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보통 기도 · 믿음 · 성경공부 · 신실함 · 사랑 · 헌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 인식이 가장 중요합니다. 기도니 믿음이니 신실함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도 따지고 보면 다 하나님 인식에서 나옵니다. 또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아느냐에 따라 신앙의 내용과 색깔이 달라집니다. 정말이에요. 하나님이 인식-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아느냐 -이 믿음의 토대요 요체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 제국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다고 뜻을 정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것도 다니엘의 하나님 인식이 그럴 만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설교에서 살펴본 것처럼 느부갓네살 왕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고의 권좌에 올랐는데도 무엇이 두려웠는지 불길한 꿈을 꾸고 번민하느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1절). 아마 꿈은 선명했을 겁니다. 선명하지 않았다면 그처럼 번민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꿈은 매우 선명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선명했던 꿈이 깨어나자 말자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꿈은 선명했는데, 뭔가 중대한 일을 암시하는 꿈이 분명했는데,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머리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결국 모든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들을 불러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하고 해석하라고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했습니다. 갈대아 술사들은 하도 기가 막혀, 왕이 먼저 꿈 이야기를 해줘야 해석하든지 말든지 하지 꿈 이야기도 안 해주면서 꿈을 말하고 해석하라는 것은 무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왕께서 물으신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서 육체와 함께 살지 않는 신들 외에는 그것을 말할 자가 없다고, 어떤 임금도 그렇게 무리한 요구를 한 적이 없다며 항의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화를 내면서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다 죽이라고 포악한 명령을 내렸습니다(2:2-12).
여러분, 이걸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권력자의 횡포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세상에 생떼도 이런 생떼가 없지 않습니까. 포악도 이런 포악이 없고, 횡포도 이런 횡포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가 권력자인데. 아무리 말이 안 되는 명령이라도 따르는 수밖에. 왕의 근위대장 아리옥은 왕명을 받잡고 지혜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제 막 지혜자 자문 대열에 입문한 다니엘과 세 친구들까지도 죽이려고 찾아 나섰습니다. 다니엘을 체포하러 근위대장이 오자 다니엘은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14절). “어명을 받드시는 근위대장님, 무슨 일이 있었기에 왕께서 이토록 엄한 영을 내리셨습니까?”(15절, 공동번역)하고 묻자, 근위대장이 전후사정을 상세히 알려줬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다니엘은 어떤 심사인지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는 왕께 ‘어느 정도의 말미를 주시면 왕이 꾼 꿈과 해석을 알려드리겠다’고 뜻밖의 제안을 했습니다(16절).
사실 이 제안은 엄청나게 위험한 제안입니다. 앞에서 갈대아 술사들이 말한 것처럼 이 일은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다니엘이 아무리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아는 능력이 있다 해도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까지 알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무슨 배짱이었는지, 말미를 주면 그 일을 하겠다고 당찬 약속을 했습니다.
밤바다 꿈 때문에 번민하던 왕은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미를 주었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넘긴 다니엘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친구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함께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그 은밀한 일을 알게 해달라고, 자기와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18절).
기도는 지체 없이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지체 없이 느부갓네살 왕이 꾸었던 꿈을 다니엘에게 환상으로 보여줬습니다(19절). 다니엘은 너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 은밀한 비밀을 알게 하실 줄 믿었지만, 믿었기에 느부갓네살 왕에게 말미를 요청한 것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환상을 보여주시자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20-23절)라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근위대장에게 가서 내가 왕께 꿈을 알려드릴 터이니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지 말고 왕을 알현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24절). 아리옥은 다니엘을 데리고 급히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왕이 대뜸 물었습니다. “네가 능히 내가 꾼 꿈과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겠느냐?”(26절). 다니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왕이 물으신바 은밀한 것은 지혜자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쟁이가 능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토록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왕의 꿈을 나타내신 것은 내 지혜가 모든 사람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이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에게 알려주려 하심입니다.’(27-30절)라고 아주 솔직담백하게 진실을 고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대목이 있습니다. 다니엘이 무슨 배짱으로 왕의 꿈을 말하겠다고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뭘 몰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다니엘이 왕에게 한 말을 보세요. ‘왕이 물으신바 은밀한 것은 지혜자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쟁이가 능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27절). 자기 지혜와 능력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알면서도 그 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자기 지혜와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한 배경이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자기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시고, 어떤 은밀한 일이라도 다 아시는 분이라는 걸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기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의 목숨을 지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어떤 은밀한 일이라도 다 아시는 분이라는 걸 알고 믿었기 때문에 한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니엘의 하나님 인식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의 하나님 인식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다니엘의 하나님 찬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선 20절을 보겠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지혜와 능력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20절). 여기서 지혜와 능력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지혜와 능력으로 창조하셨다는 뜻이고, 그 지혜와 능력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도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에는 ‘은밀한 일’(mystery)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18-19절). 27-30절에도 같은 단어가 나옵니다. 여기서 ‘은밀한 일’은 일차적으로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지평을 넓히면 인간의 이성이나 통상적인 지혜로는 파악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만 알 수 있는 숨겨진 일을 가리킵니다(28, 29절).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 알고, 인간에게는 감추어진 깊은 어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아는 깊은 어둠이 곧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지혜는 빛입니다. 온 세상을 밝히는 빛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다 아는 빛은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도 알지 못하는 깊은 어둠입니다. 어떤 인간도 범접하지 못하는 깊은 어둠입니다. 흔히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은 사람을 도통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아무리 도통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합니다. 공자도, 노자도, 석가도, 소크라테스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열어 보여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제 설교를 듣는다고 아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열어 보여주셔야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꼬박꼬박 제사나 받는 분이 아니라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아주 독보적이고 탁월한 지혜와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며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다니엘은 바로 이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깊이 신뢰했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 인식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나아가 왕의 꿈을 말하겠다고 하게 한 힘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다니엘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재자라고 믿었습니다. 때와 계절을 바꾸시고, 나라를 흥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시고, 왕을 세우시고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21절). 세상을 창조하시고는 세상 밖으로 멀리 떠난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세상과 세상의 역사를 다스리시는 역사의 주재자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상한 꿈을 꾸게 하신 것이나, 다니엘에게 그 꿈을 보여주신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재자라는 이 진리를 온 바베론에 선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증언하는 것도 이겁니다.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운행하시고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겁니다. 물론 앞에서 말한 대로 이것은 은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열어 보여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깊은 어둠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이 깊은 어둠을 알았습니다. 단지 어깨너머로 들은풍월이 아니었어요. 그의 존재와 삶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였습니다.
사실 다니엘이 경험하고 있는 눈앞의 현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짓밟힌 이 현실은 하나님이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역사의 궁극적 미래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눈앞의 현실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했습니다. 눈앞의 현실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예,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역사의 현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인생의 현실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눈앞의 현실에 비추어 성경도 해석하고 세상사도 판단하며, 자기가 경험한 것 가지고 하나님을 이런 분이니 저런 분이니 단정하는데,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내 앞에 있는 역사의 현실이 절대적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장구한 역사의 한 컷에 불과합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인생의 희로애락 또한 삶이라는 거대한 퍼즐의 한 조각에 불과합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현재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현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현재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이 한 컷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 진실을 잊습니다. 내가 경험한 것을 다 합해 봐도 고작 한 컷밖에 안 되는데, 내가 경험한 역사의 한 컷 가지고, 내가 겪은 인생의 한 컷 가지고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자기에게 익숙한 판단의 잣대로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여러분은 그러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좋은 경험을 했든 나쁜 경험을 했든 그것 가지고 섣불리 판단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자기 경험에 갇히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고, 위험천만한 일이 없습니다. 자기 경험에 갇히는 것처럼 하나님 인식을 왜곡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한 컷에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20세기 초반에 공산주의가 세계의 절반을 휩쓸면서 교회를 무너뜨렸다고 해서 하나님이 당황하셨을 것 같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신은 죽었다고 외친다고 해서 하나님이 흔들리셨을 것 같습니까? 히틀러가 유대인을 가스실에 처넣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혼비백산하셨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의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소란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시리로다.”(시2:1-4).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군왕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시면서 당황하기는커녕 하도 가소로워 허허~~ 웃어버립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창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7-9절). 매우 엄중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재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10-12).
아멘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전하는 최고의 증언입니다. 지금 눈앞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하나님이 역사의 주재자시라는 것,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시라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을 뒤덮는다는 것,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다 복이 있다는 것,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최고의 증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이 증언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이 증언에 여러분의 삶과 운명을 맡기십시오. 다니엘도 이 증언에 자신의 삶과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 비루하기 짝이 없는 눈앞의 현실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포로라는 자신의 현실과 바벨론이라는 제국의 현실에 갇히지 않고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이방 나라 바벨론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크심과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재이심을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겠습니다. 하나님 인식이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했습니다. 다니엘의 하나님 인식이 다니엘의 삶에, 다니엘의 선택과 행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면 삶이 방자해지고, 하나님을 삐뚤어지게 알면 삶이 삐뚤어지고, 하나님을 깊이 알면 아는 만큼 삶이 깊어지고 풍성해지고 자유하게 되고 올곧아지고 아름다워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반드시 이해의 지평에 하나님나라라고 하는 새로운 차원의 확장과 변혁이 일어납니다. 자아확장과 욕망에 맞춰졌던 의지에 재조정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코 종교적 차원의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존재와 삶 전체에 저항할 수 없는 변혁을 일으킵니다. 세상과 자아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고 깊어지며, 삶의 체계가 전적으로 변혁되는 근원적인 혁명을 일으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근원적 혁명'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거대한 회심(메타노이아) 사건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 어떤 분으로 아느냐가 여러분의 존재와 삶을 좌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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