졸이거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 대신 기도하십시오. 간구와 찬양으로 여러분의 염려를 기도로 바꾸어, 하나님께 여러분의 필요를 알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대한 감각, 곧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믿음이 생겨나서 여러분의 마음을 안정시켜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삶의 중심에서 염려를 쫓아내실 때 일어나는 일은 실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연약한 인간이기에 어려운 상황을 마주했을 때 염려가 되고 근심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감정의 변화조차 겪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믿음의 목표는 모든 감정을 죽이거나 제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은 감정을 더 활발하게 만들고 잘 관리하여 유익하게 사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감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주 귀한 선물입니다. 감정을 잃어 버리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내가 그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감정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감정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감정의 널뛰기에 놀아나지 않게 됩니다. 염려하기보다는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합하여 유익하게 만드실 것을 믿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어느 덧 근심과 염려는 사라지고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평화가” 마음에 들어 차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여전히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렇게, 우리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인정하고 의지하게 되면, 우리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분이 모든 일을 엮어서 유익하게 하실 것을 알고 믿는 순간,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짓눌려 근심과 염려에 사로잡히면,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갑자기 시야가 좁아지고, 문제는 점점 더 커 보입니다. 꼼짝없이 죽었다 싶은 느낌이 듭니다. 그럴 때, 구덩이를 더 깊이 파고 숨고 싶어집니다. 바로 이 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며 그분께서 여전히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좁아졌던 세상은 다시 넓어지고 움츠려졌던 마음은 다시 기지개를 펴게 됩니다. 이 때, 우리 마음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 이미 채워져 있고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족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지금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채워주시리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내게 지금 허락되지 않는 것은 내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임을 믿고 받아들일 마음이 생깁니다. 나의 행복을 나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의 선의를 믿고 의지하는 순간, 나를 옥죄던 상황들은 갑자기 그 힘을 잃어버리고 마음에는 평강과 기쁨이 들어찹니다.
빌립보서 4장 후반부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1-13절)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에, 바울 사도는 가난하게 살아도 주눅들지 않고 찌들리지 않았고, 큰 돈을 가져도 그것으로 인해 타락하지 않고 경건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있었기에 그는 남들이 다 불평할 것 같은 상황에서 진실하게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에 근거하여 오늘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5.

어떤 사람이 감사할 조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놓았습니다. 긴 글이어서 일부만 소개합니다.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건 아이가 가출하여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

깎아야 할 잔디, 닦아야 할 유리창,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이고

……

주차장 맨 끝 먼 곳에 겨우 자리가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데다
차도 있다는 것이고

……

교회에서
성가대 뒷자리 아줌마의 엉터리 찬송이 영 거슬린다면
그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

……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이메일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면
그건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지요.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일궈진 불평, 불만들...
바꾸어 생각해보면
또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참, 잘도 썼다 싶습니다. 매사를 이런 식으로 합리화시키며 현실에 안주하며 나태하게 살아간다면, 그것도 큰 문제입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지 마음만 돌려 먹으면 늘 감사할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아주 좋은 글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보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여 자족하는 마음을 얻을 때, 이같은 마음의 여유와 시각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럴 때, 감사의 조건은 더욱 더 많이 눈에 보이고, ‘항상’은 아니더라도 ‘자주’ 기뻐할 수 있고, ‘모든 일’에는 못하더라도 ‘웬만한 일’에는 늘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은 기쁨을 낳고, 감사는 감사를 낳습니다. 불평이 불평을 낳고, 슬픔이 슬픔을 낳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고, 마침내는 감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얻게 됩니다. 그로 인해 ‘마음의 부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더 가져서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대로 행복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쁨과 감사를 전염시킵니다. 불평 불만이 가득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 부정한 바이러스가 전염됩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일에 감사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그 긍정의 바이러스가 전염됩니다.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나 자신만이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적인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는 두 가지의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사람들이 제시하는 삶의 전략이 있습니다. “항상 불평하라. 그 어떤 것에도 감사하지 말라.” 반면, 바울 사도가 그리고 성경의 많은 저자들이 제시하는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세상의 지혜는 우리 손에 많은 것을 쥐어줄 지는 모르나, 우리의 마음을 사막처럼 만들 것이며, 불평 불만의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사람으로 만들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지배하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동물의 왕국보다도 못한 상태로 파괴될 것입니다. 성경의 지혜는 우리 손에 많은 것을 쥐어주지는 못할지 모르나, 우리의 마음을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처럼 만들어 줄 것이며, 기쁨과 감사의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이 지혜가 지배하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낙원이 회복될 것입니다.
추수 감사절을 지내면서, 부디, 여러분 각자의 마음을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눈을 뜨고 그분의 사랑에 머물러 살아감으로써 자족하는 마음을 얻고, 그 마음으로써 항상 기뻐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며, 이 세상에 행복 바이러스, 기쁨 바이러스, 감사 바이러스를 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실로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