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은 앗수르와 애굽 연합군을 꺾고 신흥강국으로 급부상했습니다. 그 당시에 유다는 애굽의 영향권 아래 있었고, 여호야김 왕도 친 애굽파였습니다. 바벨론은 그런 유다를 못본척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아낸 다음 예루살렘의 인재와 성전 그릇 얼마를 노획해갔습니다. 그때 다니엘과 세 친구도 끌려갔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그들은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을 겁니다. 고작해야 17-19살 정도였을 그들이 내일을 알 수 없는 운명 앞에 섰으니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노역장으로 끌려가 노예처럼 일을 하게 될지, 차가운 감옥에 갇히게 될지,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두려웠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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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참 알 수가 없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난파 직전에 놓인 그들의 운명에 상상할 수 없는 행운이 닥쳤습니다. 바벨론 왕실의 특별장학생으로 뽑혀 갈대아 사람의 언어와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최고의 혜택을 받으며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3년 과정을 잘 마치면 바벨론 왕실에서 일할 수도 있게 됐습니다. 보잘 것 없이 작은 나라 유대의 귀족으로 사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성공의 길이 활짝 열린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미국의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학비와 생활비 전체를 지원받으며 명문 대학에서 공부하고, 공부를 마친 후에는 백악관에서 근무하는 길이 보장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로 엄청난 행운입니다. 시쳇말로 대박이 터진 겁니다. 하나님이 도우셨다며 속으로 쾌재라도 불러야 할 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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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니엘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자기 나라에서는 꿈도 꾸어볼 수 없는 출세 길이 활짝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최고의 호사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적인 위기로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영혼 -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영혼 - 을 잃을 수도 있는 영적인 위기로 생각하고, 이 현실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지 깊이 고민했습니다. 아마 하루 이틀이 아니었을 겁니다. 몇 날을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이 문제로 씨름했을 겁니다. 그러다가 마음의 결단을 했습니다. 왕이 제공하는 포도주와 음식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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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다니엘은 왜 왕이 정한 음식을 먹지 않기로 뜻을 정했을까요? 왕의 음식을 먹는 것을 자기를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대부분 두 가지 이유를 듭니다. 첫 번째는 레위기에 나오는 음식 규례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하시면서 짐승을 잡아먹을 때는 피를 먹지 말라고 금하셨습니다(레17:12-14).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해주시면서(레11:1-23) 부정한 짐승의 고기를 먹음으로 너희 몸을 더럽히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레20:25-26). 그런데 바벨론 사람들이 먹는 고기에는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부정한 짐승의 고기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음식 율례를 아는 다니엘이 어떻게 먹을 수 있겠습니까? 왕의 음식을 먹는 것은 곧바로 음식 율례를 범하는 것이 되는데. 그래서 왕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는 게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두 번째는 왕의 음식이 바벨론 제국의 신에게 바쳐진 음식이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고수레라는 풍습이 있습니다만, 이스라엘을 제외한 나라들 또한 음식을 만든 후 먹기 전에 반드시 그들의 신께 음식 얼마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왕실은 더더욱 그랬습니다. 날마다 나라의 태평성대를 위해 신께 제사를 바쳤습니다. 때문에 왕이 제공하는 음식은 제사 음식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렇게 다른 신께 바친 제사 음식을 먹게 되면 결국 십계명 중 제1계명을 범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왕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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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 좁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음식 율례가 걸려서 그런 결단을 했다고 보는 것은 다니엘이 처한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다니엘이 처한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칼과 창이 격돌하는 전쟁 상황입니다. 모든 것이 정치적인 포석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매우 민감한 상황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음식 율례를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여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할 상황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니엘이 뭣 때문에 깊이 고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음식 율례를 지켜야 하느냐 안 지켜야 하느냐가 하는 것 때문에 고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에 빌붙어 부귀와 영화를 누릴 것이냐, 패망한 유다 백성으로 살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한 바벨론 제국의 신하로 살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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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선택의 기로에서 다니엘은 무력으로 세계를 제패한 제국의 신하로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바벨론의 영화를 함께 누리자는 유혹의 손길을 거부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조국 유다를 지켜주지 못했을지라도 당신의 백성을 지켜주지 못한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바로 이 결단을 왕이 베푸는 음식과 포도주를 거부하는 행동으로 표출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정한 음식 율례를 지켜야겠다는 뜻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단지 음식 율례의 차원에서 결심한 게 아니고, 바벨론 왕실의 한 복판에서도 역사의 주재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차원에서 결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전체 정황에 어울리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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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부분의 유대 백성들은 당신의 백성을 지켜 주지 못한 하나님을 무능한 신이라고 원망했가든요. 하지만 10대 후반밖에 안 되는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비록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 계신 것처럼 보이고, 자기 백성조차도 지켜 주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하나님이 역사의 주재자이심을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몸은 비록 바벨론에 끌려왔지만 변함없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물론 왕의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지극히 미미한 일입니다. 사람들 눈에 확 띄는 일도 아니고, 역사의 흐름을 바꿀만한 혁명적인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히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까딱 잘못했다가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적 각오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런 결단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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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이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요? 솔직히 이런 결심은 어지간한 믿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의 믿음, 단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정도의 믿음으로 할 수 있는 결심이 아닙니다. 그런 정도의 믿음으로는 바벨론 왕실의 한 복판에서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뜻을 정할 수도 없고, 환관장에게 그 결심을 밝힐 수도 없습니다. 다니엘의 믿음은 그 이상의 믿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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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단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의 믿음, 단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정도의 믿음 이상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2장에 가면 알 수 있습니다. 2장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니엘이 왕의 꿈을 해석해주고 나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2:44).
또 있습니다. 7장에 가면 다니엘이 네 짐승 환상을 본 이야기가 나오는데, 네 짐승 환상을 해석하면서 다니엘이 똑같은 말을 합니다. “천하의 모든 나라와 권세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들의 나라는 영원히 지속되고, 모든 통치자들이 그 나라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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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바로 이것이 다니엘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재자시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가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신뢰하는 믿음이 다니엘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 제국의 한 복판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신상의 부귀와 영화가 보장된 길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더럽히지 않는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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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의 믿음, 단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정도의 믿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정도의 믿음은 타종교인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교 신자들도 부처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무속신앙인들도 부정타지 않기 위해서 이런저런 계율을 성실하게 지킵니다. 마음 씀씀이와 몸 씀씀이를 매우 조심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 단지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거나, 단지 그분의 율법을 잘 지키는 정도여서는 안 됩니다.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역사의 주재자시라는 것, 그분이 세운 나라가 진정으로 승리하는 나라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신뢰하는 믿음으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신뢰하고, 지금 여기서 그 약속을 붙잡는 믿음으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라야 역사의 소용돌이를 돌파해낼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한 복판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는 믿음입니다. 종교적 차원의 믿음은 단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의 믿음, 단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정도의 믿음인데,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는 그런 종교적 차원의 믿음을 넘어섰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래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단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믿음을 넘어서야 합니다.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는 믿음이 있어야 이 세상의 풍속과 가치관을 돌파해갈 수 있고, 자본주의 사회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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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좀 더 따라가 봅시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는 것은 지극히 미미한 일입니다. 사람들 눈에 확 띄는 일도 아니고, 역사의 흐름을 바꿀만한 혁명적인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일입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자기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환관장과의 관계를 돈독히 다졌습니다. 그러면서 적절한 기회를 찾았습니다. 믿음으로 무작정 선포하지 않고 가장 적절한 순간을 포착하여 조심스럽게 꺼냈습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고 싶지 않으니 제발 환관장께서 도와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환관장은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나라의 포로이지만 젊은이의 뜻이 갸륵하고, 그동안 지켜보니 여러 모로 훌륭한 젊은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9절). 환관장의 마음이 움직인 데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장애물이 없진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의 청을 받아주기에는 너무 위험한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느부갓네살 왕이었습니다. 환관장은 다니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내 마음은 정말 너희를 도와주고 싶다만, 왕께서 너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지정하셨는데 낸들 어쩌겠느냐? 만에 하나라도 너희 얼굴이 초췌하기라고 하는 날에는 내 목숨이 달아난다.’고 속내를 털어놨습니다(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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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은 환관장의 마음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용기를 내어 환관장 밑에서 음식을 담당하는 감독관에게 청했습니다. ‘소생들에게 열흘 동안만 시험삼아 야채와 물만 먹게 해주십시오. 그런 뒤에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과 비교해보시고, 그러고 나서 나리 좋으실 대로 소생들을 처분하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11-13절). 무조건 안 먹겠다고 떼쓰지 않았습니다. 매우 겸손하면서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감독관은 다니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니엘이 요청한 대로 열흘 동안 채식과 물만 주면서 지켜보았습니다. 열흘 후에 보니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보다 더 혈색이 좋고 건강해보였습니다. 감독관도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포도주를 주지 않고 채식을 주었습니다(14-16절). 이렇게 해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3년 동안 바벨론 왕의 음식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으면서도 왕실 장학생 코스를 다 마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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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다시 한 번 전체 과정을 복기해보겠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강대국 바벨론의 포로 신세가 됐습니다. 10대 후반밖에 안 되는 나이에 고국과 가족의 품을 떠나 바벨론이라는 대제국의 한 복판에 섰습니다. 당연히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섭고 두려웠을 겁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놀라운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벨론의 한 복판에서도 살아 역사하시는 최고의 왕이시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가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왕의 음식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대제국의 신하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게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의 믿음이나 단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정도의 믿음을 넘어서는 깊고 넓은 믿음이 있었기에 환관장도 두려워하는 현실 속에서 왕의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결단을 할 수 있었고,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물결을 거슬러 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믿음 외에도 다니엘의 훌륭한 자질이 한 몫을 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고 타협하지도 않으면서 받아들여야 할 것과 저항해야 할 것이 뭔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환관장의 마음을 얻을 줄도 알았고, 음식 업무를 맡고 있는 감독관에게 겸손하면서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할 줄도 알았습니다. 바로 이런 훌륭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 왕실의 한 복판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길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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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입니다.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봐서 아시겠지만, 세상사라는 것이 결단한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결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결단을 실행하기까지는 많은 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눈앞의 현실을 냉정하게 읽는 지혜와 적절히 대처할 줄 아는 능력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사람을 읽을 줄 알고 좋은 관계를 만들 줄 아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잡미묘한 현실을 가로질러 가면서 마음의 결단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는 두 가지가 다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깊고 넓은 믿음, 복잡미묘한 현실에서 진리의 길을 찾아갈 줄 아는 지혜와 실력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놓치지 않아야 될 또 하나의 진실이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된 데에는 믿음도 중요한 요인이었고, 탁월한 실력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었지만, 9절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손길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입니다. 아무리 믿음과 실력이 구비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손길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포로의 신분으로 바벨론 제국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깊고 넓은 믿음과 탁월한 실력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깊고 넓은 믿음뿐 아니라 탁월한 실력이 꼭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재자시라고 해서 믿음과 실력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건 엄청난 착각입니다. 반대로 믿음과 실력만 구비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엄청난 착각입니다. 다니엘의 믿음이 현실화될 수 있었고, 다니엘의 실력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손길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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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그렇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교회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예배 잘 드리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깊고 넓은 믿음이 있어야 하고, 탁월한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손길이 함께 해야 합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건 이 세 가지 요소가 절묘한 조합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세상에서 진정한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진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깊고 넓은 믿음과 탁월한 실력을 구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손길에 엎드리는 전적인 심령의 가난이 있어야 합니다. 깊고 넓은 믿음이 있어야 세상을 가로질러 갈 수 있고, 실력이 있어야 세상에 속지 않으면서(세상과 짝짜꿍이 된 교회에 속지 않을 수 있고) 세상에 하나님나라를 실사구시 할 수 있고, 심령이 가난해야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차분하게 마음을 다잡고 이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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