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국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이집트까지 물리친 느부갓네살 왕은 뜻하지 않은 꿈 때문에 번민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상을 제패하고 최고의 권좌에 올랐어도 이상야릇한 꿈에 발목이 잡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다니엘의 꿈 해석을 듣고 경탄하였습니다.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것 때문에도 놀랐지만, 꿈의 내용이나 해석이 하도 신묘하고 기이해서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크게 놀랐던지 어린 다니엘에게 엎드려 절을 할 정도였습니다. 크게 경탄한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에게 귀한 선물을 주고, 바벨론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삼고, 또 모든 지혜자들을 거느리는 자리에 앉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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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니엘의 꿈 해석과 관련해서 느부갓네살 왕이 가장 깊이 충격을 받은 것이 무엇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갈대아의 박사들도 알아맞히지 못한 꿈을 다니엘이 알아맞히고 해석한 것일까요? 아니면 다니엘의 하나님일까요? 예, 이것도 다 충격적인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충격파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뜨인돌이 거대한 신상을 산산조각 낸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파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 왕의 내면 깊숙이에 가장 깊은 인상과 파문을 남긴 것은, 거대한 신상이 한 조각 뜨인돌에 부서져 먼지처럼 흩어진다는 사실이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다니엘이 꿈을 알아맞히고 해석해줬다는 사실에 감동한 나머지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거대한 신상이 뜨인돌에 부서져 흩어지는 장면이 마음에 남았을 겁니다. 그 장면이 마음에 남아서 생각지 않은 때에 떠오르곤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뭔지 모를 불안이, 가볍게 무시할 수 없는 어떤 두려움이 밀려들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느부갓네살 왕은 결국 거대한 금신상을 건립하게 됩니다. 바벨론 제국이 산산조각 날수도 있다는 끔찍한 미래를 두 손 놓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기 때문에 뭔가 대응조치를 강구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 숭배 정책이었습니다. 국가의 힘을 최대한으로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국가 숭배 정책을 펴야 했고, 국가 숭배 정책을 독려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금신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두라 평야에 높이가 27미터이고 넓이가 2.7미터인 금신상을 건립한 겁니다. 전체를 금으로 만든 것도 꿈에 나타난 신상이 머리만 금이었던 것을 능가하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사실은 허장성세에 불과합니다. 사람을 잘 보십시오. 내면 깊숙이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을 때 사람은 그 약점을 가리기 위해 허장성세를 합니다. 돈이라든지, 큰 집이라든지, 권력이라든지, 명품 같은 걸로 허장성세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선심을 쓰기도 하고, 선행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허장성세는 결국 드러나거든요? 옆에 있는 사람 눈에는 허장성세가 다 보입니다. 그런데도 본인은 그걸 모르고 허장성세로 자기 약점을 감추려고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신상을 건립한 것도 그런 허장성세라고 봐야 합니다. 뜨인돌에 자기 왕국이 부서질 거라는 두려운 진실을 가리기 위해서, 꿈에 나타난 저주를 무효화하기 위해서 거대한 금신상을 건립하고, 대대적인 낙성식을 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낙성식의 위용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바벨론의 힘이 미치는 모든 곳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총동원했습니다. 바벨론의 손길이 미치는 모든 나라의 총독들과 수령들, 행정관, 재무관, 재판관, 각 지방의 모든 관원을 다 불러서 금신상 앞에 도열시켰습니다. 또 소리가 없으면 감흥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소리를 낼 수 있는 모든 악기(관악기, 현악기, 타악기)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선포했습니다. 악대가 연주를 시작하면 일제히 엎드려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절하지 않은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을 것이다(4-5절) 라고 무서운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아주 야심차게 국가 숭배 정책의 시동을 건 겁니다.
드디어 악대의 연주가 시작됐습니다. 하늘이라도 찌를 듯이 큰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자 도열해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엎드려 절했습니다(7절). 전체가 하나인 듯 왕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아마 굉장히 장엄하고 감동적이었을 겁니다. 수천 명이 하나 되어 움직이는 매스게임(mass game)을 보면 숨 막히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처럼, 히틀러 치하의 독일군이 대오를 맞춰 행진하면서 오른손을 번쩍 들고 ‘하이! 히틀러’를 외칠 때 거기에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거대한 신상 앞에서 왕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절하는 모습은 정말 장엄하고 감동적이었을 겁니다. 모든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는 집단 자아의 황홀경에 빠졌을 겁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 또한 크게 고무되었을 겁니다. 바벨론의 영화가 영원할 것이라는 무한한 확신이 생겼을 거예요. 누구도 감히 바벨론을 넘보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을 겁니다. 예, 이것이 군중의 마력입니다. 숫자의 마력입니다. 수만 명이 단체 행동을 하면 묘하게도 집단 자아감이 형성됩니다. 나와 집단 자아가 하나가 되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거대한 군중 속에서 함께 행동하면 두려움을 못 느끼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집단 자아의 황홀경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집단 자아의 황홀경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절하는 장엄한 행렬 속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절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즉각 이들을 고발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내린 포고령을 환기시키면서 이들이 왕을 높이지 않았고,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았다고 고발했습니다(12절). 느부갓네살 왕은 분노하면서 저들을 끌어오라고 했습니다. 저들이 끌려오자 왕은 부드럽게 저들의 이름까지 불러가면서 절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냐고 확인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테니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라고 회유했습니다. 물론 협박도 했습니다. 이렇게 기회를 주는데도 절하지 않으면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13-15절). 또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고 큰 소리도 쳤습니다.
그러나 왕의 협박과 큰 소리가 왠지 옹색하게 들립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이 들립니다. 왜냐? 사실은 왕도 알고 있거든요. 이들이 절대로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을 거라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자기 명령을 거부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으로서 자존심이 있으니까, 이렇게라도 한 마디 하지 않으면 쪽팔릴 것 같으니까 협박도 하고 큰 소리도 친 겁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진짜 쪽팔렸을 겁니다.
어쨌든 왕이 예상한 대로 저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셋이 한꺼번에 불타 죽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왕의 호의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왕의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아주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왕이여, 이 일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도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7-18절).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신뢰, 하나님을 향한 순명의 의지는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정말 하나님을 깊이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풀무불 가운데도 건져내실 것이고, 느부갓살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이 건져내실 것이라는 것을 단지 믿기만 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능히 건져내실 수 있지만, 건져내지 않으실지라도 상관없다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설사 자기들이 불구덩이 속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선언을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저들은 하나님이 능히 풀무불 가운데서 건져내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는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반드시 자기들을 건져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능히 자기들을 건져내실 수 있지만, 건져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했습니다. 여기서 잘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과, 하나님은 이렇게 하실 수 있으니 꼭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완전히 달라요. 물론 전자는 옳습니다. 하지만 후자는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실 수 있으니 꼭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틀에 가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법칙화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하나님은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모든 앉은뱅이를 꼭 걷게 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앉은뱅이를 고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앉은뱅이를 고쳐야 하는 건 아닙니다. 고칠 수 있지만 고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믿기만 하면 모든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는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 과연 믿음 좋은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이 좋은 게 아니고 하나님을 틀에 가두는 것이고 법칙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도구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현실입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답시고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믿음, 자기 확신에 가두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능히 풀무불 가운데서 건져내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인정했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확신 속에 하나님을 가두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자유를 존중했습니다. 자기 믿음이나 확신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자유를 존중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 자유 앞에 겸허히 서는 것이 정말 하나님을 아는 믿음입니다.
또 하나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게 하나님이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 외에 그 무엇도 섬길 수 없었습니다. 바벨론 왕도 섬길 수 없었고, 바벨론 신도 섬길 수 없었습니다. 자기 목숨도 섬길 수 없었습니다. 저들이 경배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본래 인간의 위상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무엇도 섬겨서는 안 되는 대단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 아래에, 그러나 모든 것 위에서 모든 걸 다스리는 영광된 자리가 아담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신을 섬기지 말 것과 우상에게 절하지 말 것을 명령하신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출20:3-5). 하나님 외에 그 무엇도 섬겨서는 안 되는 자리가 인간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지금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들은 어떻게 그 자리-인간 본연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요? 예, 하나님만이 인간 위에 있는 존재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도 인간 위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 외의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일제히 금신상 앞에 절할 때 몸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풀무불 가운데 던져 넣는다는 협박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철저하게 굴복하는 사람만이 모든 것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만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가장 온전한 주체, 가장 단단한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은 헛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기를 앞세우지 않습니다. 허장성세를 하지 않습니다. 매우 겸허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일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어떤 회유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돈, 권력, 명예는 물론이고 어떤 사상이나 종교나 이데올로기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께 굴복하는 사람은 빛나는 주체로 섭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저들의 이런 빛나는 믿음, 빛나는 주체 앞에서 치욕적인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풀무불을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그들을 결박하여 불구덩이 속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병사들은 곧바로 그들을 결박하여 불구덩이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들을 집어 던진 병사는 불길에 타 죽었는데, 뜨거운 불구덩이 가운데 떨어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죽지 않고 걸어 다니는 거였습니다. 결박도 풀어진 채로 상한 곳도 없이 걸어 다니는 거였습니다. 더욱이 불속에 있는 사람이 셋이 아니라 넷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쩍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도 놀랐습니다. 다니엘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조금 경험한 느부갓네살 왕은 황급히 풀무불 아귀 가까이로 가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고 불렀습니다. 저들이 불구덩이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아우성친 게 아니라 왕이 속히 나오라고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저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불 가운데서 걸어 나왔습니다. 보니 머리털 하나도 그을린 것이 없고, 옷의 색깔도 변하지 않고, 불탄 냄새도 없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저들을 풀무불 가운데서, 또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서 능히 건져내셨습니다.
그러자 느부갓네살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저들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저들을 구원하셨다고 찬송했습니다. 그리고는 누구든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 것이라고 전국에 조서를 내렸습니다. 그들의 관직도 더 높였습니다.
돌아보면 정말 엄청난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저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바벨론 천하에 높이 드러냈습니다. 거대한 금신상을 세우고 그 앞에 절하는 대대적인 국가 행사장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영광을 높이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순교의 각오로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이 반드시 높이신다고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도구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번에는 풀무불 가운데서 건져내셨지만 건져내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 건져내지 않으실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건져내지 않으실지라도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건져내지 않으실지라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만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순명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아래 서는 자만이 모든 것 위에 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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