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다니엘8-하늘 순찰자의 경고

새벽지기1 2015. 11. 8. 20:18

 

다니엘서 4장에는 또 하나의 꿈 이야기가 나옵니다. 2장에 나온 첫 번째 꿈은 장대한 역사의 파노라마였습니다. 바벨론을 비롯한 제국들의 흥망성쇠가 계속될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뜨인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을 뒤덮을 것이라는 종말론적 승리를 보여줬습니다. 4장에 나오는 두 번째 꿈 이야기는 장대한 역사의 파노라마가 아니라 느부갓네살 왕의 운명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꿈의 내용은 단순했습니다. 땅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 얼마나 높이 자랐는지 나무 끝이 하늘에 닿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나무 잎사귀 또한 아름다웠고, 가지에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은 과일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 온 세상 사람들이 그 과일을 먹을 뿐 아니라 들짐승이 나무 그늘에서 쉬고, 공중의 새들도 가지에 깃들었습니다(10-12절). 정말 대단한 나무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한 순찰자-거룩한 자(천사)-가 내려와 크게 외쳤습니다. ‘그 나무를 베고, 가지를 자르고, 잎사귀를 떨고, 열매를 흩어버리고, 짐승들을 몰아내고, 새들을 쫓아내라. 그러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 두고 쇠와 놋줄로 동여 풀밭에 그대로 두어라. 이 사람이 하늘의 이슬을 맞고 땅의 식물 가운데서 짐승과 함께 살게 하라. 그가 일곱 때 동안 사람의 마음을 갖지 않고 짐승의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13-16절). 하늘의 천사는 그 배경에 대해서도 한 마디 했습니다. ‘이는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고,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는 것이다’(17절).

 

느부갓네살 왕은 꿈을 꾸고 나서 첫 번째 꿈을 꾸었을 때와 똑같이 번민하며 두려워했습니다. 꿈이 뭘 말하는지도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지혜자들을 불러 해몽하게 했습니다. 아마 속으로는 다니엘을 불러 해몽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니엘을 부르지 않고 바벨론의 지혜자들을 불러 꿈을 해몽하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니엘이 꿈 해몽의 최고 전문가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왜 다니엘을 먼저 부르지 않았을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전후사정을 상상해보면 아마도 다니엘의 해몽이 두려워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다니엘의 해몽보다는 차라리 적당히 기분 좋은 해몽을 듣고 싶어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십중팔구는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왕의 기대와 달리 바벨론의 지혜자들은 꿈을 해몽하지 못했습니다. 왕은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불러 해몽을 부탁했습니다. 너에게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으니 이 꿈을 능히 해몽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해몽을 부탁했습니다.

다니엘은 꿈 이야기를 듣자말자 이 꿈이 느부갓네살의 운명을 말한다는 걸 알고 매우 조심스런 태도로 공손하게 설명했습니다. 꿈에 본 거대한 나무는 느부갓네살 왕을 가리키는 거라고 말하면서, 왕의 권세가 꿈속의 나무처럼 하늘까지 높아지겠으나 언젠가 사람들에게서 쫓겨날 것이고, 일곱 때가 지날 때까지 들짐승과 함께 소처럼 풀을 먹으며 이슬에 젖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일곱 때가 지나고 나야 왕께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고,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게 될 것이고, 그걸 깨닫고 나면 왕의 나라가 다시 견고해질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22-26절).

그러고 나서 사족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그런즉 왕이시여, 제 말을 들으십시오. 지금부터라도 죄를 버리고 공의를 행하며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러면 왕의 평안이 오래갈 것입니다.”(27절).

여기서 저는 두 가지를 깊이 살펴보려 합니다. 하나는 하늘의 순찰자가 왕에게 전한 메시지를 살펴볼 것이고, 또 하나는 다니엘이 덧붙인 사족을 살펴보려 합니다.

다니엘이 설명한 대로 땅 중앙에 있는 거대한 나무는 느부갓네살 왕을 가리킵니다. 느부갓네살의 권세가 하늘에 닿았다는 걸 뜻합니다. 온 세상의 사람들과 들짐승과 새들까지도 왕의 다스림을 받을 만큼 왕의 권세가 대단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런 왕에게 하늘의 순찰자가 내려와 외쳤습니다. ‘왕의 위대한 권세는 무너질 것이다. 왕권을 아예 빼앗지는 않겠지만 왕위를 잃고 쫓겨나서 일곱 때 동안 들짐승과 함께 짐승처럼 살 것이다.’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순찰자의 이 외침은 느부갓네살 왕의 운명을 예고한 것이기도 하지만 위험을 알리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너는 지금 짐승으로 추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네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지금 이 때야말로 네가 짐승처럼 추락할 위기의 때다. 그러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언제 넘어지는지 아시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넘어집니다.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넘어집니다. 바울이 괜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한 게 아닙니다. 사람을 잘 살펴보세요. 괜찮았던 사람이 언제 이상하게 돌변하는지. 언제 안하무인이 되는지. 대부분 최고가 되고 나면 돌변합니다. 최고가 되고 나면 겸허하던 사람이 갑자기 오만해지고, 신중하던 사람이 갑자기 목에 힘을 주고 명령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꼭 최고의 자리에 올라야만 그러는 건 아닙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독이 바짝 오르기만 해도 그렇게 됩니다. 사람이 한 번 최고의 자리에 오르겠다고 독기를 품으면요 다른 건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때부터는 자기 목표 밖에 안 봐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안하무인이 되고, 먹을 것이 있으면 무조건 덤비는 짐승이 됩니다. 아내에게서 종종 비슷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선생님 중에 학생에게 소홀하고 비교육적인 선생님은 대부분 승진에 목숨 건 선생님이라고. 교장 선생님 중에도 교사를 괴롭히는 교장은 대부분 야망이 있는 교장이라고. 예,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날마다 경험하는 인간의 진실입니다.

 

사실 지금 이 시대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욕망과 야망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방송에서도 끊임없이 욕망과 야망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욕망과 야망이 큰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래요. 현대 사회는 1등만 살아남는 참으로 불의한 세상입니다. 그리고 현대사회가 1등만 살아남는 불의한 세상이기 때문에 욕망과 야망을 불태워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고, 욕망과 야망을 불태워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까지도 욕망과 야망을 부추기는 것이고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욕망과 야망은 자칫 사람을 짐승으로 추락시킨다고 말합니다. 욕망과 야망은 우리의 소중한 삶을 살림으로 이끌지 않고 죽임으로 내몬다고 말합니다. 의로움으로 이끌지 않고 죄악으로 내몬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하셨고(눅12:15), 바울은 탐심이 우상숭배라 했습니다(골3:5). 진실로 그렇습니다. 모든 욕망과 야망은 탐심에서 나오고,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선포한 경고는 느부갓네살 왕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느부갓네살 왕과 같은 자리에 오르기를 꿈꾸는 모든 사람, 그 사람이 왕이든 귀족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를 꿈꾸는 모든 사람이 새겨들어야 하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단지 최고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 자체만 해도 매우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정말 문제 삼는 것은 단지 최고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정하고 자기가 최고 통치자의 자리에 앉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 제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자기 위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알고 그 앞에 무릎 꿇는다면 그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왕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 위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모르고 자기 맘대로, 자기 의지대로 행하고 판단하면 이것은 문제가 됩니다. 이런 사람은 이내 곧 짐승으로 추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사람의 권세가 하늘에 닿게 되면 그 다음 수순은 어떻게 되느냐, 사람이 짐승이 된다, 바로 이 메시지가 하늘의 순찰자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전한 메시지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 하나님이 내 위에 계시다는 걸 망각하는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지켜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내 곧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잃고 짐승처럼 추악해집니다.

 

여기서 잠시 다니엘의 세 친구를 대조해봅시다. 3장에서 본 것처럼 다니엘의 세 친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철저히 굴복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하나님 외에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참으로 빛나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느부갓네살 왕은 스스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결과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내쫓겨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못 먹고 헐벗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어뜯고 싸우고 빼앗고 죽이고 억압하는 폭력적인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입니다. 느부갓네살의 통치는 매우 포악한 통치였습니다. 성경이 그 실상을 말하지는 않지만 성경 외 문헌(‘바벨론 연대기’나 ‘왕들의 원정기’)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시리아와 가나안 일대의 여러 나라들과 왕국들을 정복하면서 얼마나 용감무쌍하게 적들을 물리쳤는지를 나열하고 있는데, 그 문헌들에는 “파괴하고”, “불태우고”, “죽이고”, “쪼갰다”는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또 “죽인 사람들의 피가 강산을 적시고 바다를 이루었다”는 표현도 자주 나옵니다. 이처럼 느부갓네살의 권세는 이웃나라들을 힘으로 억압하고 착취하고 불태우고 죽여서 세운 권세였습니다. 탐욕과 불의와 잔악함으로 가득한 권세였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이런 사족을 덧붙였습니다. “그런즉 왕이시여, 제 말을 들으십시오. 지금부터라도 죄를 버리고 공의를 행하며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러면 왕의 평안이 오래갈 것입니다.”(27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불의로 가득했던 지금까지의 통치 방식에서 완전히 돌아서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힘으로 억압하고 착취하고 불태우고 죽였던 불의한 통치 행위를 중단하고 공의와 자비를 행하는 의의 통치, 긍휼의 통치를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통치 방식을 바꾸면 왕의 권세가 오래갈 것이고, 바꾸지 않으면 왕의 권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통치 방식을 바꾸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는 최고 권력자 앞에서 감히 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했습니다. 죄를 버리라고, 공의와 자비를 행하라고 가감 없이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선지자의 책임입니다. 목사의 책임입니다. 악한 통치자를 축복하는 것이 목사의 책임이 아니에요. 의로운 통치자는 축복해야 하지만 악한 통치자를 향해서는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목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통치하도록 요구하고 강권하는 것이 목사의 책임입니다. 다니엘은 이 책임을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말을 하라고 자기를 보내신 줄 알고 가감 없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백성들을 위해서, 또 왕을 위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순찰자와 다니엘을 보내 통치 방식을 바꾸라고 촉구하셨지만 느부갓네살 왕은 지금까지 해왔던 사악한 통치 방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또 지극히 높으신 분이 자기 위에서 다스리신다는 진실도 외면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궁전의 옥상을 거닐면서 바벨론 도성의 위용을 바라보다가 스스로 자기 영광에 도취되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30절). 예, 자기의 능력과 권세로 이 큰 바벨론을 건설했다고 자화자찬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모든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꿈을 통해 경고했습니다. 네가 최고의 자리에 오른 여기서 넘어질 수 있다, 짐승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린다는 진실을 밝히 말했습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은 들을 때 잠간 경각심을 가질 뿐 오래 간직하지 않았습니다. 그 경고를 들은지 1년 후에 눈에 보이는 자기 영광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자기 영광에 사로잡힌 그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일곱 때가 지나고서야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31-32절). 예, 결국 자기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참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줘도 듣지를 않습니다. 잠깐 귀를 기울였다가도 이내 곧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자기 삶의 방식, 자기 가치관, 자기 통치 방식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자기 안에 갇히고, 눈에 보이는 것에 갇히고, 자기 영광에 사로잡힙니다. 요즘에는 아이들까지도 다 자기가 왕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아우성칩니다. 그러다가 언제 무너지느냐? 환란의 일곱 때를 겪고 나야, 달리 말하면 자기가 성취한 모든 걸 잃고 나야 비로소 지극히 높으신 이가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느부갓네살도 그랬어요. 환란의 일곱 때가 지난 후에야 하늘의 왕을 찬양하고 경배했습니다(37절).

 

여러분은 이런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환란의 일곱 때를 겪고 나서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