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고난의 심장을 통과하다"(Walking through the Heart of Suffering) " (마태복음 5:43-48; 요한복음 16:33)

새벽지기1 2015. 12. 10. 03:50

1.

1996년 4월4일, 앞길이 창창해 보이던 16세의 청년 웨이드 에드워즈(Lucius Wade Edwards)는 지프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노스캐롤라이나의 해변에 있는 가족 별장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가족들과 함께 할 즐거운 시간을 생각하며 들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고속도로 위로 강한 돌풍이 불어칩니다. 그 돌풍은 웨이드가 타고 있던 지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더니, 한 번 공중회전을 시킨 다음, 고속도로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웨이드의 꽃다운 청춘이 한 순간에 무참하게 깨어졌습니다.

이 청년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존 에드워즈(John Edwards) 상원의원과 그 아내 엘리사벳(Elizabeth)의 큰 아들입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패배한 직후, 엘리사벳에게서 유방암이 발견되었습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2005년에 유방암을 완전히 정복한 엘리사벳은, 최근 남편의 대통령 후보 유세를 앞두고 다시 심각한 충격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유방암이 재발되었고, 엉덩이뼈에까지 전이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관리할 수는 있지만, 완치는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미국은 지금, 이 부부가 앞으로 어떻게 대통령 선거에 임할지, 관심을 기우리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최근에 자신의 근황에 대해 인터뷰를 했는데, 그 인터뷰에서 죽은 아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제 생각을 며칠 동안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이 한 말을 그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제 아들을 구해주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야 했습니다. 웨이드는 부드럽고 착한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의 엄마라고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 애는 항상,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버려진 사람들을 찾아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애는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열여섯 밖에 안 되었지만, 이 점에서 그 애는 정말 특별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점수를 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점수를 주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누군가를 보호해야 한다면, 당연히 그 애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애를 보호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바람이 그 애를 도로 밖으로 내팽개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손이 그 아이를 도로 밖으로 내던진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착한 아이의 죽음에 개입하지 못한 하나님, 아니 그 애를 죽게 한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인가?" 제 책에서도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저는, 제 하나님은 깨달음(enlightenment)과 구원(salvation)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일 뿐이라고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제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을 다시 생각해야 했습니다. 저의 하나님은 보호를 약속하지 않으신 하나님이며, 그래서 제 아이를 보호하실 수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 암으로부터 저를 구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이 되면 저를 깨우쳐 주실 것입니다. 제가 올바로 살았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저를 깨우쳐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참으로 믿고 있다면, 저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제 하나님이 제게 해 주신 약속의 전부입니다. (Newsweek, April 9, 2007)

 

2.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엘리사벳의 말 속에 하나님께 대한 실망과 분노 같은 것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존과 엘리사벳은 연합감리교회 교인으로서, 오래 전부터 교회 활동에 아주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욥을 생각나게 할 만큼 연속되는 시련 속에서, 엘리사벳은 교회에서 배워 온 하나님 상을 두고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그 씨름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고, 얼마나 많은 한숨을 내쉬어야 했을지, 어느 정도 상상이 됩니다. 밤을 하얗게 새운 날들은 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하나님을 부정해 보기도 하고, 저항해 보기도 하고, 등을 져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결국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그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분으로 그분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삶에 개입할 수 있다면, 단지 깨달음을 주시는 것으로, 영감을 주시는 것으로 개입할 뿐, 저 멀리서 팔짱을 끼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처럼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의 말을 들으면서,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공감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우리 중에 역사하고 계시다고 목청 높여 말하는데, 실제 생활 속에서는 번번이, 무참하게, 속절없이, 무력하게 운명의 돌팔매와 불화살을 맞아야 하니, 도대체 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라는 의문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윤장호 하사는 기독 청년 가운데도 빼어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가족은 신실한 감리교회 성도들이요, 그 형은 감리교회 목사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도 하나님이 활동하고 계시다면, 당연히 윤장호 하사 같은 사람을 보호하셨어야 했습니다.

 

얼마 전, 인천에서 초등학생 유괴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교회에 갔다가 오는 길에서 유괴를 당했습니다. "대체, 교회에 다녀오는 어린아이를 보호하지 못하는 하나님을 믿어서 무엇 하겠느냐?"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우리 교회의 강준이 권사님이, 자동차를 훔쳐 달아나던 사람이 정신없이 몰고 가는 차에 봉변을 당한 것도, 예배를 마치고 가게에 갔다 오는 길에서 일어났습니다. 남편 장용석 권사님은 주일마다 재정부에서 서너 시간씩 봉사하셨고, 지금은 휠체어에 의지해서 생활하고 계시는 강준이 권사님은 한어부 중고등부에서 교사로 헌신하셨습니다. 그 교통사고의 아수라장에 하나님이 계셨다면, 당연히 첫 번째로 보호해 주어야 할 사람들은 이 부부였습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벳 에드워즈의 결론이 맞는 걸까요? 그렇게 믿으면 더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되, 오직 깨달음 혹은 영감으로만 개입하시고, 다른 모든 차원에 대해서는 손을 떼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까와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잠적한 이 세상에 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할 수 있는 대로 옳게 살게 되면,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시다가 우리가 죽은 다음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3.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묵상하는 지난 한 주일 동안, 저는 엘리사벳 에드워즈의 이 고백을 붙들고 씨름했었습니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새벽기도회를 준비하기 위해 마가복음의 마지막 두 장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해 보는 동안, 제 머리 속 한쪽에는 엘리사벳의 이 고백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이 두 가지의 주제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엘리사벳의 고백이 마음속에서 서로 융합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기도하고 묵상하는 동안, "아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엘리사벳이 싸워야 했던 그 질문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이 감히 드러내지 못한 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그 ‘대답 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겠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실 수 없다" 혹은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지 않으신다"라는 엘리사벳의 체험적 고백에 대해, "당신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기대하는 방식대로 당신을 보호하지 않으십니다"라고 답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만취한 사람이 몰고 오는 차를 하나님이 급정거시켜 이지선씨를 보호할 수 있었다면, 만일 훔친 차를 가지고 도망하는 사람들의 질주를 하나님이 강준이 권사님의 차 바로 앞에서 멈추실 수 있었다면, 만일 윤장호 하사에게 날아오는 폭탄 파편의 방향을 하나님이 휘어지게 할 수 있었다면, 만일 고속도로에 불어친 돌풍을 하나님이 웨이드의 차 앞에서 멈추게 할 수 있었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지 않게 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신데, 원하신다면 그런 일을 못하실 리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간사에 그런 식으로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질 정도로 뜨겁게 기도하시면서 십자가를 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호소와 절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님이 그 참혹한 고난을 당하도록 버려두셨습니다.

4.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을 지으셨을 때, 인간들을 로봇처럼 만들어 원격조종(remote control)하도록 혹은 제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움직이도록 고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셨다면, 이 세상에는 그 어떤 죄악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어나는 일마다 하나님의 뜻에 100% 일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랬을 경우, 인간은 로봇처럼 혹은 유전자(Gene) 속에 프로그램 되어 있는 메시지에 따라 무심코 움직이는 생물처럼,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지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의 가능성을 감수하고 우리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해 주셨고, 그로 인해 우리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자유 의지를 잘 사용하여 인간다움을 누리면서, 그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따르고 이루기를 기대하십니다. 자유 의지를 선하게 활용하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 의지를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유 의지를 잘 활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려는 사람들도 때때로 유혹에 넘어가 악한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유 의지를 극도로 남용하여 철저히 타락한 사람들도 생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힘이 주어지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이로 인해 끔찍한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런 일들이 지금도 다푸르에서, 북한에서, 이라크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개입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즉각 즉각 보응하셔서 악한 사람들의 폭행을 멈추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향해 내미는 주먹을 하나님이 낚아채기를 기대합니다. 적어도, 기도 많이 하는 내 아이만큼은 보호해 주시기를, 적어도 헌금 많이 하는 내 사업체만큼은 보호해 주시기를, 그리고 적어도 선교 활동 많이 하는 우리 교회만큼은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날아오는 총알의 궤도를 바꾸고, 돌진해 오는 차를 정지시키는 방식으로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세워 두신 당신의 원칙을 위반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잠시 잠깐은 좋을지 몰라도, 결국 인간을 로봇으로 전락시키는, 창조의 본질적인 파괴를 불러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세상은 징벌의 두려움 속에서 옳은 일만 행하면서도 우울하게 살아가는 ‘무덤 같은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용의 가능성을 감수하시면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 세상에는 타락과 투쟁과 살인과 배신과 전쟁과 질병과 고난과 박해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위에 임하고, 우리 모두가 새로운 몸과 마음과 영혼을 입는 그 날이 오기까지, 고난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입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을 제거하지도 않으시고, 그 고난으로부터 믿는 사람들만 보호해 주시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5:45)고 말씀하십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엘리사벳은 "하나님이 누군가를 보호해 주어야 했다면 당연히 내 아들을 보호해 주셨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 동의되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전쟁에 나간 천 명의 병사 중, 하나님께서 3백 명을 살려 보내셨는데, 그 3백 명이 희생당한 7백 명보다 착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었다면, 아니, 착하고 믿음 좋은 순서대로 살려 보내셨다면,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이라면 한 번 믿어보겠다는 마음이 드십니까? 그 하나님이 더 정의롭게 느껴지십니까? 저는, 딱히 말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만, 뭔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지금처럼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섞여 있는 것이 더 옳다고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같은 분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도록 놔두셨다면,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악과 폭력과 죄를 뿌리 뽑아 내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세상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죄와 악에 대해 관심하시고 해결하시려 하지만, 그분의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과 다르다는 결론입니다. 예수님 같은 분이 십자가에 달려 절대 고독과 고통 속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행을 힘으로 제지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도우시려 하신다는 것을 알 것 같습니다. 외부로부터 악을 제지하는 방법이 아니라, 악의 내부로 들어가 그 악을 녹여버리는 방법을 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이쯤 되면, 다음과 같이 묻고 싶은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뭐 하러 믿습니까? 병에 걸렸을 때, 기도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엘리사벳 에드워즈처럼, 치유를 위한 기도를 모두 접어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자녀들이 멀리 떠나갔을 때, 마음 졸여 기도하는 것은 다 무익하다는 말입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위험에 직면했을 때, 기도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당해야 하는 고난에 대해 아무 대책 없이 그냥 당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전쟁터에 나가 있는 자녀를 위해 뭐라고 기도하란 말입니까?

저는 이 질문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으로 다 끝나지 않았음을 기억하라"는 답을 얻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당하신 고난의 겉모습만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들여다보라는 뜻이며, 고난 너머에 계셨던 하나님을 보라는 뜻이며, 그 고난 뒤에 일어난 부활의 사건을 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모진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은 그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 쏟아지는 모욕과 박해를 제지하는 것으로 돕지 않으시고,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도록 도우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내지르신 말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씀은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시편 22편에서 온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아들답게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고, 그랬기에 ‘볼 눈’이 있었던 로마인 백부장이 그분이 죽는 모습을 보고는,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막 15:39)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하나님은 그분을 죽음 가운데서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은 고난이 전부가 아니라는 소식입니다. 지금 당하는 아픔이 전부가 아니라는 소식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 우리가 당하는 질병, 우리가 당하는 아픔, 우리가 당하는 손해, 우리가 당하는 사고, 그리고 우리가 당하는 죽음,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아주 섬세한 손길로,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소식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아픔 중에, 질병 중에, 손해 중에, 사고 중에, 그리고 죽음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라는 말입니다. 그분께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분이 결국 그 고난을, 그 아픔을, 그 손해를, 그 질병을, 그 사고를 그리고 그 죽음을 바꾸실 것입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한숨을 찬양으로 바꾸시며, 슬픔의 눈물을 감사의 눈물로 바꾸실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더 예민하게, 더 친밀하게 연결되어 살기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질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잘 치료해 나가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온 몸과 마음에 생명력이 충만하도록 기도할 일입니다. 자녀들이 멀리 떠나갔을 때, 주님의 영이 그들의 마음을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할 입니다. 다른 아이들 다 당하는 일들을 내 아이만 피하기를 노심초사 바랄 것이 아니라, 혹시 그런 일을 당하더라도 지혜롭고 훌륭하게 극복해 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 병사를 위해 기도할 일입니다. 주님의 영이 그 아이의 마음을 다스리셔서 역경을 잘 극복하고 강한 아이로 훈련되어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아이의 무사한 귀환을 위해 기도하되, 내 아이만이 아니라 모든 병사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할 일입니다. 세상에서 당해야 하는 고난에 대책 없이 마주하라는 말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 고난을 대하라는 뜻입니다. 고난과 위기를 모면하기만을 빌지 말고, 그 고난과 위기 속에서 믿음의 빛을 발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고난이라면, 그 고난의 심장에 들어가 그 심장을 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6.

믿음은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을 안에서부터 밖으로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아픔 속에서 그 아픔을 감사로 녹여낼 수 있는 힘입니다. 손해를 오히려 참된 이익이 되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손해, 우리의 아픔, 우리의 고난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게 될 때, 때로 그 내적인 변화로 인해 시커먼 암 덩어리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일도 생길 수 있고, 방구석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생을 한탄하며 살아갈 뻔 했던 화상 환자가 만인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절망적이라고 판정되었던 척추 손상 환자가 온전히 회복되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장애를 가지고도 장애 없는 사람보다 더 자유롭게 살아가는 기적도 생깁니다.

 

저는, 엘리사벳 에드워즈가 매일 매일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아들의 지프를 돌풍에서 보호하지는 않으셨지만, 그 이후, 그 모든 아픔으로부터 회복시키시고, 아들의 희생을 거룩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힘으로 그들을 이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의사들은 완치할 수 없는 상태라 하더라도, 하루하루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죽어가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참으로 살아 있고, 영원히 살아 있을 사람’으로서 하루하루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살 때, 다시금 암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기적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그렇게 한다 해도 암의 전이를 결국 막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반짝이는 생명력으로 채우고,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채우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죽고 난 다음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감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부활절 아침에, 저는, 어려움을 겪고 계신 모든 성도들께, 그 문제가 전부가 아님을, 그 질병이 전부가 아님을, 그 장애가 전부가 아님을, 그 손해가 전부가 아님을, 분명하게, 확실하게, 그리고 또렷하게 알게 되기를 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셔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하루하루 고난 중에서, 아픔 중에서, 질병 중에서 그분과 교제하며 살아가기를 빕니다. 그렇게 되면, 불원간 지금 당하는 육체적인 고난과 불편과 아픔이 사소해지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히 치료되면 감사하고, 치료되지 않는다 해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부활의 기적입니다. 우리의 참된 기도의 제목은 이 부활의 기적이 우리 마음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런 어려움과 상관없이 지내는 분들도 이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어려움이 없을 때 뿌리 깊은 믿음이 자리를 잡도록 힘써야 합니다. 일단 어려움에 봉착하고 나면, 그 때 가서 정신을 수습하기는 무척 힘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요 16:33)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죄 많고 악한 세상에서 고난을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저 자신에게나 여러분에게나, 할 수 있는 한 고난이 없기를 바랍니다만, 고난에서 완전히 면제될 사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그런 고난에 직면하여 진가를 발휘합니다. 고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도움으로 고난을 속에서부터 변화시키는 참된 믿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7.

우리의 하나님은 계시도 주시고, 영감도 주시며, 깨달음도 주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또한 구원도 주십니다. 하지만 그 구원은 죽고 나서 만의 구원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도 구원을 주십니다. 때로, 우리가 바라는 방식대로 구원하시지 않고,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대로 보호해 주시지 않아서, 실망하고 분노할 때도 생깁니다. 하지만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도 십자가를 지게 하셨는데, 우리가 뭐라고 불평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도움을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게 하지 않으시고, 고난의 심장을 거쳐 부활하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특별한 방법으로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고난을 당하심으로 고난을 변모시켰습니다. 약해지심으로써 그 약함을 강함의 원천으로 바꾸셨습니다. 낮아지심으로써 높아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루신 승리입니다. 고난을 통과하여 고난을 변모시킨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것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이 부활절에, 우리도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믿고 용기를 내야 하겠습니다.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을 통과하여 고난을 변모시키도록, 믿음의 길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믿음으로써 세상을 이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소식은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멘.

부활의 주님,
저희에게도 주님의 믿음을 주소서.
고난을 변모시키기까지 흔들리지 않고 고난을 견뎌내신
그 믿음을 저희에게도 주소서.
죽음의 쏘는 침이 녹아질 때까지 죽음을 견뎌내신
그 믿음을 저희에게도 주소서.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참된 믿음으로
하루 하루
영원을 소유한 사람처럼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