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다니엘3-느부갓네살 vs 다니엘

새벽지기1 2015. 11. 8. 20:05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과정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것저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고, 그 선택에 따라 삶이 좌우됩니다. 예전에 ‘한 번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광고 카피도 있었습니다만,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교회 선택이 신앙의 칼라를 좌우하고, 배우자 선택이 평생의 삶을 좌우합니다. 다니엘에게도 인생 전체의 운명이 걸린 선택의 기로가 있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신하로 살 것인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으로 살 것인지를 택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은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으로 인해 다니엘은 이방 땅 바벨론에 하나님의 영광을 증언하는 아름다운 별이 되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영원한 귀감이 되었습니다.

물론 다니엘은 피지배국의 포로에 불과했습니다. 자기 뜻대로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결정권을 다 빼앗긴 채 바벨론 왕실의 전략과 계획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 도구적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 한 마디에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는 참으로 무력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벨론이라는 독 안에 든 쥐 신세였습니다.

반면에 느부갓네살은 고대 근동을 정복한 바벨론 제국의 왕이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까지 다스리는 어마어마한 통치자였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받은 자였습니다(2:37-38).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것을 가진 자였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왕 중의 왕이었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완전히 극과 극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한 사람은 저 밑바닥에 있었고, 한 사람은 저 위에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고, 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약했고, 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강했습니다. 한 사람은 모든 자유를 강탈당했고, 한 사람은 무한한 자유를 가졌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진실의 전부일까요? 다니엘이 정말 모든 것을 잃은 자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일까요? 세상의 밑바닥에 있는 자일까요? 반대로 느부갓네살이 정말 모든 것을 가진 자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일까요? 온 세상을 지배하는 왕 중의 왕일까요?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은 사실과 많이 다릅니다. 진실은 사실보다 훨씬 오묘하고 깊고 역설적입니다. 심지어 진실과 사실이 완전히 반대인 경우도 많습니다. 다니엘과 느부갓네살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우선 다니엘부터 살펴봅시다. 사실의 측면에서 보면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포로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자기를 보호할 어떤 힘도 없습니다. 정말 약한 자 중의 약한 자입니다.

그러나 진실의 측면에서 보면 다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의 신하로 살 것인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으로 살 것인가’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뜻을 정하고 그 길을 택했습니다. 이것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굴복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몸은 비록 느부갓네살의 지배 아래 있지만, 영혼은 느부갓네살의 지배 아래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적 믿음으로 진리의 길을 가겠다는 강인한 결기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은 결코 약하지 않았습니다. 외적인 힘은 약했지만 내적인 힘은 강했습니다.

 

또 하나를 봅시다. 사실의 측면에서 보면 다니엘은 모든 걸 잃었습니다. 자기 뜻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을 잃었고, 친구를 잃었고, 가족을 잃었고, 나라를 잃었고, 느부갓네살에게 저항할 수 있는 외적인 힘도 잃었습니다. 유대 나라 귀족으로서의 신분과 권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의 측면에서 보면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여전히 믿음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지혜와 지식도 있었고, 선배들이 남긴 책을 다 통달하여 체득한 지혜와 지식도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환상과 꿈을 해석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1:17-20).

 

사실 믿음이니 용기니 지혜니 지식이니 환상과 꿈을 해석하는 능력이니 하는 것들은 눈에 확 띄는 외적 자산이 아닙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내적 자산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삶의 에너지는 내적 자산에서 나옵니다.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근기도 내적 자산에서 나오고, 힘과 힘이 격돌하는 난세를 돌파해내는 용기도 내적 자산에서 나오고, 다니엘을 다니엘 되게 하는 힘도 내적 자산에서 나오고, 거짓을 뿌리치고 진리를 붙잡는 힘도 내적 자산에서 나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진정한 삶을 살게 하는 에너지는 외적 자산에서 나오지 않고 내적 자산에서 나옵니다. 더욱이 이 내적 자산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힘으로도 빼앗을 수 없고, 돈으로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느부갓네살 왕도 빼앗지 못했습니다. 다니엘의 외적 자산은 다 빼앗았지만 내적 자산은 하나도 빼앗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날마다 더해졌습니다. 마지막에는 바벨론에 있는 박수나 술객들보다도 열배나 더 총명하고 빛났습니다.

 

예, 바로 이것이 진실입니다. 사실의 차원에서 보면 다니엘은 약했고, 소중한 외적 자산을 다 잃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의 차원에서 보면 다니엘은 강했고, 외적 자산보다 더 소중한 내적 자산은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영혼은 하나님께만 매여 있음으로써 하나님 외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했고, 가슴에는 죽음도 넘어서는 용기가 있었고, 머리에는 세상을 꿰뚫는 지혜와 지식이 충만했습니다.

 

이제 느부갓네살 왕을 살펴봅시다. 사실의 차원에서 보면 느부갓네살은 힘으로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호황 궁전에서 호의호식했습니다. 하지만 진실의 차원에서 보면 결코 강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낮에는 최고의 권좌에서 세상을 호령했지만, 밤이 되면 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설쳤습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왕이 꾼 꿈은 나라의 장래를 말해주는 신의 계시로 받아들였습니다(창20:3-7, 41:1-36). 개인의 꿈도 중요한 신의 계시로 받아들였지만, 왕의 꿈은 나라의 장래를 말해주는 신의 계시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꿈을 매우 중시하고 의존했습니다. 그 결과 꿈에 아들이 반역을 하면 아들을 죽이고, 신하들이 나쁜 일을 공모하면 신하들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도 불길하기 짝이 없는 꿈을 꾸고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해몽할 수는 없어도 꿈의 내용이 너무 불길했기 때문에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느라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단2:1). 더욱이 2장 3절에 보면, 왕이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들을 불러 ‘내가 이상한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번민하고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기까지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들에게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하고 해석하라고까지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들을 능지처참하고, 너희 집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2:5). 술사들이 그건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항의하며 왕께 꿈을 말하는 자가 없자 왕은 진노하면서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죽이라고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2:10-12).

 

이 장면들을 보면 느부갓네살이 얼마나 초조해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를 여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낮에는 앗수르를 꺾은 강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온 세상을 호령했지만, 밤에는 내면 저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제어할 수 없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물론 무엇 때문에 두려워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근본적인 외로움과 두려움일 수도 있을 테고, 앗수르라는 대제국이 패망하는 것을 지켜본 당사자로서 바벨론 제국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을 테고, 수많은 적들에 둘러싸인 자가 느끼는 본능적인 두려움일 수도 있을 겁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겁니다. 사실의 차원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세상 누구보다 강했지만, 진실의 차원에서는 내면 깊은 곳에 초조와 두려움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초조하고 두려웠던지 이성이 마비돼 건강한 판단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외적으로 강한 자와 내적으로 강한 중 누가 진정 강한 자일까요? 외적으로 부유한 자와 내적으로 부유한 자 중 누가 진정 부요한 자일까요? 외적으로 자유한 자와 내적으로 자유한 자 중 누가 진정 자유인일까요? 외적으로 위에 있는 자와 내적으로 위에 있는 자 중 누가 진정 위에 있는 자일까요? 느부갓네살 왕이 아니라 다니엘입니다. 인간적인 차원, 사회적인 차원,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강한 자요, 부요한 자요, 자유한 자요, 위에 있는 자임에 틀림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의 차원에서 보면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보다 더 강한 자요, 더 부요한 자요, 더 자유한 자요, 더 위에 있는 자입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세상 물정 모르는 목사의 순진한 이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만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 밖에 못 보는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를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는 말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왔다고(히11:3). 바울도 말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데, 그 이유는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라고(고후4:18).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값지고, 더 영원하고, 더 풍성하고, 더 파워풀한 것이라는 게 성경적 진실이고, 제가 예수님 안에서 발견한 삶의 실체적 진실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삶의 실체적 진실을 외면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립니다. 우리 주변을 한 번 돌아보세요. 다니엘의 웅숭깊은 믿음, 죽음을 넘어서는 용기,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이해하는 지혜, 책을 통달한 지식을 부러워하고 꿈꾸는 사람이 있는가. 거의 없습니다. 다들 느부갓네살 왕의 삶을 부러워하고 꿈꿉니다. 세상에 우뚝 서서 호령하는 느부갓네살의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누가 봐도 느부갓네살 왕이 명령하고 다니엘은 꼼짝 못하니까, 세계를 호령하는 느부갓네살이 멋져 보이고 위대해 보이니까, 승자로서 많은 것을 누리고 있으니까, 다들 앞뒤 생각할 필요도 없이 느부갓네살 왕의 삶을 부러워하고 꿈꿉니다. 나도 저렇게 승리자가 되겠다며 거창한 인생 계획을 세우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그리스도인들도 대부분 믿음으로 느부갓네살 왕의 삶을 부러워하고 꿈꿉니다. 그리스도인이 느부갓네살 왕의 삶을 부러워하면 지는 건데, 영적 싸움에서 세상에게 지는 건데, 대부분 느부갓네살 왕을 부러워합니다. 대통령을 부러워하고, 장관을 부러워하고, 대기업 회장을 부러워하고, 대기업 임원을 부러워합니다. 목회자들도 대형교회 목사를 부러워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고, 아침 안개와 같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하는 데도 하나 같이 보이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믿음생활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도 믿음이 겉돌고, 영혼이 메마르고, 내면이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진정한 삶의 에너지는 내면의 자산을 태움으로써 나오는 법인데, 다들 믿음으로 느부갓네살 왕의 길을 쫓느라 정신이 없으니 어떻게 내면이 윤택해지겠습니까. 내면이 텅 비어 있으니 무슨 에너지가 있어서 진정한 삶을 살겠습니까. 무슨 지혜와 용기가 있어서 느부갓네살 왕을 이기겠습니까.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밥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민중이 외적 자산도 가난하고 내적 자산도 가난한 이중적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모든 민중이 느부갓네살 왕의 삶을 부러워하면서 그 길을 뒤쫓아 가기 때문에 이중적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느부갓네살 왕의 삶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삶이 굉장한 것 같고, 위대한 것 같고, 탄탄대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빈껍데기일 뿐입니다. 빛 좋은 개살구일 뿐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아침 안개일 뿐입니다. 느부갓네살의 통치 기간이 얼마였습니까? 43년이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이 언제 멸망했습니까? 백년을 못 버티고 멸망했습니다. 순간이었어요.

사실입니다. 외적으로는 느부갓네살 왕이 위대해 보이고, 강해 보이고, 성공한 것 같아 보이고,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아 보이고, 모든 자유를 누리는 것 같아 보였지만, 조금 깊이 살펴보면 다니엘이 더 위대했고, 더 강했고, 더 아름다운 성공을 했고, 더 많은 것을 가졌고, 더 풍성한 자유를 누렸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진정한 삶, 아름다운 삶, 조화로운 삶, 행복한 삶을 산 게 아니라 다니엘이 진정한 삶, 아름다운 삶, 조화로운 삶,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 진실에 동의하신다면 느부갓네살 왕의 삶을 더 이상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삶은 부러워할 이유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여러분, 잠깐만 생각해보십시오. 느부갓네살 왕의 삶이 아름답습니까? 조화롭고 풍성합니까? 생명이 약동합니까? 아니잖아요. 빈껍데기잖아요. 빛 좋은 개살구잖아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아침 안개잖아요. 오히려 다니엘의 삶이 아름답고 풍성하고 생명의 향기로 가득하잖아요. 다니엘의 삶이 하나님 안에 있는 삶이고, 삶 본연의 삶이잖아요. 정말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부러워해야 하는 것은 느부갓네살의 삶이 아니라 다니엘의 삶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삶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같은 세상이 가만히 있지 않으니까, 느부갓네살 왕처럼 멋지게 승리하고 성공한 자들이 끊임없이 나의 길을 따라오라고 유혹하니까, 자기가 누리고 있는 찬란한 빈껍데기를 과시하면서 와서 그걸 차지하라고 유혹하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삶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느부갓네살 왕의 삶을 부러워하면 안 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삶을 부러워하는 순간 우리는 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다니엘의 삶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내적 자산이 풍요로운 삶, 내면이 강하고 아름다운 삶, 주님을 닮은 삶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사랑하는 사람,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 삶의 깊이가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시대를 호령하는 느부갓네살 왕들의 유혹을 이겨내고 진정한 생명의 길, 진정한 삶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