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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격적 만남이란 무슨 뜻인가요? / 박신 목사

새벽지기1 2015. 10. 28. 15:03

 

인격적 만남이란 무슨 뜻인가요? / 박신 목사


[질문]


인격적 관계라든지 인격적 만남이라는 표현을 가끔 듣게 되는데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답변]

질문은 아주 간단하지만 그 의미는 가볍게 다룰 성질이 아닙니다. 질문의 정확한 의도가 틀림없이 기독교적 용례, 예컨대 “신앙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라든지 “구원은 살아계신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전제”라고 말할 때의 정확한 뜻을 물으신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의 용례에서 문자적 혹은 사전적 정의(定意)만으로는 그 해석에 턱 없이 부족하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국어사전에선 ‘인격’을 네 가지로 구분해 정의하고 있습니다. (1. 사람의 품격, 자격, 2. 법률적 행위의 주체, 3. 개인으로서 독립할 수 있는 자격, 4. 자각이 있고 도덕상의 책임을 질 만한 자격이 있는 개체.-새국어대사전, 한국도서출판중앙회 1997년간) 또 일반적으로 ‘인격적’이라고 말할 때는 품성, 기질, 매너 등이 도덕적이며 이성적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본능에 의존하지 않으며, 비이성적이거나 반윤리적이 아니며, 사회적 규범을 잘 따르기에 동물과 대비해 인간다운 기본 품격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의미에선 반드시 하나님과 연관해서 사용되어집니다. (성경에서 인격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바를 신학적으로 정리한 용어입니다.) 특별히 창세기의 이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1:26,27)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지 하나님이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외적 형상을 닮은 것이 아니기에 그분을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고결한 신선처럼 상상해선 안 됩니다. 품성과 속성 등에서 닮게 창조되었다는 뜻인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형상은 하나님에게 지정의(知情意)가 있듯이 인간 또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격은 동물과 다른 인간 특유의 모습으로 지성, 감정, 의지를 동원해 스스로 판단, 결단, 시행할 수 있는 총체적 능력입니다. 인격적이라는 말도 지정의를 전부 동원해, 즉 한 인간이란 개체 전체가 인간답게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상기의 사전적 정의 중에 성경적 의미와 가장 유사한 것은 4번입니다.) 물론 동물도 비록 그 수준이 낮긴 하지만 지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생존과 번식 목적에 따라 무조건 본능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목적과 별개로 스스로 어떤 일을 도모해 시행할 수준이 결코 아닙니다.

반면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 지정의가 동물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주 고급한 수준으로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지정의를 통괄할 수 있는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습니다. 그분 뜻대로 살아야 하니까 그 뜻을 지각하고 교통할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영혼입니다.

따라서 성경적 의미의 인격이란 지정의뿐만 아니라 영혼도 포함된 한 개별 인간의 총괄적 특성이며, 인격적이란 동물과 다른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윤리적으로 선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성경적 의미로는 인격적인 것과는 별개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 당연히 선하고 의롭게 행하게 되고 또 인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즉, 성경적으로 인격적인 여러 모습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정의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관계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의 뜻을 살피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부정적인 의미 즉 인격적 만남과 관계가 아닌 것부터 따져 보겠습니다.

우선 성경공부를 통해 기독교 교리들이 납득되어 믿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고는 죄 사함의 길이 없다는 사실을 수긍했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리에 대해 단지 머리로만, 즉 지성과 의지만 동원하여 반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불신자가 말기 암 선고를 받고 병원에서도 치료를 포기하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독교의 기도원에 올라갑니다. 또 울고 불면서 간절히 기도하여 기적적으로 낫는 경우가 가끔 나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당장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온전한 신자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초자연적 간섭만 있었는지 혹은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신자 친구의 권유를 받아 불신자가 찬양, 간증, 치유 집회에 참석해 아주 감동될 수 있습니다. 뭔가 신령한 은혜를 받은 것 같고 자신 속에 쌓여 있던 모든 어둠이 가셔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결단의 초대에 응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사실 하나만으로 믿음이 생기고 구원을 받았다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만약 감정적 흥분에 부응해 결단한 것뿐이면 전인격이 동원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지성 감성 의지 중 하나 혹은 둘만 동원된 경우는 인격적 만남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셋이 다 동원되어도 영혼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작동되었다면 여전히 인격적인 만남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란 개체 전부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반응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사람 전체가 완전히 바뀌어야, 더 실감나는 표현으로는 뒤집어져야 합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은 또 그 바뀐 사람으로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시적 부분적 변화만으로는 인격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자기 내면의 수양과 도덕적 삶의 표본으로 받아들여 그분이 가르친 계명만 순종하는 것은 종교적 도덕적 만남과 관계일 수는 있어도 인격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이제 인격적 만남과 관계의 구체적인 의미를 살펴 볼 차례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한 인간이 지정의와 영혼까지 총괄적으로 동원하여 최초로 나타내는 반응이 만남이며, 그 이후 죽어서 천국가기까지의 지속적인 반응이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적 선각자나 도덕적 스승으로서가 아닌 자기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한 후에 평생을 두고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성령이 그 영혼에 간섭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최초의 반응은 자신이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온전한 인식과 그에 따른 철저하고도 전인적(全人的)인 회개여야 합니다. 단순히 자기가 범한 나쁜 행동 몇 가지를 반성하고 또 치명적으로 잘못된 습관 한두 개를 고쳐선 안 됩니다. 자기라는 존재 전체가 죄에 묶인 노예로 그 영혼이 완전히 타락해 있었기에 죄스런 행위가 따라 나온 것이며, 그 근본적 발단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외면, 거부, 배반 심지어 저주했기 때문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 필연적 결과로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혹여 지식적 종교적으로 알았더라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삼지 않았던, 삶이 정말로 향방 없는 달음질이요 허공을 치고 만 완전한 허사였음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또 그럼으로써 오직 자신과 자기 가족만의 안락과 형통을 위해서 세상의 방식대로 따랐던 옛 생활이 이뤄낸 것이라고는 공허함과 갈급함과 더러움과 추함 뿐이었음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계속 있었다면 그야말로 영원한 사망의 길로 흘러들어가 자기 인생에 소망이라고는 단 한 치도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나아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소망의 빛을 발견해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여 자신의 죄와 허물이 영단번에 깨끗이 씻음 받아서 이전에 이 땅의 한시적 삶에만 목표를 두었던 인생을 완전히 청산해야 합니다. 그분의 부활에 연합하여 예수님의 의로 덧입혀진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서 이제는 오직 그분의 신령하고도 거룩한 통치를 받아 그분 뜻에 따라 살며 천국에서 궁극적인 영광을 누릴 소망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과정이 인간의 지정의적 노력만으로는 절대 이뤄지지 않습니다.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는 동안에 타락했던 영혼을 성령께서 새롭게 해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도무지 나와는 상관이 없고 까닭 없이 밉기만 했던 십자가 예수가 이제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자 풍성한 새생명임을 확신하게 되고 아무 이유 없어도, 즉 자기가 처한 현실적 여건과는 상관없이 좋기만 해야 합니다. 당연히 이제부턴 십자가의 아름다운 덕과 향기를 세상에 증거하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고 또 실제 어떤 방식으로든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란 성령님의 간섭과 은혜로 십자가 예수님을 자신의 존재, 삶, 인생 전부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7-19)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온전히 받는 것, 특별히 이전의 자기와 같았던 자들을 하나님께 화목케 하는 직책을 실현하며 사는 것이 그분과의 관계입니다.

인격적 만남과 관계란 상식적으로도 만나야할 두 인격체가 있어야 하며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하며 또 각자가 상대의 원하는 대로 적절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제 삼자, 혹은 책과 편지 같은 매개체를 통한 간접적 교류를 두고 인격적 관계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자 개인의 내면적 수양, 자성, 묵상, 직관, 득도는 더더욱 아닙니다. 반드시 살아 계신 절대적 객체로서의 하나님과 조우가 있어야 하며 또 그 때에 그분에게 들은 말씀이 있어야 하며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의 전부를 건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요컨대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어 드려서 이제는 그분이 죽으라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종교적 개념, 사상, 원리, 신조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당신께 나아올 수 있는 길로는 오직 독생자의 죽음과 부활에 인격적으로 동참하는 자들에게만 열어 놓은 역사적 사실이자 절대적 진리입니다. 지금도 땅과 하늘의 모든 권세를 주관하시는 예수님이 한 죄인의 존재를 완전히 뒤집은 후에 그 삶과 인생을 이전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거룩하게 이끄십니다. 그래서 신자 또한 오직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말씀과 기도에 전무할 때에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권능 가운데 있음을 구체적인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확실히 인지하고 누리게 됩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알기 쉽게 말하면 애인과의 관계처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예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10/11/2008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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