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재난 중에 부르는 노래”(A Song In the Midst of Disaster)--시편 121:1-8

새벽지기1 2015. 12. 7. 15:21

 

 


1.


지난 3월 11일에 발생한 일본 지진과 해일로 인한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습니다. 훼손된 원자로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크고 깊을지, 그 피해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지금으로서는 추측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로 커지고 있습니다. 한 순간에 생명을 잃은 희생자들의 수가 상상을 넘어설 것이 분명해 보이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집도, 재산도, 삶도 모두 잃어버리고 망연자실해 있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절망감은 우리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비극 앞에서 한국과 미국의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쏟아놓은 망언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사건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저는 속으로 잔뜩 긴장을 했었습니다. 남의 일에 대해 비판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하는 기독교인들이 동남아시아에 쓰나미가 덮쳤을 때 혹은 아이티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했던 것과 같은 망언을 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저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습니다. 일본이 이와 같은 일을 당한 것은 하나님을 멀리 한 것에 대한 심판이라느니, 우상 숭배에 대한 징벌이라는 발언이 교회로부터 흘러 나왔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는 다시 한 번 여론의 거센 질타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젠, 일본에 가서 누구를 붙들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일본인들에게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신분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부끄럽고 민망한 일입니다.


어쩜 이렇게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역할을 대행하고 싶어 하는지요! 다른 사람의 불행 앞에서 이토록 무감각하고 무신경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믿으니, 이 허위의식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제가 믿는 하나님이 그분들이 믿는 하나님과 같은 분은 아니지 싶습니다. ‘창피해서 기독교인 못해 먹겠다’는 말을 듣는 것은 이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함께 아파하기보다는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에 더 민첩한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일본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십시다. 일주일에 한 끼 이상 금식함으로써 일본의 수많은 이재민들의 아픔과 고난에 동참하십시다. 지금으로서는 무엇을 어떻게 도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앞을 다투어 성금을 모으고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돈이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일본은 그들 자신의 경제력만으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모릅니다. 돈을 모으는 일보다 그들의 아픔을 알아주고 그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금식으로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자는 것입니다.


동시에, 앞으로 부활주일까지 일본을 위해 금식헌금과 구호헌금을 드리십시다. 일본은 아이티와 다릅니다. 그들에게 돈이 필요해서 하자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우리의 기도가 진심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마음이 움직여지는 대로 헌금을 드리십시다. 금식을 할 수 없는 분들은 소비를 줄여 구호 헌금을 마련하시면 됩니다. 주일 헌금 시간에 드리셔도 되고, 예배당 입구에 비치되어 있는 함에 드려도 좋습니다. 부활 주일 후에 모아진 헌금을 가장 필요한 곳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2.


오늘 우리는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에 맞춰 시편 121편을 읽었습니다. 지난 주말, 다음 주일 설교를 위해 교회력 성서 일과를 읽은 것은 일본에 관한 뉴스를 본 다음이었습니다. 최고 15미터가 넘는 거대한 물결이 제트기보다 빠른 속도로 해안 도시와 마을들을 휩쓰는 장면을 보고 나서 시편 121편의 말씀을 읽는데, 늘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던 말씀이 문득 매우 비현실적으로 들렸습니다. 몇 구절을 다시 읽어 드립니다.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네 오른쪽에 서서,
너를 보호하는 그늘이 되어 주시니,
낮의 햇빛도 너를 해치지 못하며,
밤의 달빛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모든 재난에서 지켜주시며,
네 생명을 지켜 주실 것이다.


이 시편은 여러 가지의 노래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만큼 믿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시편입니다. 그 중에는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양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라고 시작되는 찬양입니다. 눈을 감고 그 찬양을 부르다 보면 마음속에 든든한 확신이 들어찹니다.   


그런데 일본이 당하고 있는 재난을 생각하며 이 시편을 읽으니, ‘과연, 이 말씀이 어디까지 진실일까?’라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신다고 하는데, 항상 나를 지켜보시고 돌보아 주신다는데, 모든 재난에서 나를 지켜 주신다는데, 과연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부 전문가들의 예견에 의하면, 일본 대지진은 앞으로 이어질 초대형 재앙의 서곡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만일 그런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난다면, 그 재앙 앞에서 나는 여전히 이 시편을 읽고 “아멘!” 할 수 있을까요? 이 시편의 고백대로 하나님은 나를 그 모든 재앙에서 건져주실까요? 그렇게 믿고, 그렇게 기도해야 할까요? 다른 사람 다 당하는 고난이라도 나만은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 것을 바라고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이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시지 않는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 지진과 해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대한 파도는 무심하게, 아무 차별도 없이 일본 땅을 할퀴어 버렸습니다. 이 비정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편애를 바라는 사람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같은 ‘하나님의 편애’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3.


예수님도 믿는 사람들이 겪는 이 같은 혼란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당시에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을 무지몽매한 부모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다른 자식들은 다 망해도 내 자식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특혜를 주시는 분처럼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자주 하나님처럼 행동했습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서슴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인간의 불행에 대해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즐기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아파하고 그 고통을 벗어나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독점한 듯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편애하는 분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오류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마 5:45)


하나님은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사람도, 불의한 사람도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선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이 집 안에 있는 자식이라면, 악한 사람과 불의한 사람은 마치 가출한 자식과 같습니다. 부모의 뜻을 반하여 가출을 했다고 하여 자식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가출한 자식에게 더 마음이 쓰일 것입니다. 그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어떤 자녀는 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고, 어떤 자녀는 아버지를 떠나 살고 있다는 차이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같은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 이렇게 반문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편애를 확보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가출한 자식과 집 안에 있는 자식 중에서 어느 자식이 더 행복합니까? 가출한 자식이 더 행복하다고 대답하신다면, 그 집안에 문제가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실, 집안에 문제가 있어도 집을 떠난 자식은 고생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집안이 제대로 되어 있다면, 당연히 집 안에 있는 자식이 더 행복합니다. 부모의 사랑은 집 나간 자식과 집 안에 자식에게 동일하지만, 집 안에 머물러 있기를 선택한 자식이 더 행복합니다. 부모가 편애해서가 아닙니다. 부모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시편 121편이 조금은 수긍이 됩니다. 이 시편은 우리가 아버지로 믿고 고백하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그 분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입니다. 우리는 허블 망원경을 통해서 이 우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 전모를 다 알지 못하는데, 지금까지 드러난 모습만으로도 숨이 벅찰 정도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우주를 지은 분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고백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늘과 땅을 지으신 그분이 아버지처럼 그리고 어머니처럼 나를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고 살라는 말입니다. 


제 아는 목사님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결혼 초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옛날 시골 교회의 전도사 생활이라는 것이 변변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자주 생활고로 인해 불평을 하고 짜증을 냈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은 퉁 불어 있는 사모님을 자전거에 싣고 넓은 들판으로 나갑니다. 벼가 누렇게 익은 들판을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걱정 마, 여보! 이게 다 내 아버지 거야.” 그랬더니 사모님이 눈이 동그래지면서 “아니, 왜 그걸 여태 말하지 않았죠?”하고 묻습니다. 목사님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합니다. “아니, 그 아버지 말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저 아버지!”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 편으로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는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입니다.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이 크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런 분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크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대목이 더 감격스럽습니다. 일본 땅의 동쪽 옆구리를 휩쓴 거대한 쓰나미에 비해 한 사람의 인간은 얼마나 작습니까? 그렇다면.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비해 나라는 존재는 얼마나 보잘 것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찾으시고 부르시고 상대하신다는 것입니다.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며 함께 울고 웃으신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같이 위대하지만 또한 세심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분의 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4.


하지만 하나님이 편애하는 분이 아님을 인정한다 해도, 시편 121편이 말하는 내용을 다 인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원하기만 하면 모든 재난으로부터 나를 지켜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이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누구든 몇 개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한국 방문 중에 우리 교회 권사님 한 분이 심장마비를 당했습니다. 한국에서 그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만, 와서 들어 보니, 그분이 지금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전격적인 개입이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불과 몇 분 상관으로 생명을 건졌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여 의료진들을 기다렸더라면 생명을 잃을 뻔 했는데, 911편으로 그분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수술에 필요한 모든 의료진이 병원에 모여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께서 너를 모든 재난에서 지켜 주시며, 네 생명을 지켜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이 진실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늘 그런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등지고 가출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재앙을 만날 때마다 늘 그 같이 기적적으로 개입하지 는 않으십니다. 아니, 더 많은 경우에는 믿음이 좋은 사람도 세상 사람들이 다 당하는 고난과 환난과 사고와 질병을 속절없이 당합니다. 그럴 때면, “주님께서 너를 모든 재난에서 지켜 주시며, 네 생명을 지켜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깊은 영향을 받았고 또한 가장 존경하는 신학자 중 한 사람이 듀크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스탠리 하우어워즈(Stanley Hauerwas)입니다. 그분은 기독교 윤리학자인데, 현재 살아있는 신학자 가운데 가장 신뢰받는 분입니다. 그분은 학문 영역에서만 탁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있어서도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도 존경받을만합니다.


얼마 전, 그분이 자서전 <Hannah's Child>를 펴냈고, 최근에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그 책에 담겨 있는 이야기 중에서 자신이 겪은 고난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인터넷 신문에서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마음에 아픔을 느꼈고 동시에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조울증(bipolar disorder)을 겪는 아내와 함께 살아야 했던 쓰라린 경험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 아내는 성장하면서 어머니에게 당한 상처에 대한 분노를 남편에게 쏟아 놓았고, 증상은 점점 깊어져만 갔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책임을 남편 때문이라고 비난하다가 결국 남편을 떠납니다. 스탠린 하우어워즈 박사는 조울증 아내를 견뎌내면서 아들을 키운 이야기와 그 상황에서 겪은. 미칠 것 같은 외로움과 분노와 고통을 털어 놓습니다. 그 아내는 약 10 여 년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학문적으로 심오하고 영적으로 풍요로운 그분의 글들이 그처럼 지옥 같은 일상에서 쓰인 것이라는 사실에 크게 놀랐고 또한 감탄을 했습니다. 그분이 겪은 고난을 알고 그분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여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아픔과 상처와 고난과 환난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신부도 한 때 우울증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습니다. 맨하탄의 리버사이드 교회(Riverside Church)의 담임목사로서 현대판 예언자라고 불렸던 윌리엄 슬로운 코핀(William Sloan Coffin)은 참혹한 사고로 인해 20대의 아들을 잃었습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 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쳐 오신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은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5.


그렇다면 시편 121편에서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말, 그리고 모든 재난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재난’이 무엇인지 물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재난입니까? 재난 혹은 재앙이란 우리의 삶을 흔드는 사건들을 가리킵니다. 사업이 망했다든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든가, 질병에 걸렸다든가, 지진 같은 자연 재해를 당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외적인 일들이 언제나 우리의 삶을 흔드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일을 당해도 어떤 사람은 삶의 뿌리까지 흔들리고, 어떤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정한 재난 혹은 재앙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보다는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출신의 내과 의사이자 많은 저술을 남긴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모험으로 사는 인생>(The Adventure of Living)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의사는 인생의 성공을 저해하는 최대의 장애물이 신체적인 질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신체적 질환과 같은 장애물은 의료 기구와 의술, 의사의 조언으로 비교적 쉽게 극복할 수 있지만 정신적 요인에 기인한 장애물들은 쉽게 제거하기 어렵다. (170쪽)


맞는 말입니다. 어떤 사태를 만나서 “이크! 꼼짝없이 죽었구나!”라고 생각하면 그것 때문에 죽을 수 있습니다. 작은 일도 “이거, 큰 일 났네!”하고 두려워 떨면 그것이 큰 일이 됩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시편 121편을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양에 있는 모든 물로도 작은 배 하나를 침몰시킬 수 없다. 그 배 안에 물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당하는 그 어떤 일도 우리를 흔들 수 없다. 그것이 우리 내면으로 침투하기 전까지는! (A Long Obedience, p.43)


재앙 중에서도 가장 큰 재앙은 내면의 동요입니다. 낙심과 절망과 두려움입니다. 그것이 우리 내면에 들어오면 우리의 인생은 서서히 침몰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우리의 내면이 든든히 서 있는 한, 그 어떤 재앙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너를 모든 재난에서 지켜 주시며, 네 생명을 지켜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죄인에게나 의인에게나 동일한 비가 내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그 비가 재앙이 되지 않습니다. 그 비가 그의 마음까지 적시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은 그 비로 인해 몸과 마음이 다 젖어 버립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일본을 강타한 초대형 재앙을 지켜보면서도 여전히 시편 121편을 고백하고 “아멘!”이라고 응답합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이 믿는 사람만을 편애하기 때문도 아니고, 제가 늘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경험하고 살기 때문도 아닙니다. 저도 역시 다른 사람들이 다 당하는 일들을 당해 왔고, 또한 앞으로도 당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저는 “주님은 나를 모든 재앙에서 지켜 주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재앙은 하나님을 잊고 그분을 떠나 홀로 허우적대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이 재앙 중에서도 가장 큰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한, 그 어떤 것도 재앙이 되지 못합니다.

 


6.


앞에서 소개한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자신의 고난 이야기 중에 말한 한 대목이 마음이 깊이 와 닿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학자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고난에 관한 질문에 답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전 이런 질문에 뭐라 답변해야 좋을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제가 기독교 신학자로 살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런 질문에 답변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정도입니다. 우리의 인간성은 그런 질문을 자꾸 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침묵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더 현명한 일입니다.


기독교가 세상을 이해하는 ‘정답’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기독교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 ‘정답’은 기독교를 ‘설명’으로 전락시킬 뿐입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답이 없이 사는 방법을 배우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정말 훌륭한 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답을 모른 채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저의 주장이 최소한 제가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제 인생이 왜 무진장 흥미로운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주뉴스앤조이>에서 인용)


최근에 일본에 일어난 일을 두고 망발을 서슴지 않는 분들은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이 고백을 읽고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우어워즈 박사님의 말이 옳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대답을 내놓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의 말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할 때까지 정답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모른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살피시고 돌보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더욱 가까이하고 그분 안에 머물러 살면, 우리는 재앙을 만나도 재앙을 겪지 않을 것이고, 죽음을 만나도 죽음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고난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제 말이 아니라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말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매일같이 지옥 같은 투쟁을 하고, 미칠 것 같은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하나님을 놓지 않고 그분께 의지하며 자신의 삶이 무진장 흥미롭다고 말하는 그 사람의 고백을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시편 121편을 노래하고 고백하렵니다. 믿는 사람들도 거대한 쓰나미에 속절없이 휩쓸려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그런 일이 저에게 닥치면 저도 그들 중 한 사람이 될 것을 알면서도, 저는 여전히 “하나님께 모든 재앙에서 나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라고 노래하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정말 피해야 할 재앙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때문이며, 제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저의 노래와 고백에 동참하시기를 청합니다. 지옥같이 괴롭고 외로운 삶을 통과해 내도록 스탠리 하우어워즈를 지켜 준 것이 바로 이 노래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지켜 줄 것도 바로 이 노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