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말씀샘교회’의 꿈

새벽지기1 2015. 11. 8. 19:59

(이 글은 말씀샘교회 창립 준비를 하면서 쓴 글입니다.

그런데 홈페이지에 이 글이 빠져 있는 것을 뒤늦게 확인하고 이제 올립니다.)

 

  

‘말씀샘교회’를 창립하면서 또다시 묻는다. 교회란 어떤 곳일까? 교회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종교개혁자 칼빈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며 또 듣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지킬 때에 거기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옳다.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를 지키면 주님의 교회로서 손색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듣고 전파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듣고 전파하고 있는지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이 다른 종교 경전(經典)이나 성인(聖人)의 말과 무엇이 다른지, 성경도 모든 경전처럼 인간의 언어로 가득하고 인간의 실존적 삶을 향해 말하고 있는데 성경이라고 해서 뭐가 다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神)을 이야기한다는 점이 다를까? 아니다. 다른 경전도 신을 말하고 있고, 신을 논하는 책은 무수히 많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다를까? 물론 그것도 중요한 차이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방법이 없다.

 

사실 성경이 다른 책들과 다른 점은 딱 하나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지향점이 다르다는 점이다. 만물과 만사를 이해하는 해석의 지평과 토대가 다르다는 점이다. 즉 만물과 만사를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에서 본다는 점, 세계와 역사를 창조하신 분과의 관계 속에서 본다는 점, 죽음 너머의 세계까지를 포함해서 삶의 실존을 통전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다르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세상은 인간의 가능성과 역사의 진보를 꿈꾸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불가능성과 비참함, 역사적 진보의 한계와 심판, 그리고 종말론적 희망을 증언한다. 세상은 인간의 의를 말하나 성경은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세상은 인간의 도덕적 개선을 말하나 성경은 새로운 피조물 됨을 말한다. 세상은 유토피아를 꿈꾸나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린다. 세상은 소유와 영광과 지배를 욕망하나 성경은 존재와 고난과 섬김을 추구한다. 세상은 하늘과 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나 성경은 하늘과 땅을 유기적인 하나로 본다.

 

성경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세계와 언어뿐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 언어 이전의 세계, 역사 너머의 세계,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 죽음을 뛰어넘는 부활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에 눈이 열리지 않으면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읽는다 하더라도 신화나 피상적인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기가 어렵다. 교회마다 성경을 말하지만 성경을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아닌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하느냐’의 문제는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적인 관점(눈)으로 성경과 만사와 만물을 읽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옳다. 교회는 세상에서 그 유(類)를 찾을 수 없는 매우 독특한 눈과 귀를 가져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시라. 교회가 과학 ‧ 종교 ‧ 정치 ‧ 경제 ‧ 교육 ‧ 문화 등과 담을 쌓아야 한다거나, 세상과 대화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과 대화를 해야 한다. 과학 ‧ 종교 ‧ 정치 ‧ 경제 ‧ 교육 ‧ 문화 등과 마음을 열고 깊이 있는 대화를 해야 한다. 또 그들이 발견한 합리적 진실에 대해서는 기꺼이 수용할 줄 아는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말한 갈릴레오를 감금했던 중세 교회처럼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대화하는 것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과학 ‧ 종교 ‧ 정치 ‧ 경제 ‧ 교육 ‧ 문화 너머의 세계, 즉 하늘을 가리키는 지상의 이정표로서 존재해야 할 뿐 아니라 하늘과 땅을 통전적으로 보고 말해야 하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돈을 잘 버는 길, 경제적 양극화를 극복하는 길, 공권력을 민주적이고 정의롭게 제한하는 길, 자녀 교육을 잘하는 길에 대해서는 교회가 전문가들에게 들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가 말해야 할 것이 있다. 교회는 세상의 전문가들이 통전적으로 보지 못하는 한계가 있음을 말해주어야 한다. 또 그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 - 죄의 종노릇하는 것에 대해, 그 무엇으로도 삶의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생명과 죽음이라는 삶의 궁극적 질문에 대해, 역사의 시작과 끝에 대해, 존재의 신비에 대해, 역사를 넘어서는 종말론적 희망에 대해 말해 주어야 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 ‧ 학교 ‧ 가정 ‧ 법원 ‧ 병원 그 어디도 말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말해 줄 수도 없기 때문에 교회가 마땅히 말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감당해야 할 최고의 책무요 봉사일 뿐 아니라 최고의 영광이요 특권이다.

 

진실로 그렇다. 교회는 세상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세상이 말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부름 받았다. 때문에 교회는 만물과 만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세상과 달라야 한다. 추구하는 것이나 하는 이야기가 세상과 달라야 한다. 만일 교회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지향점이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아무리 종교적 위용이 대단하고 사회적으로 훌륭한 평판을 얻고 성경 이야기가 넘친다 할지라도 세상과 다르게 볼 줄을 모르고 다르게 말할 줄을 모른다면, 그것이 어떻게 주님의 교회일 수 있겠는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더 많은 소유와 더 큰 영광과 더 강한 힘과 지배력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대통령 선거후보자들이 그럴듯한 거짓 약속(空約)을 남발하듯이 예수님이 약속하지 않은 것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약속한다면, 세상이 하는 이야기를 예수 이름으로 반복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듣고 전파하는 것일 수 있겠는가?

 

교회의 주인이요 머리이신 예수님은 경쟁에서 승리하는 법이나 삶의 안전을 보장하는 지혜를 말하지 않았다. 그분은 오직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했다. 생명과 죽음이라는 삶의 궁극적 질문에 대해, 역사의 시작과 끝에 대해, 존재의 신비에 대해, 역사를 넘어서는 종말론적 희망에 대해 말했다. 영광이 아니라 섬김을 말했고, 나를 믿고 따르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아니, 세상에서는 주님 때문에 오히려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의 교회도 예수님처럼 세상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세상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래야 거짓 희망에 속고 있는 자들에게 참된 희망이 될 수 있고, 물질적인 부요 속에서 영적인 기갈로 신음하는 자들을 회생시키는 생수의 강이 될 수 있다.

결국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듣고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이고 영광스러운 일은 없다. ‘말씀샘교회’는 바로 그런 교회이기를 꿈꾸며 첫 걸음을 내딛는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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