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다니엘1-난세의 한 복판에 선 다니엘

새벽지기1 2015. 11. 8. 20:01

 

다니엘서는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 많은 분량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요한계시록이라고 할 만큼 거대한 역사적 전망이 담겨 있는 묵직한 책입니다. 다니엘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만 다니엘 개인의 신앙적 영웅담이 아니라,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유다 백성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역사의 최종 승리자라는 사실을 전하는 책입니다. 강대한 제국들이 지상에 세워질 것이고, 그 제국들의 군홧발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겠지만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궁극적인 승리를 하신다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입니다.

  

다니엘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여기 바벨론이 등장하는데 바벨론은 새롭게 부상한 신흥강대국입니다. 이전까지 고대 근동을 지배한 최대 제국은 앗수르였습니다.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120년 전에 멸망당했고, 바벨론도 앗수르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의 아버지인 나보폴라사르가 21년 전(BC 626년, 예레미야가 사역을 시작한 해)에 앗수르로부터 독립하여 신바벨론 왕국을 건설하면서 앗수르와 바벨론, 애굽 사이에 패권다툼이 시작됐고, 이 패권다툼에서 바벨론이 앗수르와 애굽 연합군을 정복하여 대제국이 됐습니다. 기원전 605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를 세운지 21년 만에 신흥강국으로 부상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이 다니엘서가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그 때의 정황을 조금 더 살펴봅시다. BC 626년에 앗수르로부터 독립하여 신바벨론을 세운 느부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폴라사르는 14년 후인 BC 612년에 메대와 북쪽에서 온 스키타이족(Scythians)과 연합하여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공격했습니다. 두 달간 니느웨를 완전히 포위하여 모든 공급 줄을 끊자 니느웨는 결국 무릎을 꿇었습니다. 니느웨를 함락당한 앗수르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있는 군사 교통의 요충지인 갈그미스 성읍을 중심으로 세력을 정비하면서 재기를 준비했습니다.

앗수르는 1200년 동안 근동의 북방을 호령했던 나라입니다. 그런 앗수르가 쇠약해지자 남방의 강대국인 애굽은 그 틈을 이용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동시에 앗수르가 완전히 붕괴되면 바벨론의 위력이 애굽까지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애굽왕 바로느고는 바벨론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앗수르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어찌됐든 앗수르가 버티고 있어야 힘의 균형이 깨지지 않을 수 있고, 앗수르가 버티고 있어야 바벨론이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니까, 앗수르 또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애굽의 지원이 필요했으니까 애굽과 앗수르는 전략적인 동맹을 맺었습니다.

갈그미스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던 앗수르는 애굽과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형성해 바벨론과 최후의 항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패배하고 맙니다. 이로써 앗수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이때 갈그미스 전투를 진두지휘한 사람이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BC 605년의 일입니다.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명실공이 세계의 강자로 우뚝 섰습니다. 이때 유다의 왕은 여호야김이었습니다. 여호야김은 요시아 왕의 아들입니다. 요시아는 애굽의 바로느고 왕이 팔레스틴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왕 위에 앉힌 인물입니다. 그러나 애굽이 앗수르를 지원하기 위해 갈그미스로 출정할 때 그것을 막으려고 나섰다가 전사했습니다(왕하23:28-30). 왕을 잃은 유다 백성들은 애굽에 앙심을 품고 반 애굽파를 대표하는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애굽 왕은 괘씸했습니다. 그래서 3개월 만에 반 애굽파인 여호아하스를 퇴위시키고 애굽으로 끌고 가 죽이고(왕하23:34), 친 애굽파인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서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기원전 6-5세기는 말 그대로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근동의 국제 관계가 소용돌이치는 난세였습니다. 유다의 운명도 풍전등화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격동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고, 대내적으로도 친 애굽파와 친 바벨론파로 나뉘어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에게 모든 땅과 세계를 주었으니 느부갓네살을 섬기라고 외쳤습니다(렘 27:1~15). 하지만 친 애굽파였던 여호야김 왕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친 애굽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에 화가 난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야김을 징벌하러 예루살렘 원정에 나섰습니다. 예루살렘을 에워싸 항복을 받아 낸 다음 여호야김 왕과 유력한 지도자들과 많은 기술자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갔습니다. 성전에서 사용하던 그릇 얼마도 가져다가 시날 땅에 있는 신전의 보물 창고에 두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도 이때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치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왕을 세웠다고 말했습니다. 다니엘서도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셨다”(1:2)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이런 치욕적인 일이 일어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황스럽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을 이방의 손에 넘길 수 있단 말인가, 유다의 왕이 어떻게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되고 개죽음을 당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나라가 어떻게 나라를 잃을 수 있단 말인가, 솔직히 당황스럽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적 통념으로 생각하면 솔직히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사시대부터 거듭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였고,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말씀하신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순종하면 이 땅에서 복을 누리려니와 불순종하면 뽑아내시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신28:1-31, 29:14-29). 하나님은 지금 이 말씀대로 행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세요. 이스라엘을 이방의 손에 넘겼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잊으셨다거나 포기하셨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을 영영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결코 뒤집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하시는 게 있습니다. 바로 징계입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 아들이 아니니라.”(히12:7-8).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기 때문에 오히려 징계하십니다. 자기 백성이 잘못된 길을 가는 걸 그냥 방치하지 않으세요. 징계를 해서라도 잘못된 길에서 건져내시고 회복시켜내십니다. 유다가 겪는 모든 수치와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유다가 겪고 있는 수치와 고난은 분노의 심판이 아니라 사랑의 징계인 겁니다. 다니엘서를 따라가다 보면 그걸 알 수 있게 됩니다.

 

어쨌든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을 정복한 느부갓네살 왕은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특별 지시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족과 귀족 중에서 잘 생기고, 신체적인 결함이 없고, 지능지수가 높고, 온갖 지식에 통달하고, 학문에 익숙하여 바벨론 왕궁에서 일할 만한 사람을 데려다가 3년 동안 왕이 먹는 포도주와 음식을 제공하고, 갈대아 사람의 언어와 학문을 가르치라고 특명을 내렸습니다(3-5절). 그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총명하고 유능한 유다 청년들을 훈련시켜서 바벨론 왕실의 자문관으로 쓰기 위해서였습니다(4절).

여기에 나오는 갈대아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발원지인 바벨론 지역의 옛 이름입니다. 갈대아는 인류 최고의 문명 발상지인 수메르 문명의 중심이었고, 행성의 위치나 운행을 통해 인간의 운세나 나라의 흥망성쇠를 파악하는 점성술과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의사를 소통하는 영매술이 고도로 발달된 지역입니다. 고대사회는 점성술과 영매술에 의존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점성술사와 영매술사들이 왕의 측근으로 활약하면서 국가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유대 청년들에게도 갈대아 사람의 언어뿐 아니라 이런 갈대아 학문을 가르치라 한 것입니다.

 

이때 발탁된 소년들 중에 다니엘과 세 친구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들로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아스부나스는 먼저 이들의 유대식 이름부터 바꿨습니다. 이들의 이름에는 하나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열정과 신실함이 담겨 있었거든요. ‘하나냐’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이고, ‘미사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라는 뜻이고, ‘아사랴’는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뜻이고, ‘다니엘’은 ‘하나님의 나의 재판관이시다’를 뜻하니까, 그런 이름을 사용하게 놔두겠습니까? 당연히 바벨론식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냐’는 바벨론의 신 아쿠의 명령이라는 뜻의 ‘사드락’으로, ‘미사엘’은 바벨론 땅의 여신 아쿠와 같다는 뜻의 ‘메삭’으로, ‘아사랴’는 바벨론의 신 느고의 종이라는 뜻의 ‘아벳느고’로, ‘다니엘’은 바벨론의 벨신이여 왕을 보호하소서라는 뜻의 ‘벨드사살’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정복한 후 창씨개명을 통해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려 했던 것처럼, 환관장 아스부나스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뽑은 후 이들의 심장 속에 새겨진 유대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부터 했던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알았을 것입니다. 창씨개명을 하고 갈대아인의 언어와 학문을 습득하게 하는 것이 결국은 바벨론 제국의 사람이 되라는 요구라는 것, 바벨론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길들이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떡하겠습니까? 아무리 유대인의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 해도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한복판에 서 있는데 어떻게 맞설 수 있겠습니까? 꼼짝없이 창씨개명을 당해야 했습니다. 갈대아인의 언어와 학문을 습득해야 했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족 아니면 귀족 출신입니다. 거기다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깊고 신실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바벨론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바벨론이 잡아가면 잡혀가야 했고, 창씨개명을 요구하면 창씨개명을 당해야 했고, 갈대아 사람의 언어와 학문을 배우라 하면 배워야 했습니다. 바벨론이 요구하는 대로 바벨론 왕실을 돕는 자문관 코스를 밟아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개인의 운명입니다. 개인의 운명은 역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니엘이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 해도 바벨론에게 나라가 짓밟힌 이상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바벨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한 사람이 아무리 유능하다 해도 자기 시대를 초월할 수가 없고, 역사적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본이 왕 노릇하는 자본주의 사회, 세계 전체와 경쟁해야 하는 지구적 경쟁사회, 시장이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시장 만능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 현실 속에서 경쟁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시장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아무리 원치 않는다 해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와 경쟁을 해야 하고, 내 몸과 삶을 시장에 내놓아야 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발군의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도 바로 이 대목에서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들의 운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저들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눈앞의 현실을 바꿀 수 없었고, 저들이 무슨 결심을 한다 해도 바벨론 왕실의 지배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에 무릎 꿇었느냐?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저들은 자포자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바벨론 왕실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길이 뭔지를 고민하며 찾았습니다.

저들은 일단 자기들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갈대아 사람의 언어와 학문을 배우는 것은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걸 거부하는 것은 곧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일단 받아들였습니다. 또 왕실에서 베푸는 여러 가지 특혜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 하나를 붙잡았습니다. 왕이 제공하는 음식은 거부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왕의 진미를 거부하는 것은 정말 미미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그것만이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의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그 현실에 굴복하지도 않았고, 그 현실과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악한 바벨론 제국의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바벨론 제국에 저항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택을 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참고가 됩니다. 우리는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본주의 사회시스템을 바꿀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떠날 수도 없습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추종하는 건 더더욱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단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체제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 해도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한 복판에서 자본주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벨론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길을 찾았던 것처럼, 우리도 자본주의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무거운 책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과제를 회피하지 마시고 정직하게 마주하시기 바랍니다. 매우 힘들고 어렵지만 이 과제 앞에서 깊이 고민하면서 함께 길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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